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3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헌

제18장 요세푸스와 그의 저작들

w.j.lee 2023. 5. 9. 13:31

제18장 요세푸스와 그의 저작들

 

예수님과 사도들 보다 조금 나이어린 동시대인이었던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는 아마도 고대세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의하여 가장 널리 읽혀진 헬라적 유대인 작가였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대중성에 대한 이유 한 가지는 그의 작품이 예수님의 탄생 이전 세기와 기독교의 제1세기 동안에 걸친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사의 보다 넓은 부분을 연구하기 위한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요세푸스는 2천년에 걸친 기간의 연속적이고 완전한 역사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의 작품들은 또한 그리스-로마 역사의 다양한 사건들을 전해주기 때문에도 가치가 있다.

 

중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일대기를 위해서는 이역사가가 쓴 자서전적인 자료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그의 『유대인 전쟁사에서 그의 완전한 전기와 분산적인 언급이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대전쟁 (A.D. 66~70)이 요세푸스의 일생을 거의 균등하게 양분하고 있다.

처음의 33년은 팔레스틴에서의 제사장, 애국자, 장군, 죄수의 모습으로 연속되며 후반부는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지낸 한 시민이자 작가로서의 생애였다.

 

요세푸스는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가 즉위한 해인 A.D. 37~38년에 태어나 2세기 초에 사망하였다. 

본디오 빌라도는 전해에 유대로부터 소환되었으며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곧 새 황제로부터 왕국을 분할받는 동안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요세푸스의 부친의 이름은 마타디아스로 제사장이었으며, 그의 모친은 하스모니안 지도자인 요나단의 후손으로 왕족 출신이었다.

 

그의 양친은 모두 제사장을 배출한 귀족 출신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요세푸스가 뛰어난 교육을 받았고 어린 나이에 유대와 헬라의 학문과 문화를 소개 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양친은 그를 제사장으로 만들 생각을 하였고 매우 어린 나이에 유대의 율법과 문학을 교육시켰다.

그의 특출한 재능 때문에 학식있는 랍비들이 그에게 와서 의견을 물었다.

16세 때 그는 유대인의 지도적 종파,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의 회합에 참석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가입하기 위하여 세 종파 모두의 교훈을 배웠다.

 

그는 또한 광야에 체류하였던 은자 바누스(Benus)와 함께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었다.

율법 연구의 조숙함을 보인 뒤 19세가 되어 그는 바리새파의 일원이 되었다.

A.D. 64년 그의 나이 26세, 혹은 27세 때 그는 로마로 여행하였다가, 로마 통치에 반대한 에세네파의 반란계획에 가담한 죄목으로 로마로 소환된 다수의 제사장들을 석방시키는 일을 성사시켰다.

유명한 유대인 배우이자 네로의 아내가 된 황후 포페아 (Poppea)가 요세푸스를 도와 그의 사명을 성취케 하였다.

로마에 체류하면서 그는 로마의 국력과 문화에 두려움과 존경을 느끼게 되었고 로마의 천하무적의 위력에 크게 감동받았다.

 

요세푸스가 팔레스틴으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권력 행사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의 승리할 수없다고 확신한 요세푸스는 이러한 유대인의 반란을 지지하지 않았다.

유대의 소란한 국내사정은 곧바로 수리아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 (Cestius Gallus)에게 기회를 허용하였다.

갈루스는 거의 예루살렘 정복의 문턱에 도달하였으나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A.D. 66년 로마군단은 벳호론(Bethhoron)의 협로에서 참패의 무릎을 꿇었고 이 패전은 유대인의 반란을 분쇄하기 위하여 로마가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학자들에게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에서 당시에 요세푸스는 갈릴리에 주둔한 유대군의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29세에 이미 제사장에 임명된 요세푸스는 로마군의 최초의 공격지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갈릴리의 행정관에 임명되었다.

A.D.66-68년의 갈릴리 전투의 서전 상황에 대하여는 상이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쉽게 판정하기가 어렵다.

『생애』 편에서 요세푸스는 분 명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예루살렘의 정책과 목적에 대하여 논하였 다.

『생애』에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반란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 유대인 역사가에 대하여 자신의 변호하는 말을 듣게 된다.

