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7장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w.j.lee 2023. 5. 9. 13:17

제7장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비록 프톨레미가 시몬의 후예들을 멸절시키고자 계획하였지만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는 도피하였다. 

프톨레미의 살해 음모에 대한 경고를 받으면서도 요한 힐카누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의 아버지가 담당하였던 대제사장의 직임을 받았다.

그는 왕의 칭호를 갖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시몬조차도 왕이란 칭호 사용을 허락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스모니안 일가의 한 사람이 왕이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였는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시몬의 죽음은 유대인에게 환란을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수리아인들이 시몬의 살해 소식을 듣자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위하여 진군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예루살렘이 포위공격을 받은 후에 힐카누스는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7세 시데테스(Antiochus I Sidetes)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 내용은 수리아의 이스라엘 정복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자유를 상실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수리아의 왕위쟁탈전이 힐카누스로 하여금 독립을 되찾게 하였고 그의 나라를 통치 할 충분한 시간을 그에게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북쪽 나라의 간섭이 없이 힐카누스는 계속적인 군사적 원정을 통하여 그의 영토를 확장 해갈 수 있었다.

그의 왕국은 B.C. 10세기에 솔로몬이 통치하였던 것과 실제적으로 동일한 영토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힐카누스의 주요한 군사적 원정은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방이었다.

그는 그리심산의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훼파하고 사마리아인들을 굴복시켰다.

힐카누스는 이두매인들에게 유대교를 신봉하도록 강요하였고 할례를 받게 하였다.

헤롯 대왕은 이두매인이었으며 비록 그가 유대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 되었다.

 

힐카누스는 하시딤이 마타디아스에서 시몬에 이르는 마카비 일가의 지원자로서 수행한 그들의 중요한 역할을 잘 깨닫지 못하고서 그들을 푸대접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국가의 정치적 발전에 관여하는 것보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하시딤에 대한 힐카누스의 적대적 태도는 국내적인 긴장을 초래하였다.

이 때부터 세 종파, 즉 하시딤에서 유래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에세네파의 존재가 시작된다.

힐카누스는 그가 발행한 주화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다.

요세푸스(Jewish Antig. II, X, 7)는 힐카 누스가 "31년간 최선의 방법으로 왕국을 통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통치는 번영의 것이었으며 오히려 탁월한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었다.

그는 B.C. 106년에 죽었다.

 

1.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4~103)
아리스토불루스 1세 (Aristobulus I)는 비록 얼마 뒤에 자기의 아내인 살로메 (Salome)를 왕위 계승자로 임명하고 자신은 대제사장이 되긴 하지만 그의 아버지 힐카누스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왕좌에 앉자 그의 어머니를 투옥하고 굶어 죽게 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형제인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살해하였고

다른 형제인 알렉산더 얀내 우스(Alexander Jannaeus)를 구금하였다.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안티고누스(Antigonus)를 남겨두고 통치권을 나누어주었다.

아리스토블루스 1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무자비하고 잔인하였으며 대단한 야망가였다.

그가 총애하였던 형제인 안티고누스는 왕을 증오하는 사람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 한 음모에 가담한 셈이 되었다.

 

자기의 형제의 죽음을 멀리하려는 고뇌 속에서 아리스토불루스는 죽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친헬라적이었고 그리스 문화를 장려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마카비 일가가 투쟁했던 이상들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던 왕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와 스키토폴리스(Scithopolis) 너머의 북부로 국경을 확장하고 “이방인의 갈릴리”에 사는 이투리아인들(Itureans)을 정복함으로써 통치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터너(Turner)는 힐카누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다 정치적 성향을 지닌 귀족적인 당파 [사두개파]에로 향한 힐카누스의 전향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미래 발전을 지향하는 데에 대단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졌다. "

요한 힐카누스는 유대인들 에게 "헬라적 사업을 계발시키라”는 별다른 지시를 내림으로써 왕가의 이전 통치자들이 추구하였던 이상에서 멀리 떠났다.

