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6장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w.j.lee 2023. 5. 9. 13:17

제6장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다.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유대인들과 수리아 군대 사이의 전투의 결정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보낸 장교가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의 분지에 위치한 모딘(Modin)이란 마을에 들어갔을 때 발생하였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Mattathias of the Asmonean line)는 이 방신을 숭배하기 위하여 세워진 제단 위에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연로한 제사장에게 승복하라는 특별한 요청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본을 보이면 백성들이 영향을 받으리라는 수리아측의 계산 때문이었다.

만일 응락하면 그는 지위와 명예와 부를 얻게 될 것이며 수리아 왕의 측근 중의 하나가 되리라는 설득이 었다. 이러한 명령에 대하여 마타디아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 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뜨리는 일을 금하고 계 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 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응락하기를 거절하였다. 다른 지방 의 수령이 제사를 드리려고 앞으로 다가오자 마타디아스는 그를 때려 눕혀 죽여버렸다. 그는 또한 아펠레스(Appelles)도 죽이고 그 제단을 훼파시켰다.

 

그 뒤에 마타디아스는 산으로 도피하면서 유대인의 신앙에 충성하 는 자들에게 그를 따르라고 청하였다. 그의 아들들과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이 무리의 규모가 작았지 만 점점 수효가 늘어갔다. 그리고 마타디아스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대장이 되었다. 마카비 1서는 그들의 활동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인근 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였으며 회당을 재건하곤 하 였다. 그들의 대열은 하시딤(Chasidim)이라 불리운 율법의 열성분자들 에 의하여 늘어갔고 이들 애국자들은 유대의 이곳 저곳을 오르내리면 서 보다 큰 도시는 피하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공격하면서 정화를 위 한 그들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1. 유다 마카비우스(B.C. 165~161)
마타디아스는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이란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한 동안 이 다섯 아들의 아버지가 반란을 영도하였으 나 심한 과로로 그는 B.C. 166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그의 삼남인 유다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요세푸스는 그가 장자였다 고 주장한다). 유다(Judas, B.C.165~161)는 마카비우스(Maccabeeus), 또는 "망치를 든 자”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게릴라 부 대들을 자기의 지휘 아래로 일원화시켰으며 게릴라 부대의 유능하며 탁월한 대장이 되었다. 그의 활동에 의하여 영광스런 유대인의 역사 가 시작되었다. 수리아군은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을 굴복시키려고 노 력하였으나 침략군들은 유다 마카비우스에 의하여 패주하였다. 사마 리아의 총독인 아폴로니우스(Appolonius)는 유다를 굴복시키라는 명령 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또 다른 적수인 코엘레 -수리아의 총독 세론(Seron)은 벳-호론(Beth-horon)의 통로에서 유다에 의하여 참패를 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본국을 지키게 하려고 리시아스 (Lysias)를 남겨두고 페르샤군과 알메니아군을 대적하기 위하 여 동부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리시아스는 유대의 산지를 공격 하기 위하여 니카놀(Nicanor)과 게올기아스(Georgias)를 지휘관으로 세 워 일단의 군대를 파송하였다. 니카놀은 아얄론(Ajalon) 평원에 진을 쳤다. 46,000명의 보병과 7천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유다의부대를 쓸어버리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게올기아스는 군대의 8분의 1 을 야밤에 진군시켜 유다를 급습하려고 하였으나 그를 발견할 수 없 었다. 오히려 유다는 단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니카놀을 급 습하여 그를 패주시켰다. 수리아군과 동행하였던 노예 상인들은 포로 로 잡혀 자신들이 노예로 팔렸다. 이 전투는 B.C. 164년 여름에 일어 났다.