『유대 전쟁사』에서 우리는 로마인의 후원 아래 기록된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보다 짧은 진술을 보게 된다.

요세푸스 자신은 다른 두 명의 제사장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의 파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주지사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친구의 영향을 힘입어 요세푸스는 이 직책에 임명받았다.

열심당은 그의 지도에 불만을 가졌으며, 그가 갈릴리를 방어하기 위한 적절한 준비를 수행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그가 그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기다렸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르쿠스(Marcus)는 이 기간의 요세푸스의 생애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그는 그의 군사적 경력에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전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태도와 상황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군에 대항하여 갈릴리 주(province)를 방어하기 위하여 신중하 대처하였다.

B.C. 67년 로마군이 요타파타(Jotapata)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자 요세푸스와 그의 군대는 갈릴리 바다 근처의 어떤 곳으로 피하였다.

47 일 후에 로마의 장군 디도는 요새를 강타하는데 성공하여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요세푸스와 일단의 무리가 동굴을 통하여 피신함으로 그는 협살의 위기에서 교묘히 도피하였다.

 

요세푸스는 로마군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안이 즉위하기 전에 그가 황제가 되리라는 예언을 함으로써 로마의 장군의 환심을 샀다.

베스파시안은 요세푸스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었다가 후에 로마로 불렀으며 그는 여기에서 황제 측근의 지지와 후원을 누렸다.

 

대전쟁 (A.D.66~70) 당시 요세푸스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혐오하였으며 반면에 디도는 그의 처사를 의심하였으며 로마군이 역전으로 고생할 때면 그들은 그가 배반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디도는 승전하여 로마로 귀국할 때 요세푸스는 로마 장군과 동행하였다.

 

요세푸스는 로마에서 30년 이상을 살았지만 이곳의 생활에 대해서 는 거의 전하는 말이 없다. 

그는 플라비우스의 호의를 입고 역시 유대인에 대한 로마군의 승리 역사를 기록하도록 위임받았다.

요세푸스 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베스파시안의 이전 궁전에서 거주 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동일한 황제에 의하여 연금을 받았다.

로마에 거주하면서 요세푸스는 상당수의 승리의 행군을 증언하였다.

그리 스도인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와 십자형을 불러일으킨 네로 황제의 화재에서 새 로마가 일어난 것을 목도한 이외에도 요세푸스는 콜로세움, 베스파시 안과 디도의 광장, 평화의 신전의 건축과 완공을 목격하였다.

 

로마에서의 그의 고요한 생활은 그가 구레네의 유대인 반란에 자금을 조달하였다는 그의 대적들의 고발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지도한 가정 교사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와 대적 관계 에 있는 역사가인 티베리우스의 유스투스(Justus)가 A.D. 1세기 말에 한권의 책을 쓰면서,

요세푸스는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의 전쟁에 책임이 있거나 적어도 그의 고향 도시인 티베리우스가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이러한 공격들은 요세 푸스의 책이 판매되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위협하였다.

자서전은 티베리우스의 유스투스가 행한 이러한 공격들을 논박하려는 요세푸스의 시도였다.

 

A.D. 79년 디도가 사망하자 요세푸스도 그의 후원자를 잃고 저술활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자기 고국을 위한 변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은 그에게 보복하는 의미에서 요세푸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로마에서 동상을 세우고 공공도서관에 그의 책을 비치함으로써, 그의 추억 을 영속시키려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 디도, 도미티안 황제들의 통치하에서 호의적인 궁정생활을 하였다.

가정적으로 요세푸스는 심각한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세번에 걸쳐 결혼을 하였는데 한 부인은 그를 버렸고 다른 한 여인과는 이혼하였다.

 

A.D. 71년부터 죽을 때까지 요세푸스는 저작생활을 시작하여 계속 하였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 유대인의 역사와 종교를 더 잘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팔레스틴에서 배웠던 헬라어로 저술하였으나 양식에 있어서 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경험 있는 저술가들과 협의하였다.

요세푸스가 어떤 구절에다 리비(Livy) 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을 보아 라틴어 지식도 있었던 것 같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거주하는 동안 현존하는 4권의 책을 썼다.

