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5장 셀류키드 왕조 하의 유대인

w.j.lee 2023. 5. 9. 13:18

제5장 셀류키드 왕조 하의 유대인

 

수리아를 통치한 셀류키드 왕조의 역대왕들은 다음과 같다.

 

셀류쿠스 1세      (Nicator)         B.C.312-280
안티오쿠스 1세  (Soter)             B.C.280-261

안티오쿠스 2세  (Theos)            B.C.261-246

셀류쿠스 2세      (Callinicus)     B.C.246-226
셀류쿠스 3세       (Keroneos)    B.C.226-223
안티오쿠스 3세                              B.C. 222-187
셀류쿠스 4세       (Philopater)  B.C.187~175
안티오쿠스 4세   (Epiphanes)  B.C.175~163
안티오쿠스 5세   (Eupator)       B.C.163~162
데메트리우스 1세                          B.C.162~150

데메트리우스 2세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권좌를 위한 투쟁

알렉산더 발라스                            B.C.150~145

데메트리우스 2세                          B.C.145~139
안티오쿠스 7세                              B.C.139~134

 

1. 셀류쿠스 1세 니카터(B.C.312~280)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Seleucus Nicator)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하여 헬레스폰트(Hellespont)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Indus)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B.C.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B.C. 316년에 프리기아(Phrygia)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Antigonus)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B.C. 301년의 입수스(Ipsus) 전투 후에 셀류쿠스 1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 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는 지중해에서 16마일 떨어진 오론테스(Orontes) 강가에 그 유명한 안디옥 성을 건설하였으며, 그곳을 자기가 다스리는 왕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로마인이 수리아를 제압하였을 때 안디옥은 로마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이 성읍은 로마 제국 가운데서 헬라 문화의 커다란 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기서 동양과 서양이 만났으며 각자의 문화가 융합되었다.

 

셀류키드 왕조는 알렉산더의 경우를 모방하여 그들에게 투항한 지역들을 헬라화하고 싶어하는 방법에 따라 40개 가량이 되는 성읍들을 건설하였다.

이 밖의 다른 중요한 헬라 문화의 중심지는 피시디아의 안디옥(Antioch of Pisidia)과 티그리스 강가의 셀류키아(Seleucia on the Tigris)였으며, 또한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아파메아, 라오디게아, 에데사, 베뢰아가 세워졌다.

이들 거대한 도시들에서의 생활은 어느 곳에서나 살인과 피로 물들인, 음모와 암살과 짝지워진 동방의 사치와 악덕으로 특징지워진다.

수리아의 역사, 특히 후기의 역사는 악하고 퇴보적인 시대에 사는 잔인하고 악한 남녀들의 비열한 일련의 모습들을 전하고 있다.

 

다니엘서 11장은 B.C. 2세기 경의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 기간 동안의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셀류키드 왕조의 모든 통치자들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유대인을 후대했거나 학대하였던 왕들에 대하여만 이야기를 할 것이다.

 

2. 안티오쿠스 3세(B.C. 222-187)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결국 B.C. 198년의 파네아스(Paneas, 또는 Panium) 전투에서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전의 프톨레미의 어떤 왕들보다도 더 안티오쿠스 3세를 좋아하였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 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였다.

따라서 유대의 법률은 페르샤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재가를 받았다.

상인들은 유대인에게 금지된 음식물을 예루살렘에 반입시키는 것이 금지되었다.

안티오쿠스는 수 천명의 유대인들을 자신이 건설한 성읍들에 정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이와 같은 호의들은 얼마가지 못하였다.

 

이 당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점점 증가되었다. 

따라서 B.C.2 세기와 1세기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주변에서, 욥바와 갈릴리, 요단 건너편 지역의 많은 지방에서, 브리기아와 루디아에서, 힐 카니아, 애굽, 구레나이카에서 유대인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팔레스틴의 통치권이 수리아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애굽에 있는 유대인과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러한 여건은 유대교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Hannibal)의 격려에 힘입어 안티오쿠스 3 세는 로마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그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다. 