 

2.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3~76)
아리스토블루스는 자기의 계승자로 알렉산드라(Alexandra, 그의 부인)를 지명하였었다.

그가 죽자 그녀는 그녀의 시동생이 되는 알렉산더 얀내우스를 해금하고 그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그와 결혼하였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얀내우스도 야심가였다.

그는 자신이 헬라파가 되어 바리새파 대신에 사두개파를 지지하였다.

그는 마카비 형제들이 세운 표준들에서 대단히 멀어진 통치를 하여 동양적 전제군주가 되었다.

알렉산더 얀내우스는 유대의 국경을 갈릴리와 블레셋, 중부 요단에까지 확장시켰다.

알렉산더 얀내우스에 이르러서 하스모니안 왕조는 영토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터너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 다.

“그렇게 많은 수의 개명된 그리스 성읍들의 병합은 코엘레-수리아의 문명에 비도덕화의 영향을 끼쳤으며 번영이 평야지대와 도시들에 편중되었고 이전에 그가 거의 통치하지 않았던 곳곳마다 전쟁의 흔적이 눈에 역력하였다."

 

그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 기간에 있었던 하시딤,

즉 “경건 한 무리"에서 기원한 바리새파와 수차례의 충돌을 빚었다.

하시딤은 수리아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에서 마카비 일가를 도왔었다.

그러나 다른 시기에, 특히 유다 마카비우스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 후에는 하시딤은 중립을 지켰다.

당시 바리새파가 알렉산더 얀내우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6천명을 살해하는 광폭한 방법으로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스라엘 내의 반대자들이 또 한번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자기의 추종자들과 첩들을 위해 베푼 향연 도중에 주모자들 가운데서 8백명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반란군들이 보는 앞에서 이 잔인한 왕은 자기의 첩들과 그들의 소생들을 학살하였다.

그가 다스리는 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얀내우스는 49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인 알렉산드라가 그의 지위에서 통치를 하게 하였다.

 

3. 알렉산드라(B.C.76~67)
알렉산더 얀내우스는 죽기 전에 자기 부인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하였었다. 

알렉산드라는 정당하게 유대인을 통치하는 자리를 맡은 최초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충고에 유념하여 바리새파와 우호적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들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그녀는 유능한 여인이었으며 남편의 치세와는 정반대로 평화와 번영을 촉진 시킨 통치자였다.

알렉산드라는 시몬의 통치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녀는 시몬 벤 샤타흐 (Simon ben Shatach)라는 조언자로부터 대단한 도움을 받았으며,

그는 애굽 출신의 유대교 학자인 타배(Tabbai)의 조력을 받았다.

 

시몬 벤 샤타흐는 이스라엘에서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1. 추방된 바리새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며 투옥 중인자들을 석방 하고 국내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요직에 임명하였다.

2. 무관심하였던 유대교의 예식들을 회복하였다.

3. 모든 이스라엘은 성전유지를 위한 인두세 (polltax)를 부담해야 했으며 이방인 개종자와 자유민들에게 조세부담이 부과되었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부유한 사두개인들로부터 유지권을 인수받아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4. 모든 유대인 자녀들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알렉산드라의 통치 동안 산헤드린 공회(the Sanhedrin)의 권세와 특 권이 증가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이후로부터 결코 포기한 일이 없는 하나의 우위를 이 때 획득하였다. 

알렉산드라는 9년간 대단히 성공적 으로 통치하면서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4. 아리스토불루스 2세(B.C.67-63)
알렉산드라의 통치 기간에는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가 그 녀의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 오랜 동안 통치하지 못 하였다. 

그는 성격상 어떠한 반대자에 대한 저항에 맞설 만한 위인이 못되는 나태하고 병약한 인물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왕위를 탈취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사두개파의 도움을 받아서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여리고 근처에서의 전투에서 힐카누스 2세는 참패하여 왕이자 대제사장이란 그의 직위를 포기하도록 강요되었다.

