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3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헌

제14장 외경의 각론

w.j.lee 2023. 5. 9. 13:35

제14장 외경의 각론

 

 

1. 에스드라 1서

 

외경의 첫번째 책은 개신교도에게는 에스드라 1서(1 Esdras)로 알려 져 있으며, 

이것은 일명 에스라의 헬라어형에서 유래되었고, 벌게이 트를 사용하는 이에게는 에스드라 3서로 알려져 있다. 

벌게이트에서 정경인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에스드라 1서와 에스드라 2서로 되 어 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에스드라 1서는 로마 가톨릭에 의하여 2 차적인 정경으로 용인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 한 권이다. 

에스드라 1 서는 벌게이트의 클레멘트판(the Clementine edition)의 말미에 위치되어 있다.

에스드라 1서는 아마도 개신교의 목록에서는 맨 처음이었을 텐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명칭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의 정경과 외경 사이의 적절한 연결을 이룬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고찰해 보듯이 학계에서 이 책에 대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 

카우취(Kautzsch)의 독일어판의 외경과 최근의 다수 독일어판(아이스펠트를 포함해서)에서 에스드라 1서 대신에 에스드라 3서라는 벌게이트의 명칭을 부활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중적인 애매 함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을 “헬라어 에스드라”라고 부른다.

 

에스드라 1서는 많은 언어와 많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당혹스런 문제를 제기한다.

에스드라 1서는 본질적으로 다음에서 보여주듯이 역대하 35:1~36:23, 정경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전체가 말하는 내용을 재진술하고 있다.

 

에스드라 1서 1장 = 역대하 25, 36장
에스드라 1서 2:1~14 = 에스라 1장
에스드라 1서 2:15~25 = 에스라 4:7~24
에스드라 1서 3:1~5:5 = 이 책의 독창적 부분
에스드라 1서 6,7장 = 에스라 5,6장
에스드라 1서 8:1~9:36 = 에스라 7~10장
에스드라 1서 9:37~55 = 느헤미야 7:73-8:13

 

구약과 일치되는 에스드라 1서의 부분은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서 사본으로부터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책을 수록한 다른 성경들로부터 번역되었다고 여겨진다.

에스드라 1서의 헬라어역은 에스라 - 느헤미야의 70인경 번역보다 더 나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1) 본서의 내용

1 :    1 ~ 24    요시아의 유월절
        25~33     므깃도의 죽음
         34-58      B.C. 587년의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왕들의 통치
2 :     1~15      B.C. 538년의 예루살렘 재건을 명한 고레스의 조서

        16~30     아닥사스다에게 보낸 사마리아인의 편지와 B.C. 520년의 다리오의 치세 때까지 중지된 성전의 재건
3 : 1~ 4:46     다른 두 청년과의 경합에서 이룬 스룹바벨의 승리
4 : 47~5:3     유대인의 귀환과 성전 재건의 허락
5 :    4~46       귀환자의 명단
       46-65      성전재건
       66-73
    사마리아인의 방해공작
6 :     1~6      성전건축의 재개
       7~34      시신족(Sisinnes)의 편지와 다리오의 호의적인 반응
7 :  1~15      성전의 봉헌과 유월절
8 : 1~9:36    B.C. 458년의 아닥사스다의 허락으로 인한 에스라의 귀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귀환및 이방여인과의 결혼 금지.
9 : 37~55     B.C. 444년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을 낭독함

 

상기한 자료들의 배열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정경과 두 가지 점에서 상이하다.

 

(1) 페르샤 왕들의 뒤바뀐 순서, 비록 에스드라 1서가 2:1 이하에서 고레스로 올바르게 시작하고 있지만 순서가 바뀌어 있고 실제로는 고레스(B.C 533-529), 다리오 1세 (B.C. 522-486), 아닥사스다 1세 (B.C. 465-425) 순이다.

