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3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헌

제17장 필로와 그의 저작들

w.j.lee 2023. 5. 9. 13:31

제17장 필로와 그의 저작들

 

 

1. 필로의 생애

 

온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유대인 철학자 중의 하나이자 헬레니즘의 대표자는 바로 필로(Philo)였다. 

고대의 다른 필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는 항상 필로 유대우스(유대인, Philo Judaeus), 혹은 알렉산 드리아의 필로라고 불리운다.

일반적으로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향력있는 저술가로 꼽힌다.

헬라적 유대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은 해외에 분산된 유대교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필로의 저술에서 큰 도움을 얻는다.

 

어떤 역사가들은 필로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13년에 출생하였다고 하며, 다른 학자들은 B.C. 20년경, 혹은 심지어 B.C. 30년 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의 사망 연대는 클라우디우스 통치(A.D.41~ 54)의 말년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는 평생의 대부분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필로는 예수님, 그리고 성 바울과 동 시대인이었다.

 

필로는 부유하고 유명한 친족관계, 즉 아마도 제사장의 가문에 속하였을 것이다.

그는 진정한 아론의 후예의 혈통을 이은 유대인이었다.

그의 형제인 리시마쿠스(Alexander Lysimachus)는 알라 바흐(alabarch, 또는 arabarch-나일강의 아랍측에 세금을 내는 지도자 적 농부인듯)였다.

필로의 조카 중의 하나는 왕 아그립바 1세의 사위였다.

또 다른 조카인 알렉산더(Tiberius Julius Alexander)는 유대에 파견된 로마측 지방수세관이자 애굽의 사령관이었으며 후에 유대인과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한 장군들 중의 하나로 활약하였다.

 

필로는 뛰어난 유대인 교육을 받았으며 문법, 수사학, 철학, 기하, 시, 음악, 그리고 이방의 학문을 훈련받았다. 

이러한 준비 외에도 그는 계속하여 물리학과 윤리학, 논리학의 세 가지 철학 분야로 연구하 였으며,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헬라의 철학적 학문을 깊이있게 파악하기 보다는 폭넓게 이해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가 로마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필로가 속해 있던 인척관계가 해외에 분산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A.D. 39~40년에 필로는 로마제국 전역에 내려진 황제 숭배의 교시에 강한 반대를 전달하기 위하여 파송된 사절단의 대변인이 되어 로마에 갔다.

필로는 이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데 레가티오네 아드 가이움』 (De Legatione ad Gaium)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연대는 필로의 생애에 대하여 학자들이 명확히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필로와 그의 두 동료가 위임받은 사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즉, 황제 칼리굴라는 황제 숭배에 대한 대표단의 반대의사를 무시하고 필로를 굴욕적으로 대하였으며 일단의 군중들이 그 대표단에 대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애쉬 (Scholem Asch)는 그들의 사명에 대하여 「사도』(The Apostle)에서 논평하고 있다.

 

필로는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잘 알려진 바대로 그 이상의 활동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라적 개념들을 유대교에 적용시키려는 그의 열심과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 이외에도

그는 자신의 국가가 지닌 이상에 대하여 충실한 유대인 귀족이었다.

A.D. 50년에 필로는 또 한번 로마로 여행하였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이 필로의 개인생활에 대하여 알려진 전부이다.

 

필로가 생존하였던 세계사적 시대는 유대와 세계사에 있어서 중요한 신기원과 일치하였다.

이에 대하여 웬리 (Wen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시대는 로마의 제국적 구조의 정착 뿐 아니라 그것의 지배적 사상들 가운데서 고대의 고전적 문명의 종말이 시작된 것과 기독교의 발흥을 목격하였다.

그 시대는 문화의 의미심장한 위치전환(그리스에서 로마로-역자주)에 의하여 일대 변화의 시대로 두드러지게 특징지워졌으며 그 영향은 심지어 지금까지 계속하여 인류를 동원시킨다. 


