신앙의 길/기도 & 묵상

대림 3주(토) 모심(侍) 4 : 사가랴

w.j.lee 2024. 12. 10. 10:09

사가랴 (누가복음 1:5-20 )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눅 1:20)


처음 성탄을 맞이한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길 없는 곳을 더듬어 길을 찾고 그 길을 온전히 걸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져야 했고, 요셉은 희미한 꿈을 통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빈 들에서 주님을 기다렸고 시므온은 늙기까지 주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믿음으로 걷는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임하는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는 침묵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 성소의 분향과 침묵

시골 사제 사가랴는 차례에 따라 분향을 위해 성소에 들었습니다.

비록 자식은 없지만 신실하게 살아왔고 평생에 한 번 뽑히기도 어려운 성소 분향에 뽑혔으니 늘그막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특별할 것도, 희망도 없이 저물녘 햇살처럼 천천히 가라앉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 사가랴에게 주의 사자가 찾아 왔습니다. 

아들이 태어나 주님을 맞을 백성을 준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늙은이요 꺼져가는 불씨라 여겼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불꽃같은 선지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이가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 하니 당황스럽습니다.

천사는 믿지 못하는 그에게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을 못 할 것이라 예고합니다.

침묵이 주어졌습니다.

 

침묵은 삶을 흔듭니다. 

분향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그를 바라 보는 이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고향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도, 이해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시비를 가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침묵 가운데 머 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침묵이 그를 새롭게 길러갑니 다.

 

침묵은 선물로 변합니다. 

말을 잃으면 밖을 향해 소통하던 마음은 내면으로 침잠합니다. 

입이 닫히면 뻗어나가던 생각들과 부유하던 견해들이 가라앉습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던 주장과 확신조차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비워지는 중에 침묵은 내적인 깊이를 낳고 그 깊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습니다.

말씀은 침묵 속에서 뿌리내리고 확신을 더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더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늙어가는 사가랴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아이의 아비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도록 양육하는 책임감을 품습니다.

그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침묵이 건네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그는 더 이상 늙을 수가 없습니다.

 

- 사가랴의 찬미, 자비의 송가(Benedictus)

아기가 태어나고 이름이 정해진 후에 사가랴의 입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아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으로 여겨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으려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인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 요한이라 부릅니다.

아기는 아버지를 잇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 요한이 됩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드의 시 처럼 사가라는 요한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요한의 길은 옛 신앙의 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의 길입니다.

 

이제 사가랴도 새로운 신앙의 길이 열리고 있음을 찬양합니다.

그의 찬양은 침묵 가운데 깊어져 터져 나오는 믿음의 고백 이자 깨달음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늘 주님을 섬기도록 해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기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천사의 예고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사가랴의 고백이 됩니다.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리니 주님보다 앞서가서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는 길을 백성에게 알리는 이가 되리니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자비로움에서 오며 우리 모두를 평화의 길로 이끌 어 주시리라'(눅1:76-79)'

 

침묵은 귀로 들은 말씀을 마음속 깊이 침잠하게 하여 용솟음치는 찬양으로 터져 나옵니다.

그는 침묵을 통해 주님을 맞이 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기도

주님, 

삶이 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짐작한 대로 흘러가는 삶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늙어가는 사가랴에게 요한의 아비가 되게 하셔서 새로운 소망과 사명을 가졌듯

저희도 주님 오시는 계절에 새로운 소망, 저를 뜨겁게 하는 소망에 사로잡히게 하십시오.

이를 위해 침묵하며 당신의 오심을 묵상하게 하십시오.

아멘


출처 : 대림묵상집 - 보일示 모실侍(송대선, 지강유철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