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8장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B.C. 63~A.D. 135)

w.j.lee 2023. 5. 9. 13:08

제8장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B.C. 63~A.D. 135)

 

유대의 역사에 있어서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며 유대인의 생활의 붕괴를 가져오는 바르-코흐바(Bar-Cochba)의 반란이 하드리안(Hadrian-로마황제)에 의하여 진압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A.D. 135년에 하드리안은 예루살렘에 로마식 도시인 Aelia Capitolina 를 세움-역자주)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A.D. 70 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유대인 들이 로마 통치자가 제시한 법률에 굴복하여 순종할 때 그들은 정상이 참작된 대우를 받았다.

유대교는 로마제국 안에서 인정된 종교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액수가 작아서 짐이 되지 않을 만 큼의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되었는데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법과 입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졌으며 국내적인 사소한 사건들을 해결하도록 허용되었다.

페르샤의 지배가 로마의 통치보다 더 나은 대우를 유대인들에게 하였기 때문은 아니지만

열심당(the Zealots)이란 극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불안상태에 몰아넣고

수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켜서 유대인들이 동참하기를 선동하였다

 

B.C. 63년에서부터 43년까지, 특히 B.C. 53년부터 43년까지 사이에 근동 세계에 있어서는 힘든 나날이었다. 

씨저(Caesar)와 폼페이는 B.C. 49년에 반목하기 시작하여 폼페이가 테살리의 파르살루스(Phar salus in Thessaly)에서 패배할 때까지 (B.C. 48년) 두 사람 사이에는 내전이 있었다.

폼페이는 애굽에서 얼마 후에 살해되었다. 로마의 패권을 위한 두 사람 사이의 투쟁 속에서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아들들은 씨저의 편을 들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씨저가 제공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유대로 돌아가던 중에 독살되었다.

B.C. 44년에 씨저가 살해된 뒤에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의 연합세력 과 마크 안토니(Mark Anthony)와 옥타비안(Octovian)의 세력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로마 치하의 유대교 역사는 다섯 부분, 즉 (1) 이두매 왕조, (2) 첫 지방 총독 (Proculator), (3) 아그립바 1세의 통치, (4) 두번째 지방 총독, (5)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두매 왕조 (B. C. 63~A. D. 6)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하였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동맹국인 버가모 (Pergamus)의 미트라다테스가 시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지혜롭게 씨저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씨저는 힐카누스 2세가 민족의 통치자적 대제사장이란 그의 간판격인 직임을 보류시키는 반면에 안티파터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수하고 유대의 총독에 임명하였다.

 

당시에 유대인은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 로마에서 많은 특권을 누렸으며 그들 가운데서 종교적 자유를 향유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안티파터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한 뒤에 그의 아들인 파사엘 (Phasael)과 헤롯에게 고위직을 맡기는데 먼저 파사엘은 유대의 군대 사령관에,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으로 삼았다.
안티파터는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동시에 유대의 국내적이며 정치 적인 이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매인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였다.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과 에돔 사람 사이에는 뿌리깊은 반감이 있어 왔다. 

갈릴리의 통치자인 헤롯이 갈릴리에 횡행하는 일단의 도둑들을 분쇄하고 그 두목이 되는 히스기야를 처형하자 산헤드린은 그가 스스로 권력을 남용하여 중앙에서 행할 처형을 행사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출두를 명령하였다.

헤롯은 산헤드린에 출두하는 대신에 한때 헤롯을 코엘레 - 수리아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던 수리아인 총독 섹스투스 씨저(Sextus Caesar)에게 탄원하였다.

 

씨저의 암살 이후에 카시우스는 수리아에 가서 자기가 수리아의 총독이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모으고 돈을 마련하였다.

안티파터와 그의 두 아들은 카시우스를 위한 조공을 거두어들임으로써 그의 호의를 사는데 성공하였다.

대신 카시우스는 헤롯을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심지어 유대의 왕위까지도 약속하였다.

