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2장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w.j.lee 2023. 5. 9. 13:20

제2장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B.C. 596년에서 A.D. 70년에 이르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결정적인 시기였다. 유대교"가 존재케 된 것은 바로 이 기간 동안이었다. 

B.C. 605년과 B.C. 596년에 있었던 국외 이주를 필두로 하여 수세기 동안 유대 땅에 집중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은이제 결과적으로 근동과 중동, 소아시아, 유럽에까지 확산된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느헤미야, 에스라, 에스더와 같은 성경들과 외경과 위경에 속한 마카비서들(the Books of the Maccabees),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의 고사기」(Jewish Antiquities)와 유대 전쟁사 (Jewish War) 같은 책들은 이 기간의 역사에 빛을 비추어주는 책들이다.

또한 여기에다 사해 지역에서 새롭게 발굴된 여러개의 두루마리 들을 첨가할 수 있다.

 

유대교의 태동과 발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한 첫번 바벨론 유수(幽囚)가 있던 B.C. 605년과 고레스가 치유의 교서를 발부한 B.C. 538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B.C. 605년, B.C. 597 년, B.C. 587년에 강제로 이주하였을 뿐 아니라 바벨론에 이주한 그들은 유대의 사회와 종교를 대변하였던 사람들이었다(왕하 24:14~ 16:25:11-12).

이주자들은 점차 그들의 새로운 바벨론의 집을 즐기게 되었고 그들의 농경과 상업상의 근면함으로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북왕조에 속한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하였다.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은 아마도 장로의 지도 아래서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하였다(느 8:1:13:1).

선지자 에스겔과 여타의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서 유대인들은 영적 지도를 받아 그들 나름의 국가적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 노력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국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의 패배를 인하여 버려진 바 되지가 않았다.

만민의 하나님으로서 그 분은 자기가 선택하셨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겔 37:1~14). 1)

 

포로기 동안 유대인들이 왕이나 성전의 의식이 없이도 종교적 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음이 점차 명백해지기 시작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충성은 이 백성을 결속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종교적 연합체로 남아 있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율법에 정통하였던 서기관들은 유대인의 무리에게 성문서의 의미를 해석하였고, 따라서 회당마다 성문서를 배치하게 되었으며 이후 계속되는 유대교의 역사에 있어서 이들은 이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기관들은 개인적인 기도와 안식일의 준수, 형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종교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고 수 세기에 걸쳐 유대교의 광휘(光輝)가 보존 유지되었다.

 

예레미야 (B.C. 626-587)의 예언이 성취되는 B.C. 538년에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의 화해정책에 따라서 그 이후로 바벨론 사람의 종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바벨론에 강제 이주되었던 이들이 유대로 귀환하자 그들은 유대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누리던 느슨한 도덕생활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주된 지역으로부터의 유대인의 귀환이 세 차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번째 귀환은 B.C. 538년에 고레스 치하에서 있었고(스 1:5; 2:67),

두번째는 B.C. 457년에 에스라가 인도하였으며,

세번째는 B.C. 444년에 느헤미야가 인도하였다.

실제로 바 벨론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였다고 추정되는 수효는 5만명에 달하며 이 중에 4,229명의 제사장이 있었다(스 2:2-67).

 

이들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남아 있었던 유대인과 함께 예루살렘 주변에서 거주하였으며 유대인의 거주 지역, 즉 예후딤 (Yehudim)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인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귀환한 유대인의 상태는 곤궁하였다.

훼파 된 가옥은 큰 품을 들여 재건되거나 그 집에 살던 사람들에게서 사들 여야 했고,

전쟁의 흉포에 의하여 폐허가 된 전답은 다시금 경작을 해야 하였다.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할당된 지역은 케일라(Keilah), 벳 -수르(Beth-sur), 남으로는 테코아(Tekoa)에 이르는 조그만 영토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귀환한지 일곱째 달이 된 때인 B.C. 587년에 완전히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과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결단은 주변족속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족속, 여타 족속들과 충돌을 야기시켰다.

이것은 성전건축을 반대하는 일로 구체화되어 페르샤왕은 공식 교서를 내려 중지시켰고 B.C.537년에 성전건축은 멈추게 되었다.

그 후 15년 동안 그들은 농사짓는 일과 그들의 가옥을 건설하는데 소모하였다.

귀환자들이 최초로 유대에 돌아오면서 가졌던 대단한 종교적 열정이 식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성전의 선지자"라고 불리우는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세우시어 예언을 하게 하여

그들의 죄된 무기력과 무관심에서 깨어나 활동을 하도록 새 힘을 불어 넣게 하셨다.

B.C. 520년에 예언을 시작한 학개와 스가랴에 의하여 자극을 받은 성전재건은 B.C.515년에 완공되었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요슈아(Joshua)의 지도 아래 성전이 재건되었다.

그 이후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스가랴서는 성전의 완공 이후 57년간을 생략하고 있다.