이 시대는 고대 이교의 종교들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와 기독교의 출현,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발생한 혼합주의 운동에 의하여 특징 지워졌다.

필로 당시의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집정자들은 역사가들이 “세계 주의" (universalism)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하여 관용하였다.

즉, 정치적 틀 속에서 상이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구조와 사상들을 허용하였다.

필로라는 개인 속에서 수많은 동시대의 물결들이 만나고 혼합된 셈이다.

 

 

2. 필로의 작품들

 

아마도 필로는 그의 로마의 첫 여행 이전에 글을 쓴 것 같다. 

그는 그리스 철학적 관념들을 유대교의 역사와, 관습, 신앙들에 조화시키 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이 A.D. 38년 이전에 저술 되었다. 

그의 언어는 최선의 고전적 모델들, 특히 플라톤에서 유래되 었다. 

그리스의 시에서 인용한 것이 그의 작품들에 자주 나타나지만 그리스 철학이 그의 주된 연구였다. 

비록 그는 주로 철학자였지만 38 권에 달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이 모세오경에 대한 계속적인 주석들이거나, 

또는 모세오경에서 취한 정선된 주제들에 대한 산문이 었다. 

따라서 이것은 필로가 성경의 역사를 모세의 때로 거슬러 올라 간다는 점을 의미한다. 

1세기에 현존하였던 두권에 달하는 분량의 작품들은 모세오경과 모세 율법에 대한 주석서들이다.

이 작품들은 교육받은 헬라파에게 주려는 교훈을 위한 것이지 훈련된 초보자를 위하 여의도된 것이 거의 아니었다.

 

필로의 작품은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분량이 적으 면서 아마도 초기에 집필되었을 준수한 철학적 작품:

De aeternitate mundi, Quod omnis probus liber sit, De providentia, De Alexandra;

(2) 모세오경에 대한 주석들:

De opi ficio mundi, De Abrahamo, De Josepho, De decalogo, De specialibus legibus, De virtutibus, De praemiis et poenis;

(3) 역사서 및 변증서: In Flaccum, De legatione ad Gaium, De vita Contemplativa, Apologia pro Iudaeis, De vita Mosis;

(4) 학자들이 필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는 창세기에 대한 풍유적 주석

 

필로는 그의 모세 전기에서 그를 가장 중요한 입법자로 묘사한다. 

성경역사는 De vita Mosis에서 서술되며 다른 작품들은 그의 철학적 개관으로 윤색되어 있다.

Da vita contemplativa에서 필로는 테라퓨태 (Therapeutae)의 종파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명상의 생활에 전념하는 금욕적 은둔자 집단으로서 모세 율법에 풍유적 해석을 취하 였다.

 

De virtutibus는 단편만이 전해지는데 A.D. 1세기의 정치사를 이해하 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 tory)에서 이 작품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하고 있다(II, 5, 1; 후편 5, 6~6;3).

『덕목론』 (De virtutibus)의 다섯권 가운데서 단지 삼권인 플라쿠스에 대하여』 (Against Flaccus)와

사권인 『칼리굴라에 파견된 사절 단』 (Embassy to Caligula)만이 현존한다.

덕목론』의 주된 주제는 유대인에 대한 주된 박해자들, 즉 세야누스, 플라쿠스, 칼리굴라와 아한 빌라도의 비참한 최후를 다룬다.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관념이 이보다 이전에 기록된 유대의 역사서들, 즉 열왕기하 19:36 이하와 마카비 2서 3:22-40;5:6~10;13:4~8;15:28~35에서도 강조되었 다.

 

 

3. 필로의 의도

 

필로는 범상치 않은 혼합물의 용해를 대변한다. 

출신과 양육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며, 알렉산드리아의 거주민으로서는 신비주의자이고, 고도의 교육에 의해서는 헬라적 인문주의자이며, 인간관계와 사회적 지위로는 로마 귀족들의 동료였다.

 

필로는 그의 저작을 통하여 이중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시도하였다.