B.C.190년 서머나(Smyrna)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었다. 

이 전투 후에 소아시아의 타우루스 산맥 (the Taurus Mountains) 서쪽의 모든 영토가 로마인의 손에 넘어가야만 했고, 이것은 사실상 소아시아의 상당한 부분을 빼앗긴 것이 되었다.

수리아는 현대의 화폐제도상의 3천만 달러에 상당하는 무거운 배상금, 즉 5,000 달란트를 부과받았다.

이와 같이 무거운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보증하기 위하여 수리아 귀족 중의 지도급 인물 중 열두 명이 보증을 서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셀류키드 왕가에 속한 부자들이 갑자기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로마가 요구한 엄청난 액수를 채우기 위하여 안티오쿠스 3세는 나라 안의 신전들을 압류하고 예루살렘 신전의 재산도 압류하였다.

이 신전 들은 어느 정도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소문났었다.

안티오쿠스 3세 가 자기의 통치 아래 있는 신전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에 착수하자 반대가 일어났고, 그는 그의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에 살해 당하였다.

 

3. 셀류쿠스 4세(B. C. 187-175)
셀류쿠스 4세는 계속하여 로마에 과중한 조공을 바치도록 압력을 받았다. 

그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려고 시도하자 유대인들의 재정적인 반대가 일어났다. 

성전의 곡간에는 과부와 고아들의 몫이 비축되었고 

또한 토비아스(Tobias)의 아들 힐카누스(Hyrcanus)의 재산 이 어느 정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액수가 은 400 달란트와 금 200 달란트에 이르렀다(마카비 2서 3:11, 요세푸스 Ant. xii. 196~235).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시위와 함께 수리아 장관 헬리오도루스(Heliodorus)로 하여금 성전의 금을 압류하는 일을 보류하게 하였다.

마카비 2서 3:1~40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일을 하나의 기적으로 간주하였다.

얼마 후 셀류쿠스 4세는 자기가 정권을 장악하고자 의도 하였던 헬리오도루스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4. 안티오쿠스 4세 (B. C. 175~163)
셀류쿠스 4세의 동생이며 에피파네스(Epiphanes)라고 불리운 안티오 쿠스 4세는 자기의 선왕들이 행하였던 강압적인 정책을 답습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술과 가장함과 숙달 된 통치를 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악한 행위들로 인하여 유명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명예를 대단히 추구하고 탐하였을 뿐 아니라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과 괴벽으로 고생을 하였다. 

역사가 폴리비우스 (Polybius)는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 조급함 때문에 그를 "현명한 신" 이란 뜻의 에피파네스 보다는 "미친 사람”이란 뜻의 "에피마네스" (Epimanes)라고 명명하였다. 

제국의 광대함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는 그가 통치하는 나라의 모든 신민들이 자기와 같이 그리스 문화의 신봉자가 되도록 온갖 정열을 쏟았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그에게는 비위상하는 민족이었다.

 

타기투스(Tacitus)는 그의 '역사서' (Histories, V. 5)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왕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의 광신을 뒤엎고 그들에게 그리스의 관습들을 심어주려고 노력 하였으나 파르디아인(Parthian)과의 전쟁 때문에 이 가장 논쟁적인 민족의 처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멈추게 되었다."

 

라이크(Reike)는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셀류카드 왕조의 전통을 매우 강하게 강화시키기 위하여 그는 자신을 올림푸스의 제우스(Zeus)로 숭배하도록 백성들에게 요구하였고 (마카비 2서 6:2; 역시 당시의 주화에 새긴 그림에서도),

이로 인하여 자신의 제국주의에 어떤 특별한 서양적 강조를 두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 부친과는 달리 로마나 소아시아에 있는 그의 맹방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헬라화의 계획이 유대 땅에서는 반대에 부딪혔다.