B.C.457년 제사장의 반열에 속하며 율법에 익숙한 학사(서기관)인 에스라는

페르샤 황제 아닥사스다 (Artaxerxes)에게 일단의 유대인 무리를 팔레스틴에 인도하여

그곳에서 종교적 활동에 투신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페르샤 황제는 에스라가 요청한 유대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물품과 자금을 그의 내탕고에서 내어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B.C.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에스라는 유대인들이 이방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목도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홀로 기도하며 그 백성의 죄를 고백하였다.

에스라는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게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후에 느헤미야가 똑같은 일을 해야만 했다.

 

에스라는 특별히 모세오경(Pentateuch)에 계시된 대로의 하나님의 율법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는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이 결과 안식일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기록된 대로 제사가 준행되며 이방인과의 통혼이 금지되고 이방인 아내들을 돌려보내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에서 B.C.5세기에 특출한 역할을 감당하였던 평신도였다. 

그는 아닥사스다 1세의 수사(Susa, 혹은 Shushan) 궁정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페르샤 왕에게 간청하여 휴가와 함께 자기 고향 사람들을 도우라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느헤미야는 유대의 총독에 임명되었고 왕은 그의 귀국길에 접해 있는 총독들에게 협조하도록 친서를 내리고 수사에서 예루살렘에 당도할 때까지 호위대를 파송하였다.

 

B.C.444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예루살렘의 야간순행을 하였으며 성민들을 회집케 하여 예루살렘 성곽의 재건을 독려하였다.

그는 산발랏(아닥사스다의 대리자격인 공직자, 느 2:10;4:2)과 사마리아 주민, 기타의 호전적인 인접 족속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2개월도 채 안되어서 이 역사를 필하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상호 협력하여 백성들의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상태를 증진시켰다. 

이들의 노력에 대하여 선지자 말라기도 가세하여 협력하였다. 

느헤미야 8장은 백성들이 장막절로 회집하였을 때 율법이 어떻게 낭독되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 학사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 (그들이) 다 그 처소에 있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며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 8:4~6,8).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준수하고 이방인들과 구별되이 살겠다고 약속하였다.

느헤미야는 철저히 결혼풍습을 개혁하고(13: 25), 안식일을 범하는 행각을 근절시켰다(13:21).

몇 년 후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에게서 재차 휴가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는 엄격한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였고 산발랏의 딸과 결혼하였던 제사장 엘리아십의 무관심 속에 암몬 사람 도비야가 꾸민 방을 성전뜰 밖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 때 도비야는 그의 장인이 거하는 사마리아로 도피하였고, 이들이 가장 오래된 히브리 성경의 필사본을 남겼으며, 이것은 사마리아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한 이 도피자들은 그리심산 위에 하나의 신전을 건립하였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 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province)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다.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 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 (Artaxerxes I, B.C. 465-425)와 단 일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 세스 2세(Xerxes II), 다리오 2세 (Darius [II-Nothius, B.C.423-405)였다.

 

B.C. 432년과 B.C.411년 사이에 유대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음 10년 동안 바고아스 (Bagoas)가 유대의 총독이 되었다.

그 당시 엘리아십의 손자인 대제사장 요하난은 중요한 정치적 지도자였다.

그는 B.C. 408년에 성전에서 그의 친형제들을 살해하였고, 그로 인하여 바고아스의 미움을 사서 곧 그의 아들에 의하여 대치되었다.

 

엘리판틴 파피루스(the Elephantine Papyri)가 애굽의 나일강의 최초의 범람(the First Cataract) 시에 형성된 엘리판틴 섬에서 1903년에 발 견되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B.C. 5세기경 페르샤 제국의 변경지역 중의 하나였던 곳으로서 현대의 구약학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셰네 (Syene)의 파피루스와 상치된 이야기들이다.

이 두 파피루스는 구약 성경이 종결될 무렵에 대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세네에서 발굴된 아람어 파피루스는 '상애굽(Upper Egypt)에 거주하였고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하여 토지를 증여받았던 어떤 유대인의 군사식민지에 대하여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들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어떤 직업을 가졌으며, 아람어를 말하고 글로 썼으며, 나름대로의 풍습을 영위하였고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다리오 2세의 치세 동안에는 게마리아(Gemariah)의 아들인 예도냐(Jedonia)가 장로들과 함께 군사식민지 를 통치하였다.

이 유대인 식민지는 율법을 떠나서 야웨(JHWH)를 섬기는 자신들의 신전을 건축하였다.