또 다른 유대인의 승전은 B.C. 165년에 있었다고 마카비 1서는 전 하는데 이 때 유다는 리시아스를 격퇴하였다. 스네이드(Snaith)는 마 카비 1서 저자가 이 점에 있어서 실수를 범하였다고 믿고 있다. 리시 아스는 6만의 보병과 5천의 기병을 거느렸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1 만의 군대를 가진 유다가 5천의 수리아군을 살상하는 결정적인 승리 를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B.C. 164년 유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있는 모든 이방적 인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제정한 이전의 제사들을 다시 드림으로써 성전을 회복하였다. 하누카(Hanukkah, 혹은 재봉헌) 축제 가 B.C. 164년 키스레브(Kislev) 월(月) 약 25일에 열렸다. 종교의 자유 가 쟁취되었고 새로운 제사장이 임명되었다. 요한복음 10:22에서 우 리는 이런 기록을 읽게 된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 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이 축제는 "빛 들의 날”로도 알려졌으며 유다 마카비우스가 치른 전쟁의 첫 단계의 끝을 맺었다.
유다의 승리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사는 유대인의 자유를 쟁취하는 데 국한되었다. 그는 또한 네게브(Negeb)에 우거하는 아랍인인 베드 윈 족속들과 사소한 싸움을 하게 되어 승리하였고 유대의 통치영역을 필리스티아 (Philistia) 지방에까지 넓혔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은 길 르앗과 갈릴리에 사는 이방인들과 분쟁을 겪는 와중이었다. 분쟁 중 인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따라 일단 의 군대의 호위 속에 시몬과 요나단의 부하들이 보내어졌다. 그들 은 왕족들을 구출하여서 그들이 유대 땅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러 한 원정의 결과로 유다는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으며 에돔(Edom)과 필리스티아(블레셋, Philistia) 땅에까지 원정 을 나갔다.
2. 유다에 대한 리시아스의 공격
유다가 이러한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안티오쿠스 4 세 에피파네스는 동부전선에서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한 전투에 출전 하기 전에 그는 7살난 아들(후에 안티오쿠스 5세 유파터)을 휘하 장 수인 필립에게 부탁하였으며 그는 훗날 이 소년의 섭정이자 후견인으 로 임명되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자 리시아스는 강제로 유대인 들을 헬라화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유다가 수리아 수비대를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성채인 아크라(Akra)에서 몰아내자 리시아스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남쪽에서 벳-주르(Beth-zur)를 통과하는 계곡으로 유다를 공격해갔다. 리시아스는 10만의 보병과 2만의 기병, 32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하였다. 이 전투의 생생한 묘 사가 마카비 1서 6:30 이하에서 발견된다. 마카비 1서의 저자는 이 코끼리들이 포도와 뽕나무의 오디즙으로 만든 피와 같이 보이는 액체 를 보고서 난폭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리시아스와 유다 사이의 첫 전투에서 유다의 맏형인 엘르아살은 자 기가 살해하려고 추적하던 코끼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유다가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 렘으로 도피해야만 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성전의 요새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리시아스의 왕위 경 쟁자가 귀국함으로 인해, 리시아스는 셀류키드 왕국의 통치권에 전력 으로 도전하기 위하여 유다와 긴급한 협정을 체결하게끔 되었다.
리시아스는 유대인에게 그들 자신의 법률에 따라 생활하며 토라 (Torah)에 기록된 규례들을 따라 여호와를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에 서명하였다. 유다는 비록 그와 그의 백성이 정치적으로는 수리아의 통치 아래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완전한 사면을 받았다. 성 전의 요새는 훼파되고 대제사장 메넬라우스(Menelaus)는 면직당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계승자는 야킴(Jakim)이란 자였다. 그는 그의 그리스 이름인 알키무스(Alcimus)로 더 잘 알려졌었다. 알키무스는 비 록 아론의 진정한 후예이긴 하였지만 그의 동족들이 보기에는 수리 아의 앞잡이였다.