유대인들 중에는 보수파와 헬라파의 두 부류가 있었다.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1세기 반 동안 헬레니즘에 순복하였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복장을 하고 그리스 관습을 따랐으며 그리스 말을 습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대적 신앙과 관습들을 사랑하였다.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의 헬라화가 자신이 통치하는 다른 주들에 서와 같이 쉽사리 실현되었으면 하는 것이 안티오쿠스 4세의 희망이 었다. 

이 수리아 왕은 유대적 생활양식을 저버린 그리스 문화예찬자들(Graeco-philes)의 협조를 받기를 기대하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팔레스틴의 대도시들에다 체육관과 신전, 경주용 경기장, 대중 목욕탕 들을 세웠다.

예루살렘에서는(전통주의자들을 경악시키는 일이 벌어졌는데) 요새의 바로 밑에다 그리스의 체육관을 세웠다. 

요세푸스에 따르면(XII: V.1) 그리스의 복장이 소개되었고 청년들이 그리스 모자 를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고 성전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제사장직을 소홀히 하고 대신에 운동경기장의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펼쳐진 방종함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보였다.

왜냐하면 많은 헬레니즘의 관습들이 히브리인의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과는 완전히 양립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되었을 때 오니아스 3세(Onias II)가 대제사 장의 자리에 있었고 그의 형제인 요수아는 유대적 헬라파의 지도자였다. 

오니아스 3세는 수리아 왕의 계획과 칙령에 순응함을 보이기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야손(Jasonn)으로 개명하고 선조로부터 유대인들 에게 전해 내려온 관습과 신앙을 포기하였다.

대제사장의 자리를 얻기 위하여 440 달란트의 뇌물이 안티오쿠스 4세에게 보내어졌다.

다른 150 달란트는 유대인의 청년들이 운동경기와 그리스의 놀이들을 훈련할 수 있는 체육관을 예루살렘에 짓는 허가를 얻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

야손은 왕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유대와 예루살렘을 헬라화 시키는 일을 정력적으로 착수하였다.

 

B.C.172년 야손은 그의 형제인 메넬라우스(Menelaus)가 300달란트란 더 비싼 금액을 제공하여 그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마카비 2서 4:24).

정통적인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의 가장 높은 종교적 직임이 뇌물증여에 의하여 얻어 질 수 있었다는 상황은 애 처럽기 짝이 없는 타락의 상태였다.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에 임명된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악질적인 위반이었으며, 유대 땅에서 격한 반감이 발생하였다.

메넬라우스는 그의 뇌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성전의 곡간에 비축된 상당액수의 돈을 강제로 탈취하였으며,

이 사실은 유대인들을 격노케 하여 그들은 메넬라우스의 행위를 막기 위하여 수리아의 왕에게 대변인을 파송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공격적인 헬라파의 행동이 반대에 부딪혔으며 유대인들 사이에 심각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메넬라우스는 더 많은 뇌물을 공여함으로써 승리하였으며 항변하였던 대변인은 사형에 처해졌다.

마카비 2서 4:34-35 에 따르면 메넬라우스와 오니아스는 피살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네 차례에 걸쳐 애굽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첫번 전쟁은 프톨레미 6세가 죽은 후인 B.C.173년에 발생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셀류키드 왕조는 코엘레-수리아와 팔레스틴, 푀니키아를 자국의 통치에 예속시켰다.

전쟁 중에 프톨레미 필로메터는 포로로 잡혔고 안티오쿠스 4세는 B.C.169년에 멤피스(Memphis)에서 친히 애굽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프톨레미의 동생을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유다에서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험악해졌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에 대한 제2차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동안 야손은 무력으로 자기의 자리를 되찾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이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다.

또한 안티오쿠스 4세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보고를 접하자 격노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피로 얼룩진 보복이 거룩한 성읍에서 자행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수리아 군병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잡아 팔아버린 외에도 4만에 이르는 남녀와 어린 이들을 대량학살하도록 허락되었다.