(2) 느헤미야 1:1~7:22을 무시하고 에스라에 계속하여 그 이후의 것만을 말한다.

 

이것은 에스드라 1서에서 취급된 사건들은 B.C. 621년부터 B.C. 444년, 즉 요시아에 의하여 지켜진 유월절부터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 낭독 때까지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에스드라 1서는 정경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사건들 이외에 더 많은 것을 서술하고 있다. 

(1) 요시아가 주장한 유월절의 이야기와 B.C. 587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에 따르는 사건들의 묘사가 있으며, 이것의 자료로 역대하 25~26장을 사용한다.

(2) 5:1~5:4(에스드라 1서의)는 B.C. 538년 고레스에 의하여 주권이 회복된 후에 유대인의 지도자가 된 스룹바벨의 등장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언급을 하고 있다.

이 구절은 스룹바벨이 페르샤 왕 다리오를 섬기는 신하였을 때 어떻게 다른 두 청년들과 재담 경험에 들어갔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세 청년이 경합하게 된 주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무엇인가?"였다. 

한 청년은 술이 가장 강한 힘이라고 하였고, 두번째 청년은 왕이 가장 강하다고 하였으나, 세번째인 스룹바벨은 여인이 강하지만 진리가 최강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오래가며 항상 강하고,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극복한다”(4:38).

청중이 이 말을 듣고 외치기를 “크도다 진리여, 만유 중에 강하도다” (4:41).

라틴어로는 “Magna est veritas, et praevalet"라고 한다.

 

스룹바벨의 답변이 최선의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그 성과 성전을 재건시키도록 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다리오는 이 청을 수락하였다.

많은 권위자들은 세 호위병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정경 에스라의 2장 서두 앞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 아라비아의 야담)의 독자에게 잘 알려진 문학형식의 표본이 된다.

 

외경인 에스드라 1서와 정경인 에스라 느헤미야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이 세 책이 어떻게 관계되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났다.

요세푸스가 에스드라 1서를 보았음에 틀림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외경에서 발견되는 그대로 스룹바벨의 등장에 대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드라 1서에 기록된 스룹바벨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고레스 때에 스룹바벨이 팔레스틴에 귀환하였다는 정경 에스라의 이야기에 상충된다.

왜냐하면 에스드라 1서에서 그는 B.C. 522년에는 바벨론에 있었으며 B.C. 520년까지는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라 4장에 나타나는 아닥사스다의 편지 내용이 에스드라 1서에 수록된 자료에 우선한다(에스라 4:7~24는 에스드라 1서 2:16~30과 동일하다).

 

(2) 정경과 본서의 관계
세권의 관계가 상이하게 해석되고 있다. 

즉, 로버트(A. Robert)는 에스드라 1서 (벌게이트의 에스드라 3서)가 그 자료로서 에스라-느헤 미야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에스드라 1서가 완전히 불명확 하고 일치하지 않는 독자적인 세계의 사본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외스틸리 (Oesterley)는 외경 에스드라 1서에 묘사된 일련의 사건들의 정경인 에스라-느헤미야의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외스털리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에스드라 1서가 최초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의 원형이 손상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이 심하게 망가져 있다는 점에서 추측된다.

외경인 에스드라에 의하면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8:9에 묘사된 것처럼 율법의 낭독에 있어서 에스라와 함께 협력하지 않는다(9:37~35).

 

학자들은 70인경의 에스드라 1서, 또는 벌게이트의 에스드라 3서의 존재에 의하여 당혹하고 있다. 

멘탄(Dentan)은 특별히 70인경이 두 권의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를

파라리포메나 1서와 2서(1 and 2 Paralipomena)와 에스드라라는 책명으로 잘 번역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그것은 다수의 신비를 제기하는 “책 가운데 한 고아"라고 부른다.

