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3장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w.j.lee 2023. 5. 9. 13:19

제3장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마게도냐의 필립 왕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결코 통합된 적이 없었다. 

크세르크세스 이래로 그리스 국가들의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갔지만 그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제국을 형성할 만한 공격력은 없었다.

물론 모 든 도시 국가들이 헬라 동맹(Hellenic League)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연합을 성취한 이는 마게도냐의 필립이었으며, 이 동맹은 페르샤 제국을 정복하는데 하나의 힘이 되었다.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다.

그는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Symmachus)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Iliad)를 알게 해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가 그의 스승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미 부왕이 계획하였던 일들을 실행하였다.

그는 일년에 걸쳐서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내었다.

특히, B.C.335년에 테베 (Thebes)를 패퇴시키고 알렉산더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경고로서 그 도시민들을 학살한 직후에 그러하였다.

겨울 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 334년 알렉산더는 아시아 정복을 위하여 유럽을 떠났고 그 이후에 마게도냐는 결코 그를 볼 수 없었다.

 

페르샤 제국을 정복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하여 그는 마게도냐인의 거의 절반이 되는 3만의 보병과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소아시아 를 가로질러 갔다.

 

호머의 서사시를 통하여 그가 익히 알고 있던 트로이(Troy)에 도착 한 뒤에 그는 옛 트로이 근처의 그라니쿠스(Granicus)라는 작은 강가에서 소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페르샤의 태수들과 전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샤의 귀족들은 패주하였고 사르디스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항복하였다.

그리고 루디아인들은 약 200년 전에 빼앗긴 자치권을 허락받았다.

 

그 후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공략 하여 이따금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해방"이 되었다.

334년 가을까지 에베소(Ephesus), 밀레도(Miletus), 할리카낫수스(Halicarnassus)가 함락되었다.

334-333년 겨울 동안 소아시아의 남부지역이 정복되었다.

333년 잇수스(Issus)에서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 지휘 아래 진을 친 60만에 달하는 페르샤의 대군과 마주쳤다.

페르샤군은 3만의 그리스 용병을 포함한 알렉산더의 군대보다 수 배에 달하였다.

그러나 페르샤군은 패주하였고 이 패전으로 인하여 대 페르샤 제국의 퇴락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다메섹(Damascus)은 경악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다리오를 추적하지 않고 자신의 배후를 확보하기로 결정 하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킨 뒤에 방향을 돌려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을 정복해나갔다. 

시돈과 비블로스(Byblos), 아라두스 (Aradus)는 알렉산더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그들의 항복을 전하였다.

그러나 두로는 굴복하기를 거절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이 도시를 공략하기 위하여 본토에서 섬에 이르는 둑길을 쌓아야만 하였다.

이 둑길을 쌓으면서 그는 본토에 있는 옛 두로의 폐허를 취하여 “바다 물 가운데" 던져넣었다.

따라서 옛 두로는 먼지까지 깨끗이 쓸리어 "말간 반석"이 되었고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어버렸다(겔 26: 4, 5, 12~14).

두로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 때 두로인 8천명이 살륙을 당했으며 3만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두로가 함락되자 푀니키아인(Phoenicians)의 해상 독점과 상업상의 우월함에 종말을 고하였다.

 

마찬가지로 항복하기를 거부하였던 가사(Gaza)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받아 두달만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가사에 대한 보복은 두로에 대한 것보다 더욱 심하였으며 스가랴가 한 예언을 성취시켰다.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슥 9:5).

 

이어서 알렉산더는 두로와 가사와 마찬가지로 항복을 하려 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요세푸스와 탈무드에 따르면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야두아(Jaddua)가 그의 제사장의 옷을 입고 앞장 서며 흰 옷을 입은 한 무리의 행렬이 알렉산더를 맞으러 나아갔다.

몸에는 제사장의 제복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손에는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대접을 든 대제사장이 앞장 선 무리를 보고 알렉산더는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의 성호를 경배하며 대제사장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을 자기의 꿈 속에서 본 일이 있노라고 말하였다.

대제사장이 알렉산더에게 그가 그리스의 최초의 왕이 되고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자 알렉산더는 그것이 자기에 대한 예언임을 믿었다.

이 때 이후로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비록 이러한 이야기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을지라도 알렉산더가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332년에 알렉산더가 애굽을 침략하였고 그곳의 지방 방백들은 항복 하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샤인을 증오하였던 애굽인들에 의하여 구원자로 환영받았다.

알렉산더가 아몬(Amon) 신전에 들어서자 애굽의 제사장이 아몬의 아들이 입는 법의를 그에게 제수하였으며 이로써 그는 바로의 법적인 아들로 공포되었다.

그는 또한 가르낙(Garnak) 신전에서도 이러한 의식에 참예하였다.

