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기도음악 16

헨델 : 《메시아》 중에서 '내주는 살아계시고'

헨델 : 《메시아》 중에서 '내주는 살아계시고' 프랑스 리옹 출신의 조각가 루이 프랑소와 루빌리아크(Louis-François Roubiliac, 1702-1762)는 1738년 헨델의 좌상 제작으로 큰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 제작이란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는 기록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걸 보면, 경제적으론 파산 지경이었으나 명성은 여전했던 모양입니다. 헨델은 말년에 유언장 내용을 몇 차례 수정하거나 추가했습니다. 그 내 용을 여기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지만 1) 가난한 음악가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1000파운드를 지원하고, 2) 자신이 죽은 뒤 하인 모두에게 1년치 임금을 지급하고, 3) 종복이었던 존 뒤버크에게 그의 그 어떤 친구, 연..

바흐 : 《마태수난곡》,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바흐 : 《마태수난곡》,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20대 초반에 국립합창단이 연주한 바흐의 수난 오라토리오 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 연주회를 기점으로 바흐가 지루하거나 어렵다는 미신에서 깨어났습니다. 바흐의 이 수난 오라토리오에서 가장 충격인 곡은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 꿇고 무덤속 당신을 향하여...'로 시작되는 마지막 합창입니다. 드라마틱한 곡이 많고 가슴 절절하게 만드는 곡도 적지 않았지만 마지막 합창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습니다. 제겐 그 랬습니다. 그 공연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예수의 시신을 만졌습니다. 그 충격은 컸습니다. 스물두 살이 되도록 숨이 끊어진 예수께 저를 데려가 주님의 시신을 만지게 했던 설교나 성경 공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다수 한국 개신교에서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과..

아르보 페르트 : 《스타바트 마테르》

아르보 페르트 : 《스타바트 마테르》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1935~)는 젊은 시절에는 급진적인 현대 음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국 에스토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점령되면서 공산당에 염증을 느끼고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신비와 고대 그레고리안 성가,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치유와 구원, 그리고 성찰이 그의 음악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는 알반 베르크란 작곡가를 기리는 음악재단으로부터 그의 탄생 100주기 기념으로 위촉을 받아 1985년 완 성했습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라틴어로 '어머님이 일어서시다'란 뜻입니다. 십자가 곁에 비통하게 우시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내용입니다. 중세 이후 비발디, 스카를라티, 페르골 레시, 로시니, 구노, 드브르자크 등..

슈만 : 《미사 사크라》 중'키리에'

슈만 : 《미사 사크라》 중'키리에'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예수의 수난이나 죽음 또는 부활을 주제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의 예외를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슈만은 라인 강에 투신 자 살을 기도하기 2년 전, 그러니까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 4년 전에 그의 생애 처음으로〈미사 사크라〉와 〈레퀴엠〉을 작곡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목사였지만 슈만은 그 어떤 교회 관련 일에 종사하지 않았고 기독교 교리를 신봉하지 않았습니다. 슈만은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음악 작곡가가 아닙니다. 그의 말마따나 "종교는 없지만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슈만, 그래서 평생 교회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던 슈만은 무슨 이유로 1년 사이에 미사와 레퀴엠이란 녹록하지 않은 교회 ..

그레차니노프 : 《에큐메니컬 미사》

그레차니노프 : 《에큐메니컬 미사》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그레차니노프(Alexander Grechaninoy 1865-1956)는 14살에 피아노를 처음 보았을 정도로 음악을 늦게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음악하는 걸 반대해 자립이 거의 불가능한 그를 위해 당시 저명한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죽을 때까지 경제적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레차니노프의 첫번째 교향곡 초연 지휘를 맡았습니다. 1910년까지 차르에게 연금을 지급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체제를 더는 견딜 수 없어 1825년에 프랑스로 이민을 갔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193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956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활동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그레미 녹음상을 받은 황병준이 녹음한 ..

구노 : 오라토리오[죽음과 삶]

구노 : 오라토리오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20여 개의 미사곡과 6개의 오라토리오, 100곡의 종교 모테트를 남겼습니다. 한 때 성직자가 되기 위해 생 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습니다. 3년간의 로마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와서는 우리에게 기해 박해 당시 3명의 신부가 순교했던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음악감독 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나이 51살 때는 교황 비오 9세의 서품 25년을 축하하기 위해 교황 행진곡을 작곡하여 헌정했는데 바티칸에서는 1949년 이 작품을 공식 국가로 채택하였습니다. 1847년에는 카르멜 수도회의 견습 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구노는 가톨릭 측으로부터 허락을 받..

모차르트 : 고아원 미사

모차르트 : 고아원 미사 예수의 사순절을 기념하는 목적이 나만의 영성 심화를 넘어서 우리 이웃을 둘러 보는 실천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한스 큉에 의할 때 모차르트는 "독실한 척하는 교회 인사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고, 가식적이고 위선적 행동을 증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쫓아낸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콜로레도와 같은 인간이 대표적일 겁니다. 그 사건이 워낙 유명했기에 잘츠부르크는 물론 빈의 성직자들이나 보수적 신앙인들에게 모차르트는 비판적 가톨릭 교도로 찍혔습니다. 가톨릭 교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한술 더 떠서 1786년에 체제 전복적인 오페라 을 발표하고 난 다음엔 성직자들에 이어 귀족들까지 멀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차르트가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건..

세자르 프랑크 : 오라토리오 팔복

세자르 프랑크 : 오라토리오 팔복 프랑스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Cesar Franck, 1822-1890)는 매일한 시간씩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던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프랑크는 '생명의 양식'이란 곡으로 유명 합니다. 삶의 후반으로 갈수록 프랑크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표현하는 장엄미사 오라토리오 등등의 작품에 치중했습니다. 프랑크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은 산상수훈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오라토리오 팔복](Les Béatitudes)입니다. 솔리스트 를 8명이나 요구하고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거대한합창곡입니다. 프랑크는 이 작품의 완전한 초연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소규모 편성으로 축소하여 자택에서 연주한 게 전부입 니다. 그의 종교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

하이든 : 십자가 위의 일곱말씀

하이든 : 십자가 위의 일곱말씀 오스트리아 음악가 하이든은 스페인 남부 카디츠의 고위 사제 호세 살루스로부터 청탁을 받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을 작곡했습니다. 고난주간 성 금요일 강론때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을 하나씩 강론한 뒤에 들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앞과 뒤에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곡을 추가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은 모두 합쳐도 200 글자가 채 안 됩니다. 채찍과 망치와 창에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깨지는 고통 속에서 더 길게 할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곡을 의뢰한 사제는 어떤 이유에서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을 낭송하고 풀이하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오케스트라가 가사 없는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을 연주하게 했을까요...

브람스 :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코랄 전주곡

브람스 교회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파이프 오르간을 뺀다는 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피아노나 드럼은 교회 음악으로 부적합하거나 불경스럽다고 하기 위해 오르간만이 교회 음악에 적합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마지막 작품은 입니다. 19살에 처음 오르간 독주곡을 편곡한 브람스는 23살부터 26살까지 매년 한 곡씩 오르간 독주 곡을 썼습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오르간 곡을 작곡하지 않 았습니다. 그랬던 브람스가 죽던 해에 오르간 작품을 썼습니다. 죽음이 저만치 다가오는 걸 느꼈기 때문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클라리넷,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브람스는 좋아했고 그 악기를 위해 곡을 많이 썼습니다. 20대에 잠시 관심을 보였던 오르간을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