 

메쯔거(Metzger)는 에스드라 1서와,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야기 사이의 가능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라 1서는 정경의 이야기들의 자료일 수 있으며, 혹은 에스라-느헤미야가 에스드라 1서에 의하여 수정되었을 수 있으 며, 혹은 양자가 모두 공통적으로 독창적일 수도 있다.

 

(3) 본서의 연대와 언어
본서의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것으로 보아 A.D. 100년 이후가 될 수는 없으며 그 이전으로 생각되어 지는데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B.C. 3세기로 추정하기까지 한다. 본서의 언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였다.

 

 

2. 에스드라 2서

 

어떤 권위있는 학자들은 에스드라 2서를 외경 가운데 두지만 다른 이들은 위경 가운데 두기도 한다. 

이 책은 영어 번역본의 외경문헌들 가운데서 발견되며 1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경 가운데서는 묵시문학의 장르에 속하는 유일한 책이다.

또한 외경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정경상의 묵시록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어떤 학자들은 에스드라 2서가 매우 매력적인 빛으로 유대교의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에스드라 2서가 모든 외경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일 것이다.

 

영어역의 외경에서 에스드라 1서는 70인경의 에스드라 A, 또는 벌게이트의 부록에 실린 에스드라 3서를 말하고 에스드라 2서는 주로 에스라 묵시록(the Ezra Apocalypse), 또는 벌게이트의 부록에 실린 에스드라 4서가 된다.

따라서 영어에서는 개신교의 에스드라란 명칭은 외경에 속한다.

 

에스드라 2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3~14장으로

일반적으로 에스라 묵시록으로 알려진 것이며 앞에 2장, 뒤에 2장 이 따른다.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이 네 장이 에스라의 묵시록의 일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책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학자들마저도 에스드라 2서가 사상들의 집결인 것을 인정한다.

 

라그레인지(Lagrange)는 모세적 요소가 문헌 속에서가 아닌 사상들 속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기 앞에 어떤 전승의 요소들을 두었으며 이것들을 융합시키거나 자기의 주된 주제와 적합하지 않은 것들 을 삭제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아마도 B.C. 5세기 중엽에 살았을 서기관 에스라의 입을 통하여 구술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어느 부분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며 현재의 형태는 A.D. 1세기 말엽에 형성되 었으리라고 여겨진다.

 

(1) 본서의 내용

1장과 2장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서론으로 간주되며 마지막 두 장은 어떤 유대인의 비난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대인의 자료는 비록 이스 라엘이 다른 국가들 보다 더 악하지도 않고, 

또한 분명히 바벨론처럼 악하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대단히 고난을 당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왜 그렇게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고 있었는가란 질문을 다루고 있다.

 

에스드라 2서는 예루살렘 멸망 후 30년(우리의 연대계산에 따르면 B.C. 557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곱 가지 환상을 수록하고 있다.

이 환상들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 환상( 3:1~5:13)

B.C. 558년 바벨론에 있던 에스라는 이방인들이 번성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불평하며 그 이유를 질문한다.

천사 우리엘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의 불가해성을 전한다.

악한 자들은 정한 때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이 곧 끝날 것이다.

여기서 그 종국에 선행하는 표적이 묘사되고 있다.

그런 후 에스라는 7일간 금식하며 2차 계시를 준비한다.

 

제2차 환상(5:14~6:34)

이 부분의 교훈은 제1차 환상과 유사하다.

에스라는 다시 이스라엘의 모진 운명을 불평하고 책망을 받는다.

천사는 다가오는 종국의 표적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방법들이 의로움을 보여준다.

 

제3차 환상(6:35~9:25)

에스드라 2서의 처음 네번의 환상들은 살라디엘의 묵시록(the Salathiel Apocalypse)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절정기는 제3차 환상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에스라는 최종적인 형국에 처한 이스라엘의 고난에 대한 문제를 토론한다.

세상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면 왜 이스라엘이 자기의 유업을 박탈당하고 있는가?

