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1부 역사적 배경

제4장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w.j.lee 2023. 5. 9. 13:19

제4장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323년에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그는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에 알렉산더의 박타리안 왕족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제국을 통치하는 계승자가 되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가와 처가에 있었다. 

심지어 위대한 정복자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 동안 알렉산더의 휘하 장수들 중의 하나였던 페르디카스(Perdiccas)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렉산더의 아들을 위하여 제국의 통합을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알렉산더의 이복형제이며 정신 이상자인 필립 아리 대우스(Philip Arridaeus)는 알렉산더의 아들이 혼자서 통치가 가능한 연령에 이를 때까지는 명목상의 왕이라고 선포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diadochoi)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렸다.

그들 중에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Cassan- der)가 끼어 있었다.

B.C. 315년까지 프톨레미, 카산더, 그리고 리시 마쿠스(Lysimachus)는 제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Antigonus) 의 야심적인 음모를 분쇄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다.

라구스의 아들 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 카터(Seleucus Nicator)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대다수 의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사건이 다니엘 11:4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 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이 외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

 

알렉산더의 제국의 분열은 애굽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이 벌인 팔레스틴의 장악을 위한 오랜 동안의 쟁투에서 재연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년에 애굽을 침공하였으며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없이 정복당하였다.

B.C.315년에는 팔레스틴이 프톨레미의 적수 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Gaza) 전투(B.C. 312년) 이후에 프톨레미는 그것을 회복시켰다.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랫 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다.

그리고 이 달력은 지금도 동방에 살고 있는 일부 유대인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다.

B.C. 301년의 입수스(Ipsus) 전투에서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었고,

이 사건은 프톨레미 1세(Soter [Lagi], B.C.305~285)가 팔레스틴을 장악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셀류쿠스(B.C. 305~280)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도를 정하고 수리아를 통치하였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12권에서 다음과 같이 프톨레미의 예루살렘 함락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왕은 잔피와 책략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 가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러 온것 같이 위장하여 입성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거절하지 않았고

-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적대 행위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 그들의 음모에 대한 기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하였고  그 날의 성격을 인하여서 유대인들은 태만하고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성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을 엄하게 통치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 전모를 디아도키(Diadochi)의 역사가인 크리두스의 아가타르키메스(Agatharcides of Cridus)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를 상실하였는가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안식일의 관습을 비난한다.

“유대라 불리우는 한 나라가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는 견고하고 커다란 성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은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기를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프톨레미의 수중에 함락되었으며 때에 맞지 않는 그들의 풍습 때문에 혹독한 군주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는 프톨레미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그의 호운과 용맹을 사용하여 코엘레 -수리아(Coele-Syria)와 페니키아(Phoenicia) 전역을 장악하였고, 

모든 신민들을 무력으로 굴복케하여 어떤 이들은 그곳으로 이주시키고 또 어떤 이들은 포로로 잡아갔다.

바로 이 때 그는 십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지경에서 애굽으로 데려갔다.

그는 이들 가운데서 선발된 약 3천명 의 남자들을 무장시켜 그 나라에 파견한 주둔군에 배속시켰다. 

 

애굽의 비석과 파피루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당시 프톨레미의 애굽에는 상당수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다.

물론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시대 이전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이 살기도 하였지만 상당수가 프톨레미 라기(Ptolemy Lagi)에 의하여 애굽으로 이주되었다.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 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다.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 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 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하였지만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본토인을 헬라화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있지 않았다.

프톨레미 정부는 애굽인들로부터 가장 큰 가능한 세입원을 확보 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고 이로 인하여 애굽인들은 압박에서 피할 수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본토인보다 그리스인들을 우등한 민족으로 여겨서 그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한 때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박물관에 의한 동물원과 식물원의 유지와 생체해부와 천문을 연구하는 연구기관들을 통해 많은 학자들의 노력은 과학적 탐구에 집 중되었다.
B.C.319~198년 동안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 었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운이 좋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에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이 상대편의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면서 유대인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비록 헬레니즘이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서는 미약하 였지만 그리스의 영향이 팔레스틴에서는 강하였다.