 

 

1. 유대 전쟁사

 

택커레이 (Thackeray)는 본서의 최초의 사본이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북쪽 갈릴리 (Upper Galilee, 혹은 수리아 내륙지방)의 거민들에게 보내어졌다.

이 사본판은 전해지지 않으나 택커레이는 두 가지 추측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첫째, 아람어 번역본이 헬라어 번역본보다 짧다.

둘째, 유대인 독자들은 대전쟁 200년 전으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비상하게 긴 역사 소개를 필요치 않는다.

그 런데 헬라어 사본에는 이 분량이 두 권에 달하고 있다.

 

현존하는 헬라어 사본은 로마제국의 후원자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비록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가 헬라어에서 번역된 것이라고 요세푸스가 말할지라도 그것이 어떤 세계통의 언어로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아피오빔에 반대하여』(Contra Apionem)에서 요세푸스는

"그가 헬라어의 형식을 지키기 위하여 어떤 협력자들을 고용하였다(1:50)”라고 말하고 있다.

이 헬라인 조수들은 헬라어의 형식을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판(new edition)과 동등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채용된 것이다.

『유대 전쟁사』는 부분적으로 출간되었으며 요세푸스와 헤롯 아그립바 2세 사이의 오랜 서신왕래가 그 주체가 되었 다.

완전한 작품은 베스파시안의 통치 말엽인 A.D. 75~79년에 나타 났으며 사본들이 한번에 여러 제국의 후원자들에게 배본되었다.

황제 디도는 그에게 발행을 허락하였다.

디도는 『유대 전쟁사』가 대전쟁의 사실을 확증하는 공식적인 저작이 되기를 열망하였다.

 

본서는 모두 7권으로 구성되었다. 

I.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B.C.175년)에서 헤롯 대왕(B.C. 4년)에 이르는 기간, 

II. 로마군과의 초기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룬 B.C. 4년에서 A.D. 66년에 이 르는 기간,

III. A.D. 67년에 갈릴리에서 발생한 일들,

IV. 예루살렘 포위 때까지 전쟁의 경과,

V. 예루살렘 봉쇄와 함락,

VI. 반란의 여파.

 

요세푸스는 유대인에 대한 로마군의 전쟁행위에 대하여 믿을 만한 정보를 보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 

처음에는 갈릴리에 주둔한 유대군의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예루살렘 함락시에는 로마군의 협조자로서 요세푸스는 예외적으로 신빙성있는 정보 확보의 기회가 있었다. 

예루살렘을 배반한 사람들은 요세푸스가 로마군의 진영에 머무는 동안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제공하였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관찰과 정보수집에 로마 제국의 비망록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다.

 

베버(Wilhelm Weber)는 이 유대인 역사가가 베스파시안 황제의 야전 기록에 기초한 공식기록인 라틴어 비망록(Memoirs)도 접하였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로마군의 조직에 대한 그의 유명한 언급도 이 황제의 기록에서 인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택커레이는 유대 전쟁사의 신빙성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자료들을 접하고, 그의 제국의 후원자들과 헤롯 왕의 막중한 권위가 그를 뒷받침하며, 훌륭한 저작상의 조력자들로 인한 그 이상의 (아마도 더욱 의문스러운) 유리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세푸스의 진술이 일반적인 신뢰를 획득하는데 그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유대 전쟁사"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비망록』이 로마인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더우기 요세푸스가 제국의 후원 아래서 작품을 저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본서가 친로마적 편향을 띠도록 의도하였다. 『유대 전쟁사』와 『생애』는 갈릴리 전투에 대하여 일치된 묘사를 하고 있지 않다.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Der juedische Historiker Flavius Josephus)에서 라크베르 (Laquer)는 요세푸스가 세부 사항들에서 고의적인 실수를 하여 그의 또 다른 후원자인 아그립바 2세 왕에 대한 그의 호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택커레이는 우호적인 환경에서 요세푸스의 젊은 시기에 기록되었던 『유대 전쟁사』가 전반적으로 “훌륭한 책"으로 인정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유대 고대사

 

본서는 『유대 전쟁사』가 출판되고 16년 후에 출판되었다. 