에스라와 천사 사이의 논쟁이 있은 후에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세상의 종말의 도래에 대한 선언이 있어진다.

 

이 문단은 69개의 절로 된 하나의 단편을 이루며 영어개정역 (Revised English Version)에는 나오지만 흠정역이나 대다수의 라틴어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다가 벤슬리(Bensly)에 의하여 재개되었다.

이것은 벌게이트의 35절과 36절 사이의 공백을 메꾸며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다룬다.

 

제4차 환상(9:26~10:59)

에스라는 자기의 아들을 잃고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에스라는 그녀에게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우는 대신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사라지자 그녀의 자리에 하나의 성이 세워졌다.

그러자 천사는 에스라에게 여인은 시몬이며, 아들은 솔로몬의 성전이고, 성읍은 새 예루살렘임을 알려준다.

 

제5차 환상(10: 60~12:29)

이것은 도망하여 땅을 다스리며 3개의 머리와 12개의 날개를 가진 독수리에 대한 환상이다.

그의 통치는 각각의 날개와 머리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중국에 가서 독수리는 오직 두개의 머리만 남게 되고 그의 멸망을 예고하는 사자의 맹공격을 받는다.

사자가 말하는 대로 불이 독수리의 몸을 불태운다.

에스라는 이 독수리가 다니엘이 본 네번째 제국, 즉 로마제국으로서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을 듣는다.

 

제6차 환상(12:40~13:58)

이 환상 가운데, 한 사람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솟아오른다.

그의 모습을 보고는 만물이 경련하며 그의 음성을 듣는 자마다 불로 인하여 멸망을 당한다.

그가 자기의 대적들을 다 소멸한 뒤에 이 동일인물이 평화로운 군중을 자기에게로 모으는데 어떤 이들은 기꺼이 나아오고 다른 이들은 억지로 끌려온다.

바다로부터 온 사람은 선재한 메시야(the preexistent Messiah)이시며, 그를 대항하기 위하여 나오는 자들은 이방인이고, 메시야의 도래를 기뻐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지파였음을 에스라는 듣게 된다.

 

제7차 환상(14:1~48)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경고받은 에스라 는 지혜의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따라서 그는 64권의 책을 저술하고 그 가운데서 24권을 출판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이 책들은 히브리 구약 정경인 24권에 대한 참고도서로 가능하였다.

94권 가운 데 50권의 책은 난해한 성격 때문에 감추도록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에스라에게 5명의 서기관을 데려다주시고 40일 동안에 그가 모든 책을 저술할 수 있게 하셨다.

에스라는 자기에게 위탁된 임무를 완수 한다.

왁스맨(Waxman)은 에스라 4서의 목적이 외경과 위경 작품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서라고 주장한다. 

 

15장과 16장은 이 책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부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바벨론과 아시아, 애굽에 대한 탄핵이 발견되며 그 가운데 장차 세상에 임할 공포와 환란에 대한 선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택하신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부록은 외스텔리에 의하여 A. D. 240년에서 270년 사이에 되어진 것으로 주장된다.

 

(2) 본서의 언어
본서는 라틴어역과 다수의 동양언어 역본들, 즉 수리아어역, 에디오피아어역, 알메니아어역에 보존되어 있다.

이 역본들은 다수의 권위자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히브리어 원본에 근거한 헬라어 역본에서 유래된 것이다.

왁스맨은 본서가 순전한 히브리어 결집이며 순수한 유대인의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몇 학자들은 아랍어 원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어 역본은 신빙성이 적은데 라틴어 역본에 근거하였고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7:28~29과 같이 많은 가필을 포함하고 있다.

 

(3) 본서의 저작 연대
저작 시기에 대하여는 다양한 연대추정이 되고 있다. 왁스맨은 이 연대를 거의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황제에 대한 저자의 식견과 마찬가지로 로마인에 대한 계속적인 언급과 성전 파괴, 이 모든 것이 1세기 말, 즉 A. D. 81년에서 86년의 기간을 지적한다.