 

애굽을 통치한 그리스 왕조인 프톨레미 왕조는 다음과 같았다.
프톨레미 1세 (Lagus의 아들) B.C.323-283 

프톨레미 2세 (Philadelphus) B.C.283-247 

프톨레미 3세 (Euergetes) B.C.247-221

프톨레미 4세 (Philopater) B.C.221-203

프톨레미 5세 (Epiphanes) B.C.203~181

프톨레미 6세 (Philometor) B.C. 180~146
프톨레미 7세 (Euergetes 2세) B.C.145~117

 

1. 프톨레미 1세 라구스의 아들(B. C. 323~283)

프톨레미 왕조의 시조는 고대의 위대한 통치자들 중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건축하였던 이가 바로 그였다. 

학문의 후원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고대세계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탁월한 수학자였던 유클리드(Euclid)는 프톨레미의 궁정에서 기하학을 가르쳤다.

 

프톨레미 1세는 그리스인과 마게도냐인으로 구성된 용병을 확보함으로써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충족시켰다. 

나아가 그는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하여 하나의 선단을 보유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세계의 중요한 상업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최초의 팔레스틴 침공시에 프톨레미 1세는 많은 유대인 포로들을 애굽으로 끌어갔으며, 계속 있었던 원정 때마다 그 수효는 수천을 헤아리게 되도록 증가하였다.

무장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병역의 의무를 위하여 여러 곳의 요새들에 배치되었다.

얼마 후에 프톨레미 2세는 이들 유대인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었으며 유대인들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2. 프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B.C.283~247)

알렉산드리아의 항구 앞 파로스(Pharos) 섬 위에 세워진 그 유명한 370~400 피트 높이의 등대는 프톨레미 2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근 1600년이 지난 A.D. 1326년에 파괴되었다. 

프톨레미 2세는 프톨레미 1세와 그의 아내 베르니스(Bernice) 사이 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많은 면에서 프톨레미 2세의 사적이며 가정상의 생활은 동양의 군주들의 형태를 따랐다. 

그는 리시마쿠스의 딸인 알시노에 1세(Arsinoe I)와 결혼하였다.

그 뒤 리시마쿠스의 아내였다가 과부가 된 자기의 친 누이인 알시노에 2세(Arsinoe II)와 결 혼하였다.

그는 권좌에 오를 때 그의 친형제를 살해하였다.

어떤 조사보고에 따르면 프톨레미 필라델푸스는 당시의 가장 부유한 왕들 중의 하나였다.

프톨레미 2세는 프톨레미적 통치자 숭배를 시작하였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애굽은 이탈리아와 상거래를 갖기 시작하였다.

 

프톨레미 2세는 그의 부친보다 학문을 더욱 사랑하였다. 

그는 알렉 산드리아에 동물원을 세워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학문을 진작시켰다. 

그는 에디오피아와 남아프리카에서 동물들을 생포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데려왔다.

그는 그의 부친이 건립한 박물관과 도서관에 많은 새 장서들을 두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프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는 그의 전 통치 기간 중에 애굽의 통치자로 일관하였으며 그의 지시로 모세오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 70인경(Septuagint)을 만들어내는 번역사업을 촉진시켰다.

후에 다시 다루게 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프톨레미가 이 헬라어 번역을 시작하는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는 주장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학문과 그리스 문화의 후원자로서, 인생의 가장 커다란 만족은 이것들이 제공하는 쾌락들의 유익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프톨레미 2세의 확신이었다.

그는 거칠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일찍 늙었고 62 세에 세상을 떠났다.

 

3. 프톨레미 3세 유에르게테스(B.C.247~221)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프톨레미 3세 유에르게테스는 셀류키드 왕조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는 그의 누이인 베르니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테오스(Antiochus Theos)와 한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프톨레미 3세는 학문, 특히 순수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그의 선진들의 선례를 따랐다.