안티파터는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야망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B.C. 43년에 말리쿠스라는 열광적인 유대인에 의하여 독살되었고 이로써 그의 생은 종말을 고하였다.

헤롯은 즉시 그의 대권을 행사하여 말리쿠스를 살해하였다.

안티파터가 죽은 후에 유대는 파사엘의 손에 넘겨졌고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의 정치발전으로 인하여 안티파터의 두 아들 앞에는 험난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레스틴에서 만사가 혼란한 상태였다.

B.C. 42년의 빌립보 전투 (the Battle of Philippi)는 옥타비안(아우구스투스)과 안토니에 의하여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참패를 초래하였다.

안토니가 아시아를 통치하려고 오자 곧 헤롯은 그에게 접근하여 뇌물로써 그의 환심을 샀다.

그 결과 안토니는 헤롯과 파사엘을 유대의 협동 분봉왕으로 임명하고 힐카누스 2세는 계속하여 대제사장으로만 봉직하게 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파르디아인(Parthian, 북부 이란에 살던 민족)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은 즉시 출병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파사엘은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헤롯은 대적들의 눈을 피하여 로마로 도망하여 안토니에게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삼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안토니는 하스모니안 왕조를 신뢰하지 않았고 로마 원로원의 재가를 얻어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삼았다.

이 일은 B.C.4년에 있었으며 이로부터 3년 후 그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수 있었으며 로마에 의하여 그에게 할당된 영토를 차지하였다.

 

2. 헤롯 대왕


역사기록들은 헤롯이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신조는 자기 아버지 (안티파터)에게 물려받은 그 대로,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간에 로마에 충성하였다.

안토니의 권세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절정에 달하는 동안 헤롯은 그 에게 충성하였으나,

B.C. 31년에 있었던 악티움 해전(the Battle of Actium) 이후 헤롯은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옥타비 안)에게 충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을 동맹국의 왕(rex socius)에 임명하였으며 실제로 팔레스틴 전역을 그의 왕국으로 편입시켜주었다.

 

헤롯은 그의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철저한 계획을 수행하였다. 

안티고누스와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제거되었고 어린 아리스토 불루스는 헤롯의 심복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익사하였다.

노령의 힐 카누스는 살해되었고, 헤롯의 아름다운 부인이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마리암네(Mariamne)는 헤롯의 여동생인 살로메 (Salome)에게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Graeco-Roman culture)의 대단한 숭배자였다.

그는 피로 점철된 그의 첫번 계획을 수행한 뒤에 자기 왕국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불필요한 전쟁을 회피함으로써 회피는 그의 왕국이 발전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고 유효한 행정으로 도움을 주었다.

많은 새로운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다른 건물 들은 개축되었다.

헤롯은 그의 건축학적인 계획에서 진정한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하여 퇴락하였기 때문에 성전재건에 착수하였다.

사마 리아와 가이사랴에 있는 성읍들은 완전히 재건되었고 웅장한 건물들로 칭송받았다.

 

 

11년간 헤롯은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그의 치세 중 마지막 10년 (B.C. 14~4)은 또 다시 정권을 위한 가족 내의 암투가 벌어졌다.

그는 통치 기간의 종말을 향하면서 잔학하고 살인광적인 늙은이가 되었다.

그의 통치 중에 그가 자신의 왕위와 이익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을 축출하는데 주저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많은 부인과 자녀를 거느렸다.

 

시기와 적대감이 그의 가족 안에서 표출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네는 마카비 왕가의 공주였으며 헤롯이 가장 사랑하였던 부인이었었다.

헤롯은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녀의 아들들도 총애하였다.

그러 나 그의 장모인 키프로스(Kypros)와 그의 여동생이며 이두매인을 대표 하는 살로메가 하스모니안 왕조를 대변하는 알렉산드라와 마리암네를 미워하여 흉계를 꾸몄다.

이러한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헤롯이 가담 되어 마리암네를 사형시켰다.