매우 잔인한 인간인 필립(Philip)이 예루살렘의 총독이 되었다.

이어서 안티오쿠스 4세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소”에 감히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였다.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많은 다른 보물들 과 함께 노략당하였다.

 

이러한 무례한 행동들 외에도 무거운 세금이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누리는 사치스러운 생활수준과

또한 그가 수 차에 걸쳐 치른 전쟁 비용 때문에 그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는 유 대인들로부터 재정상의 도움을 얻기로 결정하였다.

인두세 (poll tax), 제왕세 (crown fax), 성전세와 같은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과 추수열매의 절반에 달하는 무거운 과세가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징수되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리아군대는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를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가축과 곡물창고를 탈취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세수정책이 얼마나 무지막지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지는 일반적으로 팔레스틴의 유대인이 가난한 상태였음을 생각해 볼 때 분명해진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땅을 갈고 추수를 하는 영세 농민들이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세금들을 징수하는 데에 무력을 동원하였으며

세금을 납부하지 못할 때는 개인이나 마을 전체를 노예로 팔았다.

 

B.C. 167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그의 마지막이 될 애굽과의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에서 그가 승리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애굽은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로마는 쾌히 승락하였다.

안티오쿠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접근하고 있을 때 그는 로마에서 파견 한라에나스(G. Popillius Laenas)와 만났으며,

이 때 그는 수리아군이 즉시 애굽을 떠나도록 요구하였다.

안티오쿠스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면서 수리아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남부 국경지대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수리아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 귀환하였다.

헬라파의 반대자들이 공공연히 정치적으로 애굽을 지지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귀환길에 그는 유대인에게 그의 분노를 풀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신앙과 사고를 그리스적인 것으로 개조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22,000명의 군대와 함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를 예루살렘에 파송하였으며 아폴로니우스는 기술을 써서 예루살렘의 문을 확보하였다.

그는 이 성읍에 들어가자마자 믿기 조차 어려운 악랄한 수단들을 동원하여 수 천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여자와 아이들이 노예로 팔렸으며 성은 불탔다.

성곽은 무너지고 그 돌들은 26년간 수리아의 주둔군이 주둔했던 옛 다윗성을 방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후에 안티오쿠스 4세는 착령을 발표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수리아의 법과 관습들, 종교를 추종하게 하였다.

그리스의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가 여호와 경배를 대신하게 되었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 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다.

자기 아기들에게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은 그들의 목에 아기를 두른 채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

매일 드리도록 된 희생제물이 금지되었다.

한떼의 돼지를 성전에 몰아넣고 올림푸스의 제우스에게 헌납된 제단 위에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 제단은 이렇게 1년 반 동안 이용되었으며, 이 일이 악한 때를 특별히 예시하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한 때와 반 때”, 혹은 42개월의 근원이 되었다고 믿어진다.

성전의 기명들은 그 위에 돼지고기에서 취한 육즙을 뿌림으로 더럽혀졌다.

 

보기 흉한 난장판이 성전을 더럽히고 이곳은 술군들의 체류지가 되었다. 

야만인의 주신을 섬기는 의식(Bacchic ritual)을 포함한 불경스런 이방종교의 의식들이 유서깊은 성전의 의식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유대인의 종교적인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카비서 (the Books of Maccabees)는 유대인들에게 강요된 애닯은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이 칙령 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행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제사 장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신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례를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 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마카비 1서 1:44~50).

 

영웅심이 많은 유대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양심을 내팽개치기 보다는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것, 즉 순교당하는 것을 더 원하였다.

역사가 거듭하여 여실히 보여 주고 있듯이 압제와 핍박은 한 민족의 힘과 생동함을 소멸시키기는 커녕 정반대로 완강히 반대와 국민적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강화시켜서 국민 각자를 분열시키기 보다 오히려 결속시킨다.