 

(1) 그는 그리스-로마 사회의 개화된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종교를 정당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교의 사회와 종교가 사양길에 접어든 당시에 그는 “모든 나라의 욕구" 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유대의 신앙을 묘사할 특기할 만한 기회를 가졌다.

(2)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 철학과 학문이 사실은 히브리 종교의 교리에 해악을 끼치거나 상반되지가 않으며 오히려 양자는 실제로 동일한 원리들을 위하여 존립한다는 것을 엄격한 유대교도들에게 보여주고 설득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필로는 절충식 관점, 즉 구약의 신학적 개념들을 그리스 철학원리들과 혼합하는 관점을 채용하였다.

 

카쯔(Katz)는 "필로는 철학이 종교적이 되고 종교가 철학적이 되는 발전을 증언한다"라고 주장한다.

필로가 교리적이며 윤리적 진리를 본국에 유입시키려는 의도로써 철학적으로 말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종교적 본질을 약화시키는 일을 수행하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종교적 확신들도 철학적 유산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필로의 작품과 견해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비록 필로가 유대교의 교훈에 충실하다고 주장하였을지라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미하는 참된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이방인의 철학과 유대인의 신학적 교훈을 융합시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방인의 철학과 유대인의 토라가 모두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융합에 대한 시도를 설명한다.

 

필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들과 같은 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조화된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조직 안에 짜넣었다.

필로에게 있어서 플라톤은 "위인 중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보다 더욱 거룩한 민족은 없으며, 또한 다윗은 "위인 중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세기들의 위대한 현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모세와 선지자, 구약에서, 특히 모든 진리가 발견되는 모세오경에서 얻었다는 것이 필로의 확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인들이 "진리"를 소유한다고도 믿었다.

건전한 철학과 계시된 종교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으며 그들은 단지 진리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필로는 노력하였다.

 

무어 (Moore)는 필로에 대하 여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철학에 하나의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피타고라스의 수자적 요술의 경향을 띤 스토아화된 플라톤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융통성에다가 그의 개인적 절충주의에 포함된 선택의 한 요소로서 삽입된 유대교의 신학을 추가해야만 한다.

 

 

4. 필로의 방법

 

그리스 철학을 유대교에 조화시키기 위하여 이전에 필로와 동일한 종교가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것과 다른 해석학의 채용이 불가피하 였다. 

해석학 역사가들은 그의 것을 "풍유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필로는 진리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자로부터 발견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제한된 의미에서 풍유적 방법이 유대의 랍비들에 의하여 사용된 반면에 필로는 다른 유대인 해석가들보다 더 멀리 나아가 이러 한 유형의 해석원리를 완성시키고 조직화하며 공식화시켰다.

 

융합을 위한 의도가 필로 당시 이전의 300년간 있었음이 분명하다.

헬라적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 학파가 이 방법을 헤시오드와 호머의 신화에 적용하였다.

웬리에 의하면 이 방법의 유리한 점은, 그것이 해석을 “유순하게” 하며 그 시대의 “지적 필연성”이라고 판단되는 것 에 해석을 조절하도록 하는 것이다.

필로는 그의 철학적- 신학적 작품들에서 분명한 기초적 원리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번역본도 문자적으로 영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구약은 한편 문헌적이며 역사적인 면에서 참되며 또 다른 면으로 철학적이며 풍유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풍유적 방법은 성경의 진리들을 생리적이며 심리적이고 윤리적이며 신비적인 교리들과 관련시킬 때 사용되었다.

필로는 심지어 그가 귀하게 여기는 모세오경에서까지 신화적 경향을 허용하였으며

대단한 열심으로 신인동형동성설(神人 同形 同性說,anthropomorphisms)을 반대하며 논쟁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풍유적 의미를 지지함에 있어서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필로의 풍유적 해석의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Sacred Allegories, I, 39에서).

 

왜냐하면 마음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생성시키게 되는데

이로써 비이성적인 부분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부분이 되게 된 다.