 

얼마 후에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 헤롯은 또다른 피바람을 일으켰고 로마의 황제에게 이런 말이 전해졌다.

"헤롯의 자녀가 되기 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세명이 처형되었다.

헤롯이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게 되자 그는 자주 잔인함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헤롯 통치의 말년에 있었던 잔인한 행동 중에 하나는 아마 B.C. 6년, 혹은 5년으로 추정되 는 베들레헴에서의 무죄한 유아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은 지칠줄 모르는 증오심으로 헤롯을 지겨워했다.

헤롯은 그의 임종시 애도를 확실히 하고자 국가의 고관들을 경기장 안에 감금시켜놓고 그가 죽는 순간에 그의 군대에 의하여 처형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다행스 럽게도 이 명령은 취소되었다.

헤롯은 34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B.C. 4년에 죽었다.

 

헤롯의 뜻에 따라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즉, 아르 켈라우스는 유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포함한)의 왕으로, 

헤롯 안티 파스(Herod Antipas)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 

헤롯 빌립은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의 분봉왕으로 내정되었다. 

이러한 헤롯의 조치는, 특별히 왕위에 있어서는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는 어느 왕도 그 왕위를 세습시키는 것을 불허하였기 때문이다.

세 형제는 모두 인준을 받으려고 로마에 갔는데 아르켈라우스와 안티파스는 왕국을 구하였고, 아르켈라우스는 빌립의 지지를 받았다.

 

유대인의 한 사자가 로마에 가서 헤롯의 모든 아들로부터 벗어날 것을 청하면서 대신에 유대를 로마의 직접통치에 둘 것을 구하였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 에  ...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눅 19 : 12-14).

 

3. 아르켈라우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확정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통치자로서 호평을 받지 못하여서 그가 통치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더 그를 싫어하였다.

심지어 아르켈라우스는 자기 일로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였으며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그의 전 통치기간은 혼란과 피바람으로 특징지워졌다.

아르켈라우스는 헤롯의 죽음이 남기고 간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이혼 한 여인과 한 그의 결혼은 그로부터 유대인의 충성심을 갈라놓았으며

헤로디아 일가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고조시켰다.

두번에 걸쳐서 그는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신이 직접 야만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의 치리 가운데서 한 가지 칭송받을 만한 모습은 그의 건축계획이었다.

10년간에 걸친 분봉왕으로서의 통치 기간에 쌓인 그와 유대인 사이의 알력이 폭발하여 그는 로마인에 의하여 고울(Gaul)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유대는 이어서 코포니우스 (Coponius) 출신의 총독을 맞아들였다(A.D. 6~9).

 

4. 헤롯 안티파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는 

그의 형 아르켈라우스에 비하여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참을 만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대규모의 건축을 실시하였고 그의 국방을 견고케 하였다.

그는 신약에서 특별히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서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디아스(Herodias)와 그의 불법적인 결혼은 그의 간음죄를 지적하였기 때문에 투옥시킨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한 것이다.

이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성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을 보낸 헤롯과 동일인이었다(눅 23:7~12).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스(Herodias)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Caliqula)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청원 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였다.

 

5. 빌립

 

헤롯의 세째 아들인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의 아들 가운데서 그는 단연코 최상의 통치자였다.

빌립은 신약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증오심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때 주님은 빌립이 다스리는 지경으로 피신하였다고 적고 있다.

쉬러 (Schurer)의 견해를 따르면 빌립의 통치는 "온건하고 공정하며 평화로왔다.”

 

6. 로마의 총독들

 

처음 세명의 로마인 총독들은 이 나라를 지혜롭게 통치한 듯이 보인다.

유대인이 로마의 통치를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수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A.D. 6~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대를 통치한 총독 들 가운데 첫 사람을 맞아들였다.

유대 지방(혹은 주)은 요단 지역의 동부와 에스다엘론(Esdaelon)의 남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말하며, 

이 지방은 차례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11개의 지구(toparchy)로 분할되었다.