이러한 자명한 이치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가장 현명하고 계속적인 증인이 되어 왔다.

거룩한 결단과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얼굴을 핍박에 대하여 굴하지 않고 쳐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종교와 선조들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상으로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곳곳마다 우상의 제단들이 서있고 공공연하게 율법책이 불살 라지며 반항하는 자들을 사형하였을지라도 많은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언약에 충성하기를 택하였다.

 

마카비 1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들 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언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마카비 1서 1:62~63).

 

수리아인들에 의하여 유대인에게 계속적으로 가해진 잔혹함과 비인격적인 처사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모든 유대인들은 헬라화를 강요하는 교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학대를 받고 고문을 당하였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기까지 채찍을 맞은 고령의 서기관 엘르아살의 경우가 유대인 의 영웅심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마카비 2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뛰어난 율법학자들 중에 엘르아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나이도 많았고 풍채도 당당한 사람이었다.

박해자들은 강제로 그의 입을 열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활을 더럽히고 살아가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진 하여 형틀로 가면서 그 돼지고기를 벹아버렸다.

참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먹어서는 안될 것을 물리칠 용기를 가져야 하는데 엘르아살이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돼지고기를 벹아버렸던 것이다.

율법에 어긋나는 이 희생제를 관장하는 사람 중에서 엘르아살과 오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따로 불러 그에게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다른 고기를 준비했다가 그것을 가져오도록 권하면서 왕의 명령대로 희생제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체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엘르아살은 오랜 친분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인정을 이용해서 자기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자기의 나이에 따르는 위엄과 백발이 된 머리를 생각하고 어렸을 적부터 나무랄데 없이 살아온 자기 생애를 돌이켜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하여 고결한 결심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빨리 죽여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말을 마 치고 그는 형틀로 직행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르아살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엘르아살이 한 말을 듣고 미친 놈의 소리라고 생각하며 돌변하여 그에게 악의를 품게 되었다.

엘르아살은 모진 매에 못이겨 거의 죽어가면서 신음하는 소리로 말하였다.

“주님은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매를 맞아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의 죽음으로 젊은이에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포들에게 용기의 모범과 덕행의 본보기 를 남기게 되었다(7:18~31).

 

그 때에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에게 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대변자로 나서서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해서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조상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읍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솥과 가마를 불에 달구라고 명령하였다.

명령대로 당장에 솥과 가마를 뜨겁게 달구자 남은 형제들과 어머니의 눈 앞에서 왕은 그들의 대변자로 나섰던 사람의 혀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밀고 사지를 자르라고 명령하였다.

완전히 폐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명이 붙 어 있는 그를 왕은 뜨겁게 달군 솥에 넣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솥 에서 연기가 사방으로 멀리 퍼져나갈 때에 나머지 형제들은 어머니 와 함께 서로 격려하고 고상하게 죽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7:1-5).

 

이러한 순교의 본보기를 그의 남은 여섯 형제들도 따랐고 마침내 그들의 어머니도 똑같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하였다.

 

안티오쿠스 4세 시대에 있었던 이러한 순교자들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에스라서에서 그 기원이 기록된 서기관들에 의하여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이 서기관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엄격하였다.

이들이 펼친 반대운동 가운데는 토라와 세대를 거치면서

구전으로 전승되었던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서기관들은 이방인들의 것은 전부 반대하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유리잔의 원료가 이방인이 소유 한 영토에서 발견된 재료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그 사용을 거절하였 다.

 

처음에 이 집단은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그들은 점진 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 었으며,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펼쳤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 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그들의 열광적인 율법주의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한 세대 이상을 셀류키드 왕조의 헬라화 정책에 협조하고 부추킨 귀족화된 제사장들의 활동을 반대하였다.

비록 유대인들이 반란을 결정하였을 때 그들이 압제와 독재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 집 단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적 자유를 획득한 후에 하시딤은 계속하여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기를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