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검군

w.j.lee 2018. 10. 4. 06:50


검군


검군은 대사 벼슬을 지낸 구문의 아들인데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정해년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니 다음 해 봄·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

 이 때 궁중의 모든 사인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이 혼자 받지 않자 여러 사인들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받는데 자네만 혼자 거절하니 웬일인가. 만약(몫이) 적어서 싫다면 다시 더해 주겠네."

 검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화랑 근랑의 무리에 이름을 걸어 화랑의 뜰에서 행실을 닦았으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 있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네."

검군이 자기를 죽이려는 모의임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을 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대답하지 않자 재삼 물었다. 그래서 대략 그 이유를 말했더니 근랑이 말했다.

"어찌하여 관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기 죽는 것이 두려워 여러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은 인정상 차마 못할 바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부른 장소로) 가니 여러 사인들이 술을 마련해 놓고 사과하면서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이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설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화랑 검군의 지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 4단 구성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내용 연구

검군은 대사 벼슬을 지낸 구문의 아들인데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정해년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니 다음 해 봄·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

- 시대 배경과 인물 소개

 이 때 궁중의 모든 사인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이 혼자 받지 않자 여러 사인들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받는데 자네만 혼자 거절하니 웬일인가. 만약(몫이) 적어서 싫다면 다시 더해 주겠네."

 검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화랑 근랑의 무리에 이름을 걸어 화랑의 뜰에서 행실을 닦았으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 있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네."

- 사인들의 모의와 검군의 정의로운 태도

검군이 자기를 죽이려는 모의임을 알고 근랑에게 작별을 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대답하지 않자 재삼 물었다. 그래서 대략 그 이유를 말했더니 근랑이 말했다.

"어찌하여 관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기 죽는 것이 두려워 여러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은 인정상 차마 못할 바입니다."

- 죽음을 마다 않는 검군의 기개

마침내 (그들이 부른 장소로) 가니 여러 사인들이 술을 마련해 놓고 사과하면서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이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죽었다.

- 검군의 죽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사인 : 궁 안에서 일을 맡아 보는 사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이해와 감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화랑도들의 정신 세계가 나타난 작품으로 의(義)와 정의(正義)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검군

 ?628(진평왕 50). 신라 중고기의 궁정관리. 대사(大舍)를 지낸 구문(仇文)의 아들이다. 화랑 근랑(近郎)의 낭도출신으로 강직, 청렴하였다.
 사량궁사인(沙梁宮舍人) 벼슬을 하고 있던 627년(진평왕 49) 8월에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이 상하였으므로 그 이듬해 봄과 여름에 기근이 심하여 민중의 생활이 몹시 곤궁하였을 때 궁정관리들이 창예창(唱
倉)의 곡식을 몰래 훔쳐 나누어 가졌는데, 그만은 이를 끝내 뿌리쳤기 때문에 동료관리들에 의하여 암살될 것을 예견하였으나, 그들을 고발하지 않고 근랑에게 가서 최후의 작별인사를 하였다.
 과연 관리들은 그가 이 사실을 근랑에게 밀고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그를 주연에 초대하여 독살하였다. 검군의 일화는 당시 화랑집단성원들의 생활관 내지 사생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羅花郎硏究(三品彰英, 1943). 화랑도 이야기와 7세기 신라사회(金基興, 역사비평 22, 199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