3. 하시딤이 유다를 버림
당시에 유다는 종교박해가 유대인에 대하여 기승을 부리는 동안에 마카비 일가를 유일하게 지원하였던 하시딤의 도움과 지원을 상실하 였다. 왜냐하면 종교자유를 획득하자 하시딤은 유다의 어떤 정치적 야망을 지원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군대가 철수하자 유다 의 군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가 친 셀류키드파인 야킴 (알키무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하자 알키무스는 안티오쿠스 4세의 조카이며 셀류키드 4세의 아들인 수리아왕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 게 구원을 호소하였다. 데메트리우스는 그의 휘하 장수의 하나인 바 키데스(Baccides)를 상당규모의 군대와 함께 파송하였다. 유다는 예루 살렘에서 쫓겨났고 알키무스는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 때 그가 비록 하시딤에 의하여 용납되고 신뢰를 받았으나 그는 상당수의 하시딤을 학살하였다.
바키데스 휘하의 유대 사령관인 니카놀(Nicanor)이 유다에 대하여 유사한 계략을 시도하였으나 유다는 니카놀의 가장된 회유책을 간파 하고 유대분지로 도망하였다(역사가들은 이 두 사람이 실제로 화해하 여 친구가 되었는데 알키무스가 그들의 우정을 깨뜨렸다고 믿고 있 다). B.C. 161년 아달월 13일에 드디어 니카놀과 유다는 벳-호른 (Beth-Horon) 근처의 아다사(Adas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격돌하였다. 이 때 니카놀이 살해당했으나 이것은 유다에게 있어서 최후의 승리였 다. 이로부터 두 달 후에 유다는 예루살렘 근처의 엘라사(Elasa)에서 수리아의 대부대에 의하여 사로잡혔고 사살당하였다.
마카비 1서에 의하면 유다는 로마에 사자를 보내어 수리아군을 격 퇴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카비서의 저자는 로마군대를 이렇게 묘 사하고 있다. “그들은 매우 강하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모든 나라에 대하여 호의적이어서 그들에게 화친을 요구하는 나라에는 우애를 확 약하였다. 사람들은 그[유다]에게 고울족(the Gauls)과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던 그들의 무용담과 전쟁담을 들려주 었다”(8:1~3, RSV). 유다는 또한 로마군대가 120마리의 코끼리와 기병과 전차, 수많은 군대로 무장된 안티오쿠스 대제를 격파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실제로 로마인은 안티오쿠스에게 과중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나 그들과 우방국으로서 화친하였다. “그들은 원근 각 처의 열왕을 굴복시켰으며 그들의 명성을 듣는 자마다 그들을 두려워 하였다." 유다의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강대하고 탁월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나 아직까지 왕관을 쓰거나 자주색 옷을 입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32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로마의 국민을 통치하며 이 무리 가운데서 매년 한 사람이 선출되어 원로원을 지도하였다.
유폴레모스(Eupolemos)와 야손은 유다에 의하여 로마인과 협정을 맺기 위한 전권대사로 파견되었다. 그것은 공·수 양면의 동맹을 맺 고자 하는 것이었다. 만일 한편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편이 파병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협정국의 어느 한편의 대적에게는 어떠한 식량 이나 물자도 공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로마로 하여 금 수리아와 근동 아시아의 문제에 간섭할 기회를 갖게 하였다.
유대인의 사자가 귀국하기도 전에 유다는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 을 갖춘 압도적인 병력과 부딪힌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유다 마카비 우스는 이스라엘이 배출한 위대한 군인들 중의 하나로 꼽혀야 한다. 이와 같이 특별한 시기에 유대인은 마카비파와, 하시딤, 헬라파의 세 그룹으로 분할되었다. 유다의 사후 이전에는 강력한 지하운동을 펼쳤 던 헬라파가 출현하여 다시금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친 그리스 파인 알키무스가 대제사장이 되었고 그는 헬라파 인사들을 요직에 임 명하였으며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을 구분하였던 성전의 담을 제 거하였다. 마카비 일가가 당한 사정은 참혹하였다. 즉, 굶주림과 그 들의 대적에 의한 핍박이 닥쳤고 그들 일파는 괴멸의 지경에 이르렀 다. 마카비우스의 생존한 세 형제는 국외로 추방되어 사해 너머의 습 지대로 도망하였다가 그들 중의 하나는 살해되었다. 두 명의 생존자 인 요나단과 시몬은 예루살렘의 남동부에 위치한 사막지대로 도피하 였고, 유다의 자리는 그의 동생인 요나단이 선임되었다.