 

만일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 (Antipater)라 하는 이두매의 왕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줄다리기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안티파터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자신을 그의 직위에서 쫓아낼까봐 두려워서 힐카누스 2세에게 그의 협정을 파기하고 재차 왕위 탈환을 시도해 볼 것을 대단히 강하게 설득하였다.

 

나바티안의 왕(Nabatean King) 아레타스 2세(Aretas II)의 도움을 받아서 안티파터와 힐카누스 2세는 아 리스토블루스 2세를 제압하고 예루살렘의 감옥에 감금하였다.

그 후 에 한번의 내란이 알렉산드라의 두 아들 사이에서 발생하였으며 이것 은 B.C.6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두 형제는 로마에게 호소하였으며 이 것을 계기로 하여 팔레스틴에서의 로마의 정치가 개시되었고 이 때부터 로마는 유대 땅에서 신약시대 기간에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폼페이 (Pompey)는 지중해의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소아시아 북부의 작은 왕국의 가장 강력한 군주인 미타라다테스(Mitharadates)를 제압하였었다.

미타라다테스를 패배시킴으로 로마는 이제 수리아와 팔레스틴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힐카누스 2세가 제시한 원조요청은 로마인들에게 그들이 찾고 있던 기회, 즉 팔레스틴의 문제에 간섭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중재를 위하여 팔레스틴에 가는 것을 기뻐하였고 영구히 그곳에서 체류하였다.

그러나 시몬이 로마와 협정을 체결하였던 세기의 초와 비교하여 볼 때 로마의 정책은 변화하였다.

이제 로마는 정복과 무력을 드러내놓고 행사 하였다.

 

폼페이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의 요청을 받자 그의 장군인 스카우루스(Scaurus)를 남부로 파송하여 상황을 판단케 하였다.

양편에서 장군에게 뇌물을 선사하였으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더 많은 액수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스카우루스는 그를 지지하였다.

스카우루스는 아라비아의 아레타스에게 유대로부터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고 그 결과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B.C.67-63년의 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그치게 되었다.

 

B.C. 63년 폼페이는 양측을 자기에게 출두하도록 소환하여 이 분쟁을 결판내고자 하였다.

폼페이는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항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움(Alexan drium)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폼페이와 계속하여 협상하고자 노력하였다.

폼페이의 의사는 확고부동하였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이 요새로부터 쫓겨났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도피하여 얼마 후에 폼페이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또 다시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상당액수의 돈과 도시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협상을 하고자 하였다.

폼페이가 보낸 바비누스(Babinus) 장군이 그 성에 도착하자,

그는 성문이 닫힌 것을 발견하고 석달간이나 계속되는 포위공격에 들어갔다.

이 때 전쟁은 예루살렘의 안과 밖에서 수행되었다.

즉, 힐카누스 2세의 추종자들은 항복하고자 하였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지지자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12,000명의 유대인이 전사하였다.

예루살렘은 불태워졌고 폼페이는 성전의 지성소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훼파하지 않았고 그가 발견한 창고의 막대한 금을 탈취하는 것을 단념하였다.

 

힐카누스 2세는 다시금 대제사장과 통수권자가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휘하에서 반란을 지휘하였던 자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이 때 이후로 유대 민족은 유대 지방에서 살도록 제한되었다.

시몬과 그 의 몇몇 후계자들이 정복하여 마카비와 하스모니안의 왕국에 귀속시 켰던 그 외의 모든 영토들은 유대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제는 독립 하게 되었다.

요한 힐카누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사마리아성이 회복 되어 재건되었고 세바스테 (Sebaste)란 지명을 받았다.

안티파터는 유대의 총독이 되었고, B.C. 43년 그가 암살당할 때까지 통치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폼페이의 승리의 대열에 끼어 로마까지 송환되었다.

이로써 이전에는 여러 차례 로마의 우호와 보호를 얻으려고 협상하였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그들이 결코 독립국가로 전환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만든 로마의 정복의 손길이

저항 할 수 없는 압박감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