 

B.C. 419년에 하나니아(Hananiah)라고 하는 고위 공직자가 엘리판틴에 문서를 전하면서 다리오 2세의 조서에 담긴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유월절의 세부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역시 엘리판틴 파피루스에서도 B.C. 411년 경에 있었던 반 유대적인 학살이 행해지는 동안 유대인의 신전이 유린당하였고,

양의 머리를 한 크눔(Khnum [Chumis])을 숭배하도록 강요당하였다는 사실을 읽게 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예루살렘에 요청하는 문서를 발송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하자 그들은 B.C. 408년에 두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동시에 파괴된 자기들의 신전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하도록 간청해줄 것을 사마리아인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신속한 허락을 해왔다.

이 식민지가 얼마나 오랫 동안 존속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서 가장 늦은 연대 는 B.C. 400년의 것이다.

야웨를 경배하는 외에도 엘리판틴의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듯한 다른 신들, 즉 아낫벧엘(Anathbethel), 아쉼-벧엘 (Ashim- bethel), 헤렘(Cherem 또는 Charam)도 섬겼다.

그러나 그 신들 중에서 야웨는 최고의 신이었다.

 

투나-엘-게벨(Touna-el-Gebel)의 서신들은 B.C. 5세기 경에 상애 굽에 또 다른 유대인 식민지들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 식민지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동일한 신앙의 지도자들과 유대를 맺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빅커만(Bickerman)에 따르면 성경이 종 결된 이후의 유대 역사는 독특한 양극성으로 그 특징을 이룬다.

즉, “한편은 예루살렘이란 중심지이며 다른 한편은 디아스포라(Diaspora) 에 산재한 여러 중심지들이다.

유대인의 분산은 유대교가 혈족상으로 근절이 되고 영적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팔레스틴은 여러 국가들에 분산된 유대인들을 결속시켰고 그들에게 일체감을 제공하였다."

 

페르샤의 국력이 쇠퇴하는 최초의 징조가 아닥사스다 2세(B.C. 404 -358)의 치세 동안에 나타났는데 제국의 여러 곳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마치 페르샤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키기나 하려는 듯이 위협하였다.

이미 자기 부인인 파리사티스(Parysatis)에게 놀아난 그의 선왕인 다리오 2세의 치세 중에 심각한 여러 차례의 반란이 발생하였었다.

리비아 사람인 아밀타우스(Amyrtaus)는 애굽에서 페르샤 파견대를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B.C. 401년에 아닥사스다는 그의 동생인 고레스(Cyrus the younger)가 그의 왕권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애굽 토벌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비록 고레스는 바벨론 북부에 위치한 쿠낙사(Cunaxa)에서 전사하였지만 크세노폰(Xenophon)이 지은 『원정기』 (The Anabasis)에서 묘사된 유명한 행진을 연출한 "일천 명"의 그리스 용병들이 흑해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이것은 페르샤 제국의 힘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근 40년간(B.C.378-340)을 애굽은 페르샤의 통치를 벗어나 자유를 누렸다.

 

아닥사스다 3세 오쿠스(Artaxerxes 3 Ochus, B.C.358-338)는 제국의 서부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압력을 받았다.

350년 그는 애굽을 재차 정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에 시돈의 지휘 하에 수리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338년 아닥사스다 3세는 자기의 부하 장군인 바고아스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페르샤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 3세는 그리스의 제도시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334년에 애굽을 재정복하였다.

마치 아캐메니안의 통치 (the Achaemenian rule)의 안정세가 회복되는 듯이 보였으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고 알렉산더 대제가 같은 해에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페르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 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帝國) 아람어(Reichsaramaeisch)를 사용하였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이의 차이점도 대단하여서 해석자(methurgeman)가 (토라와 선지서에서 추출한) 히브리어로 된 회당의 페리코팔 문선(pericopal selections)을 알기 쉽게 해석해야만 하였다.

 

구약성경에 속한 어떤 책들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바벨론과 페르샤의 환경에 언어의 형태가 유래한 것일 경우에는 아람어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포로 이후 기간에 기록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에스더, 말라기에 사용된 유형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책들에서 보면 유대인 들이 페르샤 왕의 연대를 따라 시간을 계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학 1:1, 즉 1:1, 스 1:1, 느 2:1 참조).

 

어떤 학자들은 유대교와 그 문헌들에 대한 상당수의 중요한 영향들 이 페르샤 시대에로 거슬러 올라가며 엘람과 페르샤에 살았던 비유대인과 교분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접촉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페르샤에 살았던 유대인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에서 습득하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구약성경에 계시된 사실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지닌 전 역사를 통하여 본질적으로 유일신 신앙을 견지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점이 여러 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불멸과 육체적 부활이란 두 가지의 종말론적 교리는 조로아스터교에 접한 유대인들에 의하여 들어왔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다.

그 러나 바벨론 유수(幽囚)의 훨씬 이전에 유대인들은 내세에 대한 그들의 소망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과 페르샤에 머물면서 유입하였다고 가상하는 또 다른 교리는 천사론이다.

그러나 족장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이미 천사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구 약의 천사론이 포로기 후에 발생되었다고 할 수 없다.


유수(幽囚) : 유배되어 갇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