마음은 하나님에 의하여 생기를 받게 되고(besouled), 반면에 비 이성적인 부분은 마음에 의하여 생기를 받게 되는데,

이런 도식은 마치 성경이 모세를 지칭하면서 바로에 대하여 하나님이 되었노라고 주저함이 없이 말하는 것과 똑같다.

 

필로는 자신이 해석방법의 발전 역사에서 최상의 수준에 이르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한다. '하 나님의 영감에 힘입어서 나는 감정이 심오하게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 그러자 나는 해석의 풍요로움, 빛으로 인한 기쁨, 가장 강력하게 침투하는 안력, 가장 현저한 힘을 의식하는데 그 수준은 있어야 할 최상의 것이었다.'

다시 말하기를, '나는 지혜의 빛으로 찬란히 빛났 다',

그리고 '모든 지성은 하나님의 영감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우 리가 철학과 종교, 이성주의와 경건, 명백한 그리스적 지성주의와 모호한 동양적 신비주의가 갖는 범상치 않은 혼합을 대하게 된 것에 그 렇게 놀라움이 있지는 않다."

“만일 문자적 의미가 어떤 것을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게, 혹은 이성에 상반되게 한다면 ... 그것은 전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한다.

이 원리를 엄격히 적용하자면 분명히 모든 신인동형동성설적 문구들을 제거 할 뿐 아니라 해석상의 어려움이 극복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곳의 매듭을 잘라버릴 것이다."

 

카츠에 의하면, “필로의 해석학적 방법은 성경에 나타난 인명들의 가장 깊이있는 어원적 연구보다도 자주 풍유적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 역사상의 윤곽이 뚜렷한 인물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분석하려는"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5. 연구의 주제들


필로는 다음의 세 가지 주된 연구 주제에 몰두하였다. 

(1) 하나님의 개념,  (2)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  (3) 인간의 본성.

 

(1) 하나님의 개념
필로가 그 견해를 받아들였던 신플라톤 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는 “철저히 이원론적”이었다(웬리). 

그는 인간의 육체가 살아있기 위하여 영혼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존재는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필요 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의 영혼은 평생에 걸친 육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종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변화하는 세상의 배후에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유추가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확대될 수는 없다. 필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 성질이 결여되신 분이며, 어떠한 명확한 것도 그에 대하여 예언될 수 없다.

신인동형동성설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회피되어야 한다.

 

필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떤 분이신지는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필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플라톤적 개념을 채용하면서 하나님은 세상에 직접 관여하시지 않고 거룩하신, 혹은 중보적인 힘을 통하여 세상을 다루신다고 가르쳤다. 

 

필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하나님은 불변하시어 전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만물이 그 분에게 속해 있다.

아니, 엄격히 말하자면 그 분은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으신다” (웬리가 인용한 내용).

 

이와 같은 하나님의 초월교리가 플라톤 철학의 중요한 매듭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불완전을 구축하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존재가 되신다.

인간들은 이 존재와 필요한 관계에 서 있는 반면에 그 분은 인간 들과의 어떠한 관계에도서 계시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 가야만 하지만 그 분은 매우 먼 곳, 즉 순수한 명상과 완전의 영역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 분이 인간에게 접근하실 수가 없다”(웬리).

 

(2)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매우 멀리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은 이해할 수가 없으며 비물질적이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일시 하는 스토아 철학에반대하는 플라톤적 주장이었다.

필로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중재적  힘들, 또는 관념들(logoi)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고 유지시키신다.

필로는 이러한 중재적인 힘들을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따왔으며 이것들을 의인화시켜서 그의 로고스 교리에 포함시켰다(웬리),

 

하나님에게서 유출된 logoi와 성경의 베네-엘로힘(bene-Elohim), 혹 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 하기는 쉬웠다. 

이들 logoi와 하나님 사이의 정밀한 관계에 대한 필로의 철학에는 어떤 사상적 유동성이 있다.