박스(Canon Box)는 3~14장의 편집시기를 A. D. 100년에서 135년 사이로 잡으며,

살라디엘 부분의 연대는 A. D. 100년, 독수리 환상의 연대는 A. D. 81년에서 96년까지, 혹은 A. D. 69~79년도 가 능하다고 여기며,

인자의 환상 연대는 A. D. 70년 이전, 에스라 전설은 70년 이후, 그리고 옛 에스라 부분은 본 연대의 이전으로 추정한다.

이 책의 전체가 발간된 것은 내용이 매우 유사한 바룩 2서와 동시대이다.

 

 

3. 유딧

 

유딧(Judith)의 내용은 두 가지 번역본을 통하여 현재까지 전해진다.

그 가운데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홀로페르네스(Holofernes)는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앗수르 왕에게 반역하는 봉신들을 정벌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대군을 거느린 홀로페르네스는 길리기아(시실리,Cilicia),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다메섹 지역을 평정하였다. 

북부 팔레스틴을 가는 도중에 그는 행군로에 있는 모든 것을 황폐케 하였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유대 전역에 대한 다가오는 홀로페 르네스의 공격에 항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그 장군의 승리에 대한 공포를 느꼈으며, 스스로 영적으로는 기도와 금식으로, 육적으로는 그들의 군사를 동원함으로 준비하였다.

 

이야기는 이어서 베툴리아(Bethulia)의 포위에 집중이 된다. 

34일이 지나자 주민들은 식수가 현격히 고갈되어 가기 때문에 항복할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1~7장).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게 된 주민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장로 가운데 하나인 오즈알(Ozear)은 구원이 올 것을 약속하면서 5일만 더 지탱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8:1) 빼어난 미모와 경건함으로 잘 알려진 3년이 넘게 과부로 지낸 유딧이 등장한다.

그녀는 도시가 항복하리라는 장로들의 계획을 듣고 격노하여 외쳤다.

“하나님은 위협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시오”(8:16).

그녀는 적군을 패퇴시킬 계책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다.

 

9장은 그녀가 홀로페르네스의 진영에 가기 전에 드리는 그녀의 기도를 적고 있다.

그녀는 온갖 화장술로 자신을 치장한 뒤에 하녀와 함께 적군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의 경비병에게 자기는 멸망을 당할 도시에서 도망해 온 히브리 여인인데 그 도시를 함락시킬 방법을 알려주러 왔다고 소개하였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신실한 동안은 유대인의 성읍이 함락 되지 않으리라는 아키올의 이전 보고내용을 확신시켜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금지된 짐승을 잡아 먹으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성읍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0:14~11: 23).

유딧은 장군의 식탁에서 신선한 음식을 대접받았으나 그녀의 하녀가 가져온 음식만을 먹도록 허용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녀는 또한 목욕과 기도를 위하여 그녀의 하녀와 함께 진 밖으로 나가도록 허락 받았다.

이러한 일을 유딧은 3일밤 동안 하였다.

마침내 유닛이 계획 한 일을 실행할 때가 왔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그녀가 최대한 즐겁기를 원했다.

또 다시 그녀는 부정한 음식 먹기를 거절하고 하녀가 준비해간 음식만을 먹는다.

술에 만취한 홀로 페르네스와 단 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후에 홀로페르네스의 검을 취하여 그의 목을 벤다.

 그녀는 준비해간 가방에 그의 머리를 넣고, 이전 밤에 하였던 대로 진지 밖의 파수병을 지나서 걸었다.

 

유닛과 그녀의 하녀가 베툴리아 성에 도착한 후에 그녀는 홀로페르 네스의 머리를 들어보였다. 

13:14에서 그녀는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리게 한다.

다음날 포위당하였던 유대인들은 적군을 격퇴시킨다.