A.D.94 년에 기록된 본서는 요세푸스의 걸작품 (magnum opus)이다.

본서는 교육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위대한 군사적이며 문화적인 업적으 로 감동을 일으키려고 쓰여진 20권에 달하는 책이다.

『유대 고대사』 (The Jewish Antiquities)는 초기에서 A.D. 66년에 이르는 유대의 역사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20권의 내용은 다음의 5가지로 구분된다.

1) I-IX는 선사시대부터 포로기까지

2) XI는 고레스의 시대

3) XII-XIV는 알렉산더대제에서 시작되는 헬레니즘의 발현

4) XVII-XX 는 헤롯 사후에서 A.D. 66년의 전쟁 발발까지.

 

처음 10권은 내용상 창세기에서 다니엘까지를 의역한 것으로 주로 70인역을 따르나, 그 외에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발간된 설화체로 엮어진 판이 쓰여졌다.

페르샤의 통치 시기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그의 주된 자료로서 성경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를 이용하였다.

헬라어 번역본의 아리스테아스 편지와 마카비 1서는 초기 헬라적 기간을 서술하기 위하여 요세푸스가 이용한 자료였다.

제14권에서 20 권에 이르는 하스모니안과 헤롯 왕가의 통치 기간을 서술하기 위하여 요세푸스가 주로 이용한 자료는 다메섹의 니콜라스와 지리학자 스트 라보(Strabo)의 작품들이었다.

 

 

3. 아피온에 반대한 소논문(아피온에 반대하여)

 

본서는 요세푸스의 가장 영감어린 책이다. 

제롬 시대 이전에는 『유대인의 상고시대에 대하여』(Concerning the High Antiquity of the Jerus)로 알려졌었다. 

 

택커레이는 『아피온에 반대하여』(Contra Alpionem)에 대하여 이렇게 평한다.

“본서는 이 저자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매력적인 책이다.

잘 계획된 구상, 대단한 문학적 기교, 그리스 철학과 시에 대한 깊은 지식, 우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더욱 진지하고 감동적인 고국에 대한 열정."

 

본서는 이교의 공격에 대한 유대인의 변증서로서 2권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A.D. 1세기의 반셈족 종교에 대한 흥미로운 안목을 제공한다.

본서에서 저자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데 그는 아피온과 다른 반 유대적 소책자의 저자들이 가하고 있는 비방을 정열적으로 논박한다.

본서의 적극적인 부분은 요세푸스가 윤리적이며 정치적 사고의 모형으로서 묘사하고 있는 모세 율법을 보호하고 있다.

『아피온에 반대하여』는 지금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저자들의 많은 인용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 작품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4. 요세푸스의 생애

 

요세푸스의 이 마지막 저작은 『비타』 (Vita, 생애), 혹은 『자서전』 (Autobiography)류이며, 『유대 고대사』 2판의 부록으로 발표되었다. 

본서는 갈릴리에서의 옛 일을 회상하는 것이며 갈릴리 전투와 연관하여 자신의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이 『자서전』은 그가 60세가 넘어서 요세푸스에 의하여 집필되었다.

본서는 다른 곳에서는 A.D. 100년에 발생한 것으로 암시되고 있는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전기』에 요세푸스는 자기를 변호하면서 역사가 유스투스에게 자신을 밝힌다.

“왜 당신은 황제 베스파시안과 디도가 생존해 있고 아그립바 왕과 그의 모든 왕족들이 아직도 우리 가운데 있는 동안 그 책(역사책)을 발행하지 않고 있는가?"

『자서 전』은 사실은 30년 이전에 갈릴리에서 요세푸스가 행한 행위를 기술한 유스투스의 역사서에 의하여 제기된 공격을 논파하기 위하여 쓰여진 그의 생애의 변증서』(apologia pro vita sua)이다.

 

 

5. 제안된 작품들

 

「유대 고대사의」 권말에서 요세푸스는 그가 저술을 계획하고 있는 두 가지 제목이 있다고 말한다. 