4. 요나단(B.C.160~142)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수리아군으로부터 하나씩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7년간 예루살렘은 수 리아의 통치와 친 헬라파 유대인의 수중에 있었으며 이 동안 요나단 은 사소한 전투만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B.C. 153년에 일어난 수리아에서의 반란은 예루살렘을 탈환 하려는 요나단의 목표달성에 도움을 주었다. 이 때 수리아의 왕좌를 위하여 경합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왕위를 획득한 데메트 리우스 1세였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아들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 였다. 발라스는 갑바도기아(Cappadocia)와 펠가뭄(Pergamum)의 지원 뿐 아니라 로마와 애굽의 지원도 받았다. 애굽과 로마를 포함한 이웃 나라의 왕들은 수리아의 국내 문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번 기회를 노렸다.
데메트리우스와 발라스는 서로 요나단의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특권을 제의하였다.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이 매우 관대하 였지만 요나단은 그를 신뢰하지 못하고 알렉산더 발라스의 제안을 받 아들였다. 두 경합자의 계속되는 투쟁에서 데메트리우스가 패배하고 살해당하였다. 발라스는 자기를 지원하였던 보답으로 요나단을 대제 사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를 "왕의 친구”로 불렀으며 그에게 자주색 옷 과 금관을 보내었다. 이리하여 요나단은 왕과 제사장을 겸하게 되었 다.
B.C. 153년 장막절에 요나단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제단에서 수행하 였다. 마타디아스 일가가 제사장의 반열이기는 했지만 요나단이 집전 한 제사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시딤은 이 때에도 요나단파 에 계속하여 가담하였으며 이제 요나단은 하나의 직위에 두 가지 직 책, 즉 제사장과 왕의 직책을 혼합시켰다. 하시딤은 종교적 집단으로 종교와 율법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오랜 동안 왕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하였다. 그 는 술을 즐기고 여색에 탐닉하는 비도덕적인 인물이 되었고 백성들이 그를 멀리하였다. 데메트리우스 2세는 자기가 수리아의 왕위를 계승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발라스를 공격하였다. 애굽의 프톨레미 6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결혼하였던 발라스는 그의 장인 으로부터 애굽의 왕위를 탈취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발라스 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하던 중에 살해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데 메트리우스 2세 니카톨(Demetrius II Nicator)은 수리아 제국의 통치자
로 부상하였다.
수리아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나단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 다. 그는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여러개의 성들을 공격하여 굴복 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한 항구로 이용되었던 욥바를 비롯한 여 러개의 성읍을 획득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은 이러한 요나단의 활동을 데메트리우스 2세에게 알렸다. 수리아의 통치자는 요나단에게 사자를 보내어 공격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을 것을 요구 하였다. 이러한 요청을 받자 요나단은 그의 군대를 남겨두고 데메트 리우스에게 나아가 그와 화친할 것과 가능하다면 유대인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고자 하였다. 요나단과 만난 군주는 그에게 설득을 받아 그가 알렉산더 발라스에게서 얻어낸 모든 특권과 데메트리우스 1세가 약속하였던 대부분의 특권들도 확약하였다. 겨우 수년 전에는 도망자 에 불과하였던 요나단은 이제 수리아의 왕좌에 복종하는 대리인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를 추종하거나 그렇기를 원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권 세를 누렸다. 요나단은 외교적 수단을 발휘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강 화시켰고 특별히 예루살렘의 서쪽을 포함하는 괄목할 만한 영토를 획 득하였다. 즉, 팔레스틴의 여러 성읍과 갈멜산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 들을 얻었다. 요나단은 유다 마카비우스가 결코 획득하지 못하였던 정도에 이르는 유대의 실권자가 되었다. 유다가 그의 용맹과 무력, 전략, 결단력으로 정복을 이룬 반면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은 그의 주 무기인 외교술로 정권을 회복하였다. 마타디아스의 다섯 아들 중의 막내인 요나단은 “교활한 자”란 별명을 얻었다.