결론부에서 저자 는 유딧의 승리를 전하며 그녀의 감사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다(15:9 ~16 25).

 

비록 이야기가 실제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이 보다 짧은 다른 번역본에서 그것은 다른 배경에서 전개된다.

느부갓네살의 궁전이 셀류쿠스에 의하여 취하여지며 베툴리아가 아닌 예루살렘이 사건의 현장이 된 다.

 

(1) 본서의 언어
유닛의 원본이 현존하지 않는다. 

다수의 학자들은 헬라어 번역본에 나타난 어떤 특징들이 본서가 아마도 히브리어로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믿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아람어로 쓰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닛의 헬라어 번역본이 알렉산드리아 사본(A)과 바티칸 사본(B), 시내 사본(S)과 같이 귀중한 고정본 속에서 보존되어 있다.

제롬이 하루 밤에 완성하였다는 벌게이트의 라틴어 번역본은 이 번역이 아람어 사본에서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2) 본서의 결집 시기
학자들 간에 본서가 저술된 시기에 대한 견해가 각각 다르다. 

그 가운데 B. C. 175년에서 110년 사이의 연대가 추정되고 있다. 

외스텔 리는 마카비 일가의 투쟁 시기, 특별히 요나단이 지도권을 장악하였던 시기(B. C. 160~159), 또한 성전을 정통파가 장악하였던 때로 추 정한다. 

(3) 본서의 목적
유딧이 역사서가 아닌 것은 매우 분명하다. 

유닛은 이방인의 공격에 직면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율법에 충실하기를 격려하기 위하여 저술된 것이다.

본서의 목적은 커다란 국가적 역경의 시기에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고양시키려는 것이었음이 자명하다.

 

 

4. 토비트

 

토비트(the Book of Tobit)는 로마 가톨릭이 그들의 구약 가운데 2 차적 정경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 책이다. 

히포(Hippo, A. D. 393년) 와 칼타고(Carthage, A. D. 419년) 회의는 본서를 정경 가운데 하나로 결정하였다.

트렌트 회의(the Council of Trent)는 이전의 종교회의들에 의하여 취해진 결정들을 재확인하였다.

쿰란의 제4 동굴에 하나의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과 두개의 아람어 맛소라 사본이 발견된 것은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본서가 읽혀지고 유대인들에 의하여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양한 번역본들이 회람되었다는 사실이 증거하고 있듯이 본서는 고대에는 널리 유포되었다.

헬라어의 세개의 고정본, 라틴어의 두개의 고정본, 수리아어의 두개의 고정본, 히브리어의 네개의 고정본, 그리고 에디오피아어의 한개의 고정본 속에 들어 있다.

 

(1) 본서의 내용
토비트는 경건한 사람인 토비트(Tobit, 어떤 로마 가톨릭 저술가들은 토비아스-Tobias라 부름)의 초기 생애에 대한 요약적인 설명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동일한 날에 니느웨에서 토비트가(2:1~3: 6), 그리고 니느웨에 사는 라구엘(Raguel)의 딸 사라(Sarah, 3:7~ 15)가 어려운 시련에 봉착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이야기, 일종의 이중적 진행의 이야기가(diptych)가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 라파엘을 보내시어 그들을 돕게 하신다(3:167 이하). 

이 때부터 이야기의 본론부가 시작된다. 

 

토비트의 아들 토비아스는 아버지로부터 부탁을 받아 메디아의 라게스(Rages)에 가서 친척인 가바엘(Gabael)에게 맡겨둔 막대한 돈을 가져오게 된다.

라파엘은 인도자가 필요한 토비아스를 돕는다(5:1~ 22).

그들은 티그리스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데 아자랴(Azar- iah 천사 라파엘의 별명)의 제안으로 그 물고기의 심장과 간과 쓸개를 떼어 갖는다.

엑바타나(Ecbatana)에서 그들은 사라의 아버지인 라구엘을 방문한다.