필로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문구에다 플라톤이 사용한 이데아(idea) 대신에 로고스(logos)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등비 평의 신약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1:1~14에 나오는 로고스 개념을 필로에게서 빌려왔다고 믿고 있다).

 

필로의 로고스 개념에 대하여 레빙켈 (Rehwinkel)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필로의 로고스는 탈굼에 나오는 로고스가 아니며, '원형 이데아' (Archetypal idea)를 말하는 플라톤의 로고스 개념도 아니고, 만물을 압도하는 '세계 이성'으로서의 스토아적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필로의 로고스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여기 저기서 그 내용들을 조금씩 끌어왔을 뿐이다.

그의 로고스는 완벽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었다.

그것은 한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그림자적 비실제의 소리이다."

 

벤트위치 (Bentwich)는 필로의 로고스와 요한복음 서두의 로고스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제1절에서 우리는 필로가 썼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제14절에서 분명하고 예리한 차이가 나타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단어 배후에는 고상한 영적 사상이 있을 수 있겠으나 성육신의 개념은 유대적이 아니며, 철학적인 것이나 필로적인 것도 아니다."

 

필로는 그의 로고스 교리에서 하나님의 내재와 마찬가지로 그의 초월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였다.

과거의 철학과 종교의 역사 속에서 필로는 인간들의 신적 존재의 신비성을 매우 강조함으로 하나님을 세상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유한한 특성들을 신성과 혼합하였던 사실을 주목하였다.

필로는 두 경향을 융합함으로써 범신론과 이원론의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하나님을 묘사함에 있어서 필로는 존귀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어떤 존재를 묘사하였으나(이 점에 있어서 필로는 유대인이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분 명한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였다(이것은 동양적 사고의 영향이다).

하 나님과 그의 피조물을 연결하기 위하여 하나의 중개자가 필요하였다.

 

웬리는 필로의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도 논평하고 있다.

“그러나 필로는 동시대의 사상에 특별한 대조를 이룬다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직접 관련시켜 흠이 없는 그의 순전하심을 보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로고스의 개념은 그것의 인격성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함과 마찬가지로 모호함으로 쌓이게 되었다."

 

결국 과거의 철학적 유산이 그의 해석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따금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필로의 사고를 통제하였으며, 어떤 때는 그가 내재적인 세계 - 이성을 말하는 스토아 철학을 지지하였다.

또한 필로가 갖는 랍비적인 사랑은 그로 하여금 로고스에다가 제사장적 기능,

혹은 사죄하는 자의 기능을 부여토록 하였다.

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도덕 과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대리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감각하고 그 분을 친히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바로 로고스를 통하여, 로고스로 말미암아, 로고스 안에서 있어진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 세상을 위한 대제사장과 중재기도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역시 인간, 특히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받은 인간이다. 

그러나 필로는 결코 로고스를 메시야와 일치시키지 않았다.

필로는 로고스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미정의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필로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탄생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우리들처럼 탄생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양극단의 중간에 위치할 뿐이다”(Guignebert에서 인용).

필로의 개념은 유동적이어서 그의 로고스 개념이 "허황되고 유동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웬리).

 

죄에 대하여 필로는 어느 정도 명확한 관념들을 가졌다. 

악은 하나 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물질, 혹은 저급한 힘, 즉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물질을 작동시키는 불완전한 로고이에서 온다.

로고이는 비록 형체가 없고 스스로는 힘이 없지만 창조를 연출하는 생명의 영을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속성을 지닌 물질에 투입시킨다.

 

(3) 인간론

그의 인간론에서 필로는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보여 준다. 

그는 그리스적 이원론의 용어로 인간을 생각하며 서로 상대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영혼들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우며 오직 그들이 지상에 접근할 때에만 그것들은 상호적 실재성을 지니게 되며 동시에 죄가 물질의 불완전성과 함께 그것들 안에 진입한다.

인간의 영혼은 자력으 로 이러한 타락의 결과를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어떤 선행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charis)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진다.