하나의 지구는 하나의 대도시와 수개의 부락을 포함하는 인근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유대력에 의한 중요한 절기 때는 예루살렘에 머물곤 하였을지라도 그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총독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다. 

그의 직무는 “로마정 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 그 속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보다 중요 한 사건의 재판"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주가 아니라 제국의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마 22:17).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징수에 종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한 개인이 어떤 군(district)에 매년 할당된 액수의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청구하며, 그는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서 만일 배당액을 초과하게 되면 자기가 가져도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당이득(토색)의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따라서 세리(라틴어는 publicani)는 외세에 봉사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들은 다양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즉, 도시에서 도시로 전입 되는 상품의 수출입세, 주에서 주로 가는 선편에 대한 세금, 세금에 부과한 세금, 또한 다리의 통과세, 입항할 때의 세금 등이었다.

 

사법기능 또한 총독이 관장하였으며 사소한 사건들은 보다 저급한 유대인의 법정이 다루도록 위임된 반면에 중요한 범죄들은 그가 판결 하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을 선고할 권세가 없었으며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러한 사건은 총독에게 회부된다. 

일상적인 민사  소송이나 형사사건은 지방의 공회에 위임되었다.

 

총독은 또한 군사적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팔레스틴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들을 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전선이었던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의 파견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하여 팔레스틴에 파견되었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자 즉시 수리아인 총독은 한 가지 세금을 징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것은 유대인에 의한 반란을 조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총독들은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유대를 통치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10년간 총독의 직임을 수행하였지만

결 국 A.D. 36년에는 유대인에 대하여 대단히 잔인하다는 이유로 씨저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7. 헤롯 아그립바 1세 (A. D. 41~44)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에 왕위를 박탈당하고 고울로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I)가 왕이 되었는 데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에서 대단한 사치와 방종 속에서 성장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가자 그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남부 팔레스틴의 구석진 곳에 피신하였다.

빈곤과 파산에 직면한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신실한 아내가 그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팔레스틴에서의 수차에 걸친 절망적인 경험 끝에 그는 로마로 가서 그의 채권자들에게서 몸을 숨기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양자인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의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만사가 헤롯 아그립바 1세를 위하여 잘되어 갔지만 어느날 가이우스와 함께 마차를 탄 자리에서 만일 황제가 죽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 마디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헤롯 아그립바 1세를 투옥하였다.

A.D. 37년 티베리우스가 죽자 칼리굴라가 계승자가 되고 헤롯 아그립바는 칼리굴라에 의하여 석방되고 그의 총애를 입어 A.D. 39년에 왕으로 임명된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빌립의 분봉국(tetrarchy)을 떼어받았으며 얼마 후에 유대와 이두매, 사마리아도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어서도 수 년간을 기다렸다가 그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팔레스틴으로 돌아왔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4 년간 괄목할 만큼 성공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사실은 그가 요한을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일에서 분명히 증명된다(행 12장).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요령이 있어 빈틈이 없는 통치자였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발을 살만한 일은 피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칼리굴라가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 이것을 저지함으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예루살렘을 흥미있어 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사실상 그는 헬 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다.

그는 심각한 질병을 얻어 A.D. 44년에 지겹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8. 헤롯 아그립바 2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17살난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계승 하지 못하고 후에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Cholchis) 지역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빌립의 이전 분봉국을 얻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네로에 의하여 길릴리의 여러 곳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리게 되어 영토가 확장되 었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예루살렘에 저택을 갖고 있었지만 왕국 의 수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였다. 

 

유대인들은 그가 명목상의 유대교인 임을 알고는 그를 싫어하였다. 

유대인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의 통치는 하찮은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24:13~26:32에서 그가 바울의 재판에 참석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에 끔찍스런 유대전쟁 (A.D. 66~70)이 발발하였다.

그는 A.D. 100년 경에 죽었다.

 

9.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은 7명의 총독, 즉 파두스(Fadus), 알렉산더(Alexander), 쿠마누스(Cumanus), 벨릭스(Felix), 베스도 (Festus), 알비누스(Albinus), 플로루스(Florus)가 다스렸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클라우디우스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 다.