알렉산더는 즉시 애굽에 그리스 문명을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331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란 도시를 설립하였는데 건축가 디노그라테스(Dinocrates)가 설계하고 그 의 감독 아래 건설되었다.

알렉산더는 동 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 던 두로를 능가하고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이 도시에다가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유대인들이 이 도시의 별도의 구역에 거주하며 자기들의 관습을 영위하고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누리도록 허락받는 특별한 배려가 행하여졌다.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유 대인들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그 후에 하 애굽 (Lower Egypt)에 살았 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애굽을 떠난 알렉산더는 다시금 동쪽을 공략하여 331년 10월 1일에 는 백만의 군대로 포진한 다리오를 앗수르에서 만났다. 

여기서 페르샤군은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고 패배하였다.

곧바로 알렉산더는 남쪽에서 바벨론을 향하여 진군하였고 이 성의 총독은 그를 향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 때 바벨론의 방백이었던 마재우스(Mazaeus)는 그 성의 통치자로 유임되었다.

알렉산더는 바벨론의 신전들을 재건한 후에 동쪽으로 진군하여 나아갔다.

 

엘람(Elam)의 수도인 수사(Susa)에서 알렉산더는 막대한 보물을 노획하였다.

바벨론과 수사에서 그는 6천만 달러에 상응하는 금과 은을 거두어 들였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는 일억 달러에 이르는 보물을 노략하였다.

B.C. 330년 겨울을 그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지냈다.

알렉산더는 취중에 아테네인이었던 기녀 타이스(Thais)의 선동으로 크세르크세스의 왕궁을 불태웠다.

330년 봄 그는 메디아(Media)의 수도인 엑바타나(Ecbatana)를 공략하였다.

이 때 다리오는 그의 친족에 의하여 살해 당하였고 그의 유해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장사지내지기 위하여 알렉산더에게 보내어졌다.

 

알렉산더는 페르샤 제국을 정복하려는 그의 꿈을 달성하기 이전에 자기가 정복한 나라와 국민들에게 그리스 문화를 정착시키려 하였던 그의 원래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이제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결합시켜 하나의 세계 제국을 만들어서 모든 지역의 신민들이 동일한 기회에 동참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채택하였다.

다리오를 패배시켰던 아르벨라(Arbela 또는 Gauqamela) 전투 이후 알렉산더는 동방의 복장을 하였고 그의 부하들이 동방의 관습을 따라 그에게 절하게 하였다.

아시아인들의 나라들에서는 정부의 통치권이 아시아인들에게 되돌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와 마게도냐 군인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일이 못되었다.

 

알렉산더는 330년에서 325년에 이르는 기간에 동북부의 페르샤와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의 서부와 남부로 알려진 지역을 그의 제국에 귀속시킴으로써 정복자로서의 그의 승리적 전훈을 계속 쌓아갔다.

그는 힌두-쿠쉬 산맥(the Hindu-Kush Mountains)을 넘어 속디아나(Sog. diana)로 진군하여 옥수스(Oxus) 강과 작사르테스(Jaxartes) 강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터키스탄(Rusian Turkestan, 중앙 아시아의 광대한 지 역)을 정복하였다.

그는 중국에 연한 터키스탄(Chinese Turkestan) 지역의 타쉬갈(Tashgar)에서 삼백 마일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알렉산드리 아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the Ulti- mate)라고 불리웠다.

 

옥수스의 북부 거친 지역에서 두번의 여름과 한 차례의 겨울을 지낸 후에 알렉산더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서, 키벨 관문(Khyber Pass)을 통과하여 인도 땅에 들어갔다.

그는 인도의 푼잡(Punjab)을 정복하였고 그곳에서 더욱 멀리 나아가 황해 (the Yellow Sea)까지 진군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마게도냐 군대는 더 이상의 진군을 반대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자기들이 노략한 전리품 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운반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하여 진군한다는 것은 어리석게 여겨졌다.

323년 알렉산더는 지금은 발루키스탄 (Baluchistan)이라 불리우는 게드로시아(Gedrosia)를 거쳐 인도에서 바벨론으로 귀환하였는데 그들은 여지껏 유럽인들이 밟아보지 않은 땅을 통과하였다.

 

바벨론에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다.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간의 국제결혼 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하였다.

이 계획들의 첫 단계로서 그는 자기의 진군로를 따라 70개 이상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 하고 그 도시들에 원주민과 통혼한 자기의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다.

 

이 때에 그는 그의 마게도냐 군인들에게 아시아 민족의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친히 수사궁의 박타리 안계 공주인록 산나(Roxanna)와 다리오 3세의 딸인 스타티라(Statira)와 결혼함으로써 마게도냐 병사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풍습인 국제결혼 (이민족과의 통혼)을 시작케 하였다.

알렉산더는 또한 다른 페르샤의 공주인 파리사 티스(Parysatis)와도 결혼하였다.