 

필로는 구원론에 있어서 스토아 철학과 현격한 차이를 가졌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필로의 구원론은 인간의 모든 노력은 물질의 족쇄에서 영혼을 자유케 하 는데 집중되어야 하며 다시 한번 신격에 있었던 그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하여 원래의 순수성을 찾도록 인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궈네베르트(Guignebert)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생명의 목적과 방편은 '행복한 삶'이다.

이것은 아스케시스(askesis- 실천, phusis, mathesis와 함께 교육과정의 3요소를 이룬다고 스토아 학파는 설명한 다-역자주)를 획득하는 것,혹은 물질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황홀경을 체험하게 하거나 직접적인 이해와 증거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해준다. "

 

인간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육체의 감금에서 스스로 풀려나서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야만 한다.

이러한 결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내부에 거하며 하프의 현과 같이 그를 진동시킨다.

“인간은 모든 감각적인 것을 포기하고 욕망과 정욕의 근절을 성취해야 한다.”

도피가 영혼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여기서 필로는 영화롭지 못한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는 유대교의 외경과 커다란 차이를 연출한다.

 

필로의 변증법적인 구조는 현대의 철학자들이 용납할 수 없는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혼합시킨 성경과 철학적 교훈들의 혼합물이었다.

궈네베르트는 말한다.

"순전히 용어상의 교묘함 위에 기초하여 세워진 필로의 변증법적 구조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히 독단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만족시켰으며 그의 방법들은 그의 주변 세계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과 일치되었다."

 

궈네베르트에 의하면 필로의 형이상학적 사상은 여러 가지 흥미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 필로가 해석한 대로의 성경이 로마제국의 비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지성적인 것이 되었다.

(2) 국제적인 마음을 지니게 된 필로는 종족에 관계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모든 의인들의 운명에 축복이 있다고 가르쳤다.

(3) 해외거주의 유대인들은 의식 (ritualism)을 종교에 있어서 팔레스틴의 랍비들 보다 더 낮은 위치로 끌어내렸다.

(4) 필로의 추종자들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는 모세적 관념들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을 약화시켰다.”

필로주의자들은 메시야 왕국의 실현 보다는 “영혼의 운명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졌다."

 

필로(Philo)의 업적이 야기한 계속적인 결과를 평가하기 위하여 마샬(Marshall)은

“필로는 실패되도록 예정된 인과와 투쟁하였다”라는 쉬러(Schuerer, The Jews in the Time of Jesus)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헬레니즘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쇠잔해져 갔다.

대신에 랍비적 유대교가 그 자리를 대치하였다.

헬라적 유대인의 저작들의 보존이 유대인에게는 타당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의 활기찬 포교가 디도 장군이 이룩한 예루살렘 멸망에 의하여 저지되었으며 곧 그리스도인의 선교전략의 실행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발전이 필로의 철학이 잔존하는데는 방해가 되었다.

 

하이네만(F.H. Heinemann)은 필로가 그의 해석방법과 종교철학이 주된 요소들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그의 영향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필로가 어떤 조직을 창출하지 않은 반면 그는 그리스 사상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상이한 새로운 관념들과 원리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서양의 사상이 생각하였던 것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제안하였다.

필로는 계시의 제일 원리와 함께 시작하여 계시의 권위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필로는 구약에서 다음의 교리들을 추론해냄으로써 중세의 신학의 길을 열었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계신다.

(3) 세상은 그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4)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5) 하나님은 우주의 섭리자이시다.

 

필로가 신약의 저자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거나 반대로 그가 신약의 교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통하여 그 이후의 상당한 기독교 신학이 그가 이룬 신학과 철학의 융합에 빚을 졌다.

초대 교회는 필로의 방법 가운데 많은 것을 채용하였다.

초기의 저자들이 비록 그의 교훈들을 심각할만큼 변조시켰을지라도 아직 필로를 연구하는 것은 많은 교부들의 저작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