(1) 유대인의 전쟁과 후기 역사의 간략한 개요화,

(2) “하나님과 그의 존재, 율법에 관한 주제로서 4권으로 구성된 책에서 왜 어떤 것이 우리에게는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 는 금해지는가?"

 

이 책들은 결코 완성되지 못하였다.

유대 고대사」 에서 분산된 암시들을 종합해보면 “관습과 동기들”이란 주제의 제2권이 그의 마음 속에서 이미 틀을 잡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택커레이는 이 책이 저술되지 않았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데 그 이 유는 이 책이 알렉산드리아에 팔레스틴의 해석학 관계에 이해의 빛을 비추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H.E. iii, 10)와 다른 학자들이 마카비 4서를 요세푸스의 것으로 간주한 것은 잘못이다.

 

 

6. 동시대인들과 요세푸스의 관계

 

요세푸스는 아마도 여행하며, 그리고 팔레스틴과 로마에서 살면서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였을 것이다. 

(1) 유대인 유대교도들, 

(2) 헬라어를 말하는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 

(3) 로마인들. 동시대인들과의 요세푸스의 관계를 살피면서 택커레이는 또한 유대교, 헬레니 즘, 기독교와 그와의 관계를 평가한다.

 

『유대 전쟁사』를 저술한 원어인 아람어를 요세푸스는 능통하게 사용하였을 것이다.

비록 그가 제사장이며 저술가였지만 에발트(Ewald)와 에더샤임 (Edersheim)의 주장에 동조하는 택커레이는 요세푸스가 “히브리어에 취약”하였다고 믿고 있다.

요세푸스의 작품 가운데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그가 히브리 언어학에 능통하지 못하였음을 보 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이상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유대 고대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서는 히브리어 기록들에서 번역된 것으로 우리의 고대 역사와 제도를 완전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아피온에 반대하여』의 초두에서 요세푸스는 주장한다.

“본서를 개관하면서 ... 나는 단순히 히브리어 책을 헬라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내 편에서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이 야기를 반복하도록 약속함을 밝힌다."

 

요세푸스는 어떤 성경 사본을 사용하였는가? 

택커레이는 이 문제에 대한 특별 연구에서 다니엘서를 중점적으로 탐사하여 요세푸스가 70인경을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얻었다.

“팔경(Octateuch)은 구약의 다 른 책들과 구분된다."

택커레이에 따르면 이 유대인 역사가는 전 저서를 통하여 70인경을 사용하였는데, 에스드라 1서와 마카비 1서와 같은 외경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사본은 그가 죽은지 200년 후에 나타난 안디옥의 루키안(Lucian)이 발행한 70인경에 더 가깝다. "그것은 보다 많은 고대의 자료를 보존한 것으로 알려 져 있으며 "

비판학자들이 "루키안 사본의 원형”이라 불리우는 필사본 에 의존하고 있다.

모세오경 부분에서 70인경이 다소 덜 사용되었다.

택커레이는 여호수아, 사사기, 그리고 룻기에서는 70인경의 이용을 찾을 수 없었으며,

여기서 요세푸스가 어떤 아람어 탈굼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7. 헬레니즘과의 관계

 

이미 지적한 대로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주로 교육받은 그리스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는 훌륭한 문학형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책을 신중하게 저술하였다.

헬레니즘의 성행기에 그리스 저술가들은 코이네 헬라어를 경시하고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의 아틱 헬라어 (the Attic)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요세푸스도 아틱 헬라어 부흥에 동조하여서 당시에 통용되던 코이네 헬라어를 회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의 작품들 가운데서 어떠한 아람어적 요소도 배제하고, 모든 상스러운 말을 근절하며, 70인경 번역본의 어떤 단어들은 보다 문학적인 단어들로 대치하였다.

 

세련된 형식을 취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적 문학형식과 언어에 뛰 어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아피온에 반대하여』(III:50)에서 그는 25년 전에 『유대 전쟁사』의 헬라어판을 준비하면서 그리스적 형 식 때문에 수명의 협력자를 고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유대 전쟁 사』는 고전적 헬라어 - 형식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난-로 저술되었다.

『유대 고대사』는 그 형식이 더욱 더 고르지가 않다.