토비아스는 사라를 만나고 그녀에게 결혼해 줄 것을 청하지만 그녀의 이전의 모든 구혼자와 남편들이 어떻게 마귀에게 살해당했는지를 듣게 된다.

토비아스는 어떻게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아자랴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사라에게 결혼할 것을 계속 간청한다.

결혼날 밤 토비아스는 지시를 따라 신방에서 냄새가 나도록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태우고 그 악령을 애굽의 아주 먼 곳으 로 쫓아버린다.

이 일 후에 토비아스는 아자랴를 라게스로 보내어 그의 돈을 자기의 친척에게서 가져오게 하고 그의 장인이 승락한 결혼 잔치를 준비한다(9장).

 

토비아스와 사라가 니느웨로 귀향할 때 토비트가 마귀 아스모데우스(Asmodeus)를 쫓는데 사용하였던 심장과 간을 제공한 같은 물고기의 쓸개를 사용하여 시력이 회복된다.

사라가 토비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토비트는

그의 시력을 회복하여 성문 곁에서 그녀의 며느리를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7일 동안 혼인잔치가 다시 배설된다.

마침내 토비트와 토비아스가 그들의 행복을 주로 담당하였던 아자랴에게 보상하려고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은인이 천사 라파엘이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기도를 대언하는 일곱 천사 중의 하나인 것을 알게 된다.

본서는 감사의 노래와 토비아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한 아버지의 마지막 교훈으로 끝을 맺으며 토비아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행하고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장수한다.

 

(2) 본서의 목적
현대의 로마 가톨릭 학자들은 토비트의 목적이 역사서가 아닌 "건덕에 유익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오류들과 연대기적 곡해들은 저자가 도덕적인 이야기, 즉 적절한 훈계들을 삽입시킨 이야기임 (4:3~21; 12:6~15;14:8~11기타 여러 곳)을 지적해준다고 믿어진다.

토비트의 의도는 선한 사람이 인내하여야 하는 고난과 역경을 신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믿음에 충실하기만 하면 결국 하나님이 그를 세상적인 좋은 것들로 축복하실 것이다(3:17; 4:21; 11:17).

이러한 주제와 함께 율법 준수의 가치 (1:4~9, 12;4:6), 기도의 중요성 (3:1 이하, 11 이하, 24, 벌게이트), 자선(3:16~18, 벌게이트 4:13;6:16~22), 자비의 행위(1:15, 벌게이트 2:1~2), 연보함의 우월성(4:7-12 12 :8하~9:19~20), 기타 죽은 자에 대한 존경표시에 관한 복합적인 교훈들이 있다.

 

본서는 성경에 사용된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구약에 대한 많은 암시가 있다. 비록 원본이 현존하지 않을지라도 다수의 학자들은 이론적으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원본에 사용된 언어라는데 의견의 일치 를 갖고 있다.

헬라어 사본들 가운데는 몇 가지 상이점들이 있다.

시내 사본(S)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개정본인 바티칸 사본(B)과 대조 할 때 가장 긴 본문을 갖고 있다.

제롬은 그의 벌게이트에 있는 번역본을 아람어 사본에서 번역하였다.

 

(3) 본서와 이교의 자료들
굳스피드와 페랄(Ferrar), 메쯔거, 그 밖의 학자들은 토비트의 저자  이교의 자료들을 사용하였다고 믿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토비트가 애굽인이 지은 『콘스의 소책자』(Tractate of Khons)를 방해하기 위하여 저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한 마귀가 테베의 신의 도움 을 받은 어떤 여인에 의하여 쫓겨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히칼의 이야기 (the Story of Achikar)가 토비트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추정도 있다. 

터무니 없이 주장되는 또 다른 자료는 “고마운 인간" (The Grateful Man)이란 이야기가 있다.

 

외국 자료들이 토비트 저자에게 미친 영향의 정도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상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페르샤의 영향이 나타난 증거상으로 지대하다고 믿고 있다.