이들 7명의 총독들이 다스리는 기간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 들이었다.

파두스(A.D. 44~48)는 자기가 통치하려고 팔레스틴에 도착 해보니 불안한 상태인 것을 깨달았다.

 

유대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광적이 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파두스는 유대에서 강도들의 만연을 해소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제복을 빼앗아 안토니오 탑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변인을 보내 어 그 제복의 관리권을 갖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다.

 

처음 두 총독, 즉 파두스와 알렉산더의 행정은 비록 이따금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온건하고 평화스러웠다.

쿠마누스(A.D. 48~52)의 통치는 심각한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유월절에 한 로마 군병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에 발발한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징계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쿠마누스의 추방을 초래하였다. 

세번에 걸쳐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 책임이 쿠마누스에게 있었다.

 

벨릭스(A.D. 52~60)는 유대인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의 전임자들 보다 더욱 거칠었다. 

시카리(Sicarii), 즉 “단검을 찬 자”로 알려진 일 단의 무리들이

사람을 죽이는 흉포함 때문에 그들로 인한 공포가 나 라 안에 퍼졌다.

이 시카리 단원들은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메시야의 출현이 가끔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1:38에 언급되고 있 다.

사도행전 24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스도의 통치 기간은 상황이 괄목할 만하게 호전되 었으나 그는 유대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환되었다.

A.D. 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며 피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10. 유대인의 반란 (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지지하지 않는 많은 유대인들이 열심당에 의하 여 살해되었다.

로마에 대한 혁명은 플로루스의 통치 때 (A.D. 66년)에 발발하였다. 

플로루스가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얼마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였고 로마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시도를 낳게 하였 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의 격분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 하였다. 

수리아의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가 유대인 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쓸데 없는 시도를 하였지만 패배하고 극히 소 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도피하였다.

 

이러한 승리는 로마의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시도하는 유대의 혁명 주의자들을 대단히 고무시켰다. 

그리고 비록 동족들의 행동이 무익한 것을 알고 있던 평화주의자들도 굴복하고 말았다. 

요세푸스는 갈릴리 지방을 책임맡았으나 유대인의 반란이 실패하리란 것을 확신하였다.

팔레스틴의 여러 지방에 군사적 지도자들이 전쟁터를 준비하고자 분담받았다.

 

그러자 로마제국은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들 의 뛰어난 장군인 베스파시안(Vespasian)을 파견하였다. 

일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요새들이 함락되었고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네로가 죽었고 베스파시안은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에 즉위하여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자 기들의 전력을 보강할 절호의 기회에 유대인들은 내란을 겪었다. 

베 스파시안의 아들인 티투스(Titus)는 자기 아버지의 직위에 임명되고 4 개 군단을 지휘하여 예루살렘의 탈환을 위하여 다시 출정하였다. 

5개 월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과 도시는 훼파되었으며 수 십만 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성전 제사는 멈추어졌고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계급인 제사장직이 따라서 소멸되었다.

또 다른 영향력있는 기관이었던 산헤드린도 역사 속으로 숨어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에 유대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다수의 지도적 랍비들이 피신하였던 얌니아(Jamnia)가 되었다.

 

이후에도 유대의 독립을 위한 두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A.D. 115~117년에 구레네(Cyrene), 애굽, 구브로(Cyprus), 메소포타미 아(Mesopotamia)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 났으나 트라얀 황제는 상당한 살륙을 감행하여 이것을 진압하였다. 

다른 하나는 A.D. 132-135년에 바르 코흐바(Bar Kochba), 또는 바르 코지 바(Bar Koziba)가 유대인에게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로마의 통치를 벗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이 반란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실제로 팔레스틴에 있는 분산된 유대인의 남은 자들을 궤멸 하였고

로마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혹독한 제한조치를 취하였다.

이 때부터. 팔레스틴에는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주권국가가 선포되기 전까지는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