택커레이는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처음의 5권은 거의가 요세푸스의 작품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이 부분에 속하는 것은 제15~16권 (보조 a로 불리 움)과 제17권, 제18권, 제19권의 1~275(보조 b로 불리움)이 있다. 『기독교의 태두』 (Beginnnigs of Christianity)의 “요세푸스" 연구와 해스팅 (Hasting)의 『성경사전』에 기고한 그의 글, 「인간 요세푸스와 역사가」 (Josephus, The Man and Historian)에서 택커레이는 두 보조 내용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요세푸스는 그의 작품들에서 그리스 문학과 상당히 친숙함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형식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어떤 작가들 다수를 참고했음에 틀림이 없다.

요세푸스는 상당한 정도에까지 투키디데스 (Thucydides)를 모방하였는데, 특히 『유대 고대사』 XVI-XIX에서 뚜렷 이 나타나며 같은 작품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요세푸스 이전의 여러 역사가들 역시 투키디데스에게 상당한 교훈을 취하였다.

그외에 도 요세푸스는 헤로도투스(Herodotus), 크세노폰(Xenophon), 폴리비우 스(Polybius), 할리카르나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nnas- sus)를 인용하였다.

 

그리스의 시인들이 자유롭게 요세푸스의 작품들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는 호머와 비극 작가들(Tragedians), 소포클레스(Sophocles), 유리피데스(Euripides), 그리고 다른 시인들과 친숙함을 보여주었다.

이 유대인 역사가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적 표현과 사상체계가 가득하였다.

그는 유대인의 세 종파,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들과 비교하 였다.

 

 

8. 기독교와 요세푸스의 관계

 

요세푸스는 팔레스틴이나 로마 어느 곳에서건 그리스도의 생애와 기독교의 교훈을 친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요세푸스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끔직한 박해가 두번 있었다. 

요세푸스가 그의 여러 작품들을 저술하고 있던 동안에 기독교는 A.D. 2세기 초에 가졌던 것과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독교의 주장에 무지하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이다.

 

『유대 고대사』에서 그는 세례 요한과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하여 두번 언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하였던 두 인물에 대한 두 곳의 언급이 사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 고대사』 XVII 116 ~119에서 요세푸스는 분봉왕 요한에 의하여 세례 요한이 투옥되어 살해된 것을 묘사하였다. 

그 내용이 복음서들의 것과 상이하기는 하지만 구태여 모순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서 기자들의 내용을 보충한다고 봐야 한다.

 

다른 곳인 『유대 고대사』 XX. 200-203에서 최근에 대제사장에 임명된 아나누스(Ananus)가 그리스도라 불리운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산헤드린 공회에 출두시켜 그가 율법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여 돌에 맞아 죽는 형을 언도받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아나누스의 이러한 행위가 많은 유대인 고관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그들은 아그립바 왕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어 대제사장이 장래에는 그러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주기를 청원하였다.

어떤 이들은 또한 새로운 지방 총독 알비누스(Albinus)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로 오는 도중에 그에게 불평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아나누스는 알비누스에게 견책을 당하고 아그립바 왕에 의하여 그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유대 고대사』 X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많은 논란이 여기에 대하여 있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어떤 그리스도인의 삽입으로 보아 거절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것의 진정성을 옹호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가 한 인간으로 불리워야 한다면 이제까지 예수는 현명한 인간으로 살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이로운 행동을 실행한 자였고, 기쁨으로 진리를 받는 자들의 선생이었으며, 많은 유대인과 또한 그리 스 여러 국가의 많은 사람들도 그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리 스도였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유력한 인물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빌라도가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자 한 때 그를 사랑하였던 자들 이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들 앞에 3일만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은 그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들과 일만가지 이적들이-대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이름에서 명칭을 딴 그리스도인이란 민족(혹은 "지파”)은 소멸하지 않고 있다(『고대사』. XL 63 이하).

 

영국의 버키트(Burkitt)와 독일의 하르낙(Harnack)은 이 내용의 진정성을 변호하였다.

이것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쉬러 (Schürer), 니제 (Niese), 노르멘(Norden)이며, 이들은 바울의 작품들이 그리스도인 들의 노력을 통하여 현대에 전해졌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