수리아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요나단은 죽음을 당케 되었다. 안티오 쿠스 6세로 알려진 꼭둑각시가 수리아군의 장군인 트리포(Trypho)에 의하여 수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왕위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 을 갖고 있었다. 트리포는 자기의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요나단이 자기가 왕위를 쟁취하는데 장애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 정을 가장한 채 협상의 테이블에 요나단을 초청하였다. 요나단이 협 상을 위하여 성내로 들어오자 트리포는 요나단의 경호병들을 체포하 여 살해하고 얼마 후에 요나단을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5. 요나단을 계승한 시몬(B.C.142~134)
시몬은 마카비 일가의 지도자였던 마타디아스의 둘째 아들로 마지 막까지 살아있던 아들이었으며,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비 1서 다.
13장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
나와 나의 형제들과 그리고 우리 가문이 율법과 성소를 수호하기 위 해 모든 힘을 다한 사실과 우리가 치른 전쟁과 고통이 어떠하였는가 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읍니다. 나의 형제들은 모두 이스라엘 을 위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 뿐입니다. 나는 지금 어떠 한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 다. 나는 내 형제에 비해 조금도 나은 점이 없읍니다. 나는 내 민족 과 성소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를 위하여 원수를 갚을 것입 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지금 우리를 없애버리려고 증오심에 불타 모 여 있읍니다.
이 연설을 들은 백성들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싸워주십시오. 당 신의 명령이면 무조건 복종하겠읍니다”라고 외쳤다.
시몬이 이룬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유대교의 적대적인 세파, 즉 헬라파와 하시딤, 마카비파의 통합이었다. 시몬이 지도자가 되자 곧 이어 그는 수리아의 합법적인 왕 데메트리우스 2세와 협정을 체결하 였다. 트리포는 데메트리우스 니카톨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이 전투 에서 전사하였다. 데메트리우스 니카톨은 유대인들을 모든 조세에서 면제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허락하여 독립적 동맹국가로 인정하였다. 마타디아스와 그의 네 아들이 그들의 생명을 바쳐서 추구하였던 목적 이 시몬에 의하여 이제 실현되었다. 이 일이 B.C. 142년에 발생 하였으며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립일을 이 때부터 계산한다. 성대한 감사의 축제가 열렸고 마카비 1서 13:43~52에 따르면 상당히 오랫 동안 이 축제가 매년 며칠씩 거행되었다.
유대인들은 시몬에게 절대군주의 지위를 제공하고 국가 통치자의 직위를 그의 가문에서 세습하도록 하였다. 시몬은 또한 로마인들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지시와 함께 유대왕국의 정치적 독립을 알리기 위 하여 로마에 사자를 파견하였다.