수리천문학자 에라스토스테네스(Erastosthenes)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관리관이었으며,

그의 과학적 연구에 지원을 받았다.

그는 그의 “그림자 계산법" (science of shadows)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였는데 25,000 마일로 생각하였다. 프톨레미 3세의 지원을 받은 또 다른 과학자는 수라구스의 아르키메데스였으며 그는 과학적인 중력과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4. 프톨레미 4세 필로파테르 (B. C. 221~203)
셀류키드 군주인 안티오쿠스 3세 대제는 애굽에 선전포고를 하고 코엘레 -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침공하였다. 프톨레미 4세는 그의 제국의 일부인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B.C. 217년에 라피아(Raphia) 전투에서 안티오쿠스 3세를 패배시키고 그로부터 팔레스틴과 코엘레
-수리아를 애굽의 소속으로 돌려받았다.

 

프톨레미 4세는 그의 승리를 축하하여서 팔레스틴을 포함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 지방들을 여행하였다. 

이 때 그의 부친이 이전에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톨레미 4세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상당한 재물을 헌납하였다.

이 애굽왕은 지성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작동하여 그 안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마비가 되어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귀환하자 그의 수치심과 분한 생각 때문에 애굽에 사는 유대인을 벌하기 위하여 그들 이 어제까지 누려왔던 모든 특권들을 박탈하기로 결심하였다.

 

프톨레미 왕조가 이제까지 베풀었던 호의 때문에 유대인을 미워하였던 비유대인들은 왕의 본을 따라 애굽의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

프톨레미 4세인 필로파테르의 통치 아래서 애굽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그는 색을 탐하고 나태한 왕이었으며 국내에서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고나서도 계속하여 도덕적으로 악하고 사치스럽게 살아갔다.

그에게는 유일하게 어린 후계자가 있었는데 이 아들이 B.C. 205년에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5. 프톨레미 5세(B.C. 203~181)
프톨레미 5세의 등극은 마게도냐와 수리아의 왕이 애굽을 공격하고 변방의 지방들이 그 나라를 에워싸게 하기 위하여 군사동맹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가 팔레스틴을 침공하자 유대인의 상당수가 그의 편에 가담하였다. 

비록 필로파테르가 행한 무도한 대우가 간접적인 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유대 인들이 안티오쿠스 편에 가담하는 이러한 변화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 지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금 후에 스코푸스(Scopus) 장군 휘하의 애굽군대가 예루살렘에서 수리아군을 몰아내고 거룩한 성읍을 한동안 장악하였다.

그 러나 B.C. 19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처음에는 패배를 당하였으나 요르단 계곡의 파네아스(Paneas)에서 애굽군대를 격파함으로써 패배를 만회하고 승리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가 애굽을 공격하려고 계획을 하였을 때 애굽이 자기들의 보호국가라는 로마의 경고에 의하여 그는 제지당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애굽을 공격하기를 중단하고 정략결혼에 의하여 강화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의 딸이 애굽 의 어린 왕과 결혼을 하였고 푀니키아와 팔레스틴은 수리아에게 양도 되어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리아 왕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이 일은 B.C. 198년에 발생하였으며 프톨레미 왕조가 팔레스틴을 처리한 지 122년이 경과된 후였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가 지닌 특징을 기술함에 있어서 밀러 (Dorothy Miller)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프톨레미 왕조의 전 역사, 그리고 사실상 모든 헬라적 왕조들의 역사는 인생과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란 진정한 종교가 없는 지성의 찬연함과 물질적 풍요, 최고의 문명이 도덕이나 선행에 한치의 보탬이 되지 않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당대의 가장 개화된 군주들의 생활과 가족관계에 공통되지 않았던 죄나 악덕은 찾아볼 수가 없는 듯이 보인다.

어머니나 형제, 자매, 자녀, 친구의 생명이 만일 개인적인 욕망이나 정치적 야망의 가도에 놓여있다면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