그는 그의 부하들의 모본으로써 이러 한 결혼을 통한 동맹을 택하였다.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민족들과 문명의 융합에 노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과 아시아의 식물들을 교합시키는 일도 원하였다.

 

알렉산더는 324년 수사에 귀환하여 그 도시의 통치자가 악정을 행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와 동시에 자기에 대하여 점차 거세져가고 있는 반감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기의 친조카인 역사가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가 하나의 신으로 숭배되기를 원한다는 소식에 분개하였다.

그의 동양화 정책의 실행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323년 알렉산더는 아라비아의 주변을 항해하는 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남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서부 유럽을 정복하려는 보다 급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에 알렉산더는 33세라는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3년에 걸친 그의 통치를 마쳤으며 이 짧은 기간 동안 역사상의 어떤 통치자보다 더욱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알렉산더는 허영과 가만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손으로 세계를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새긴 아토스 산(Mount Athos)을 갖는 꿈을 가졌었다. 

그는 친히 하나의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으나 지상에서의 그의 죽음은 그가 지닌 더 이상의 모든 야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 다.

어떤 학자들은 알렉산더의 구상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주장하기 도 한다.

 

알렉산더가 이룩한 정복은 유익한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주된 유익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1. 헬라 문명을 애굽과 서부 아시아에 확산시켰다.
2. 그리스인과 이방인 (야만인) 사이의 구별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고 기독교 복음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 였다. 
3. 헬라어가 개화된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세계적 통용어가 되었다.
4.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바닷길이 발견되었다.

 

나쁜 영향 중의 하나는 페르샤 제국의 막대한 보화를 소유한 이후에 야기된 그리스인들의 비도덕화였다.

또 하나는 동양의 악덕과 사치풍조에 접함으로써 야기된 그리스인들의 나약해 짐이었다.

어떤 역사가는 그 결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의 문명을 생각할 때 그것이 지닌 특성들을 정의하는 데 하등의 어려움을 못느낀다. 

미술과 시, 문학, 철학의 다양한 모든 형태들 속에서 발견되는 지성과 상상의 고도한 완전함-운동 경기들이나

난해한 토론들 속에서 전개되는 마음과 몸의 끊임없는 활동-미에 대한 사랑 - 신속한 지각작용- 지칠줄 모르는 질문 - 이모든 것이 그리스 민족 고유의 관념에 들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국가적 특성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복음의 확장을 위하여 보조적 역할을 하도록 되었다는 선에서만 생각해야 한다.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주었다.

이미 다리오의 통치 기간에 3백만의 유대인이 127개 주에 이르는 페르샤 제국의 전역에 분산되었다고 보여 진다.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 이다.

 

역사상의 어떠한 인물도 그렇게 많은 나라들의 전설 속에서 이야기 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애굽인들은 그들의 신화 속에서 그를 하나의 신으로 이야기하였고,

이슬람의 여러 나라는 그를 영웅이자 성자인 이스칸더(Iskander)로 묘사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다윗 가문에 속하여 두고,

이디오피아의 기독교인들은 그 들의 성인문학(hagiological literature)에서 그를 하나의 성자로 노래하 며,

중세에 대단히 유행하였던 성자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는 낙원을 기다리는 알렉산더 대제(Alexlandre le Grand)로 묘사되고 있다.


호머의 일리어드(Iliad)

일리아드는 트로이아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로 호메로스(Homer)가 저술했습니다.

일리아드의 요약과 명언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일리아드는 트로이아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로 호메로스(Homer)가 저술했습니다.

일리아드의 요약과 명언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요약
일리아드는 트로이아 전쟁의 마지막 주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며 그리스와 트로이아의 충돌에 초점을 맞춥니다.

시는 그리스군의 지도자인 아가멤논과 그들의 최고 전사인 아킬레우스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합니다.

이 분쟁은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철수하고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한편, 트로이아 왕자 헥토르는 트로이아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군과 싸우며,

양측은 긴 시간 동안 피바다 싸움을 벌입니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돌아와 헥토르를 죽이며, 이로 인해 트로이아가 최후의 몰락을 맞이하게 됩니다.​

명언
"노래하라, 여신아,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가 아허이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온 것을."
"세상에 걸음걸이를 놓칠만큼 괴로운 것은 숨 쉴 만한 생물 중에 사람밖에 없다."
"진실의 말은 단순하다."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롭지 않다."
"나의 어머니 테티스는 내가 두 가지 길에서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싸우면 살아돌아갈 수 없지만, 내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복수심 많은 신들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지 마라,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세상에 기어다니는 생물 중에 사람보다 연약한 것은 없다."
"신들은 인간들에게 불행을 선사해서 후대가 노래할 소재를 만들기 위해 뜻을 굳힌다."
"물러서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낸다."
"언제나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야 한다."
"많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지만, 운명은 한 사람이라도 예측할 수 없다."
"생명이란 한순간의 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틀어 흐르는 생동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도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명한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은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