시몬은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한 후에 황폐 하고 전쟁으로 상한 그의 영토를 회복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성전을 경비하기 위하여 시몬은 세블라 언덕(Shephelah Hills)에 있는 요새의 적군들을 내쫓았고 이로 인하여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국도를 장악하였다. B.C. 141년 5월에 아크라 요새의 파견대를 굴복시키고 시몬은 대단한 환호 속에 묻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는 기회가 주어질 적마다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석방하여 그들을 이전에 살던 땅으로 귀환시켰다. 마카비 1서 14:4~15은 시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대 땅에는 하루도 평온하지 않은 날이 없었 다. 그가 마음 쓴 것은 자기 민족의 행복 뿐이었고 날마다 백성들은 그의 권위와 영광을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그는 욥바를 취하여 자기 항구로 만들었고 여러 섬에 이르는 해로를 터놓아 그 영광이 더욱 더 빛났다. 그는 나라의 영토를 넓혔고 온 나라를 안전하게 다스렸 다. 많은 포로들을 붙잡아왔고 가자라(Gazara)와 벧수라(Bethsura) 를 지배하였고 그곳에서 불결한 모든 것을 치워버렸다. 아무도 그에 대하여 대항하는 자는 없었다. 백성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 땅은 많은 곡식을 내었으며 평지의 나무들도 많은 열매를 맺었다. 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태평세월을 구가하 였고, 젊은이들은 화려한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시몬은 여러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방위를 튼튼히 했다. 그는 이 나 라에 평화를 가져왔고 이스라엘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으며 그들의 마음을 괴롭힐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원수들이 그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 시대의 모든 왕들도 멸망되었다. 시몬은 백성들 가운데 보잘 것 없 는 자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었고 스스로는 율법을 엄수하면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 그는 로마와 협정을 맺어 모든 적국들에 대한 유대인의 안전과 특 권을 확보하였다. 즉, 로마 원로원은 갑바도기아와 펠가뭄 (Pergamum), 수리아, 애굽의 왕들에게 공한을 보내어서 동맹국에 대 하여 언급하며 유대인에 대한 전쟁 행위를 경고하였다. 시몬은 자국 의 주화를 발행하였다. 어떤 통치자가 자신의 주화를 발행할 수 있다. 는 것은 언제나 절대군주의 상징이 되었었다. 주화들은 B.C. 141~ 136년 경부터 사용되었다. 주화의 표면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이면에는 한 세겔 또는 반 세겔의 액면이 부각되었다.
시몬은 훌륭하고 지혜롭게 통치하였다. 그의 사적에서 유일한 오점 은 유대인 배교자에 대한 처우였는데 시몬은 그들을 추방시켰다. 술 사들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이교도들은 추방되었다. 시몬의 성공적인 위업들은 국가주의의 불을 당겼고 그 불꽃을 환하게 태웠다. 이러한 번영과 혁신의 시대에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희미하게 일어났다. 시몬의 통치는 새 시대의 시 작이었다. 즉, “위대한 대제사장이며 장군이자 유대인의 영도자인 시 몬의 첫 해라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문서와 계약서에 쓰기 시 작하였다."
6. 시몬의 죽음
시몬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영웅적인 노력과 계획의 열 매들을 즐길 만큼 오랫 동안 살지를 못하였다. 그의 형들과 마찬가지 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당하였다. B.C. 135년 시몬이 여리고 평원의 독(Dok)이란 요새를 시찰하면서 그를 환영하는 만찬에 참석하였다가 그와 그의 두 아들이 왕위 계승을 노리던 그의 사위 프톨레미 (Ptolemy)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리고 시몬의 부인은 한동안 인질로 잡혀 있다가 얼마 후에 잔인하게 살해 당하였다.
이렇게 고귀한 마타디아스의 막내 아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모든 아 들들은 유대인의 유익을 위해서 싸우고 일하다가 포학한 죽음을 당한 셈이 되었다. 유다와 엘르아살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고, 다른 세 아들들은 반역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모두들 유다가 세운 모데인 (Modein)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무덤에 묻혔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을 경주하였던 30년의 기간은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이 30년 동안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졌 다. 그 결과 적국들에 의하여 공략을 당하고 완전한 존폐의 위협을 받던 조그만 도시 국가 예루살렘이 통일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성 전은 모든 이교도의 행위로부터 정결해졌다. 유대인은 다시금 한명의 대제사장과 한명의 세습군주를 갖게 되었고 종교적 자유와 거의 완전 한 정치적 독립을 구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