천사와 마귀에 대한 언급이 조로아스터 교의 영향을 받은 유대교의 새로운 발전이라는 엉뚱한 주장도 있다.

아스모데우스는 페르샤의 마귀인 애쉬마 대바(Aeshma Daeva)라고 생각되어진다.

토비아스의 여행길에 그를 따라간 개는 조로아스터교의 스라오사(Sraosha)와 함께 하던 개를 연상케 한다.

유대교에서 개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짐승이며 불결하다고 여겨졌다.

이 저자는 애굽에서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때 헬라 문화의 영향 속에 살았던 유대인이었음에 틀림없으며 그는 허구적인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경향 들을 융합시켰다.

 

어떤 로마 가톨릭 학자들은 토비트의 주된 자료는 창세기이며

그 안에 있는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믿고 있다.

창세기 24장은 엘리에셀 이야기와 이삭의 결혼을 말하며

레베카는 토비아스의 여행과 사라와의 여행 이야기의 모델역할을 하였다.

라파엘은 창세기 24: 7, 40에 나오는 천사로서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찾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여호와로부터 파송된 천사이다.

 

(4) 본서의 저작 시기
토비트는 외경 가운데서 가장 일찍 저술된 책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학자들간에 결집의 시기에 대한 주장이 상이하지만 대개 B.C. 250~ 175로 추정되고 있다.

메쯔거는 그것이 B.C. 190~170년 경의 어떤 경건한 유대인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주장한다.

클라크(Clarke)는 저작연대를 B.C. 3세기와 2세기 초로 잡는다. 12) 왁스맨은 본서가 헤롯성전이 건축되기 전,

즉 B.C. 20년 경에 저술되었다고 주장한다.

B.C. 3세기 말엽에 애굽에 사는 한 경건한 유대인에 의하여 토비트가 저술되었다는 이론도 발전되어 왔다.

 

 

5. 에스더 부록

 

구약의 에스더는 하만의 교사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매우 국수적인 책이다. 

그러나 에스더의 영웅적인 행동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페르샤 제국 내의 그들의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받을 수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75,000명을 주살한다.

정경 에스더는 하나님의 성호가 언급되지 않고 반면에 페르샤 왕의 이름이 175회 거론된다.

기도에 대하여 한 마디의 언급이 없으며, 사  종교에 대하여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는다.

 

외경인 에스더는 정경을 보충할 목적을 띠고 있다.

에스더 10장에 10절을 추가하는 외에도 외경 에스더는 6장이 더 첨가되었다.

에스더 부록(the Additions to Esther)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자료들은

벨의 이야기 (the Episode of Bel)나 수산나 이야기 (the Story of Susanna)와는 달리

정경 에스더에다 고유한 가치를 부가시키거나 성경 이야기에 어떤 공헌을 하지는 않는다.

 

제롬이 벌게이트 번역본을 만들 때 사용하였던 에스더의 헬라어 번역본은 히브리어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107절을 수록하고 있었다.

제롬은 그것들을 에스더 본문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부록 안에 배열시켜 영역본들에서 발견되는 순서에 위치시켰다.

클라크는 “이것들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서라"고 주장한다. 

 

에스더에 새롭게 첨가된 내용은 에스더의 내용에 강한 종교적 요소들을 추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긴 기도를 하며, 모르드개는 “부림"이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하나님이 만드신 두개의 제비를 말하는 "제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부록이 성경의 내용에 모호한 부분을 명료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아닥사스다 (크세르크세스)의 두통의 긴 편지가 에스더 3:13~15에서 언급된 조서에 소개되며,

또 다른 편지가 이전의 조서를 폐기시키는 8:13에 언급된다.

 

70인경은 이 부록을 전체 본몬의 7개의 부분에 첨가시키고 있다. 

아닥사스다의 통치에 대하여는 그가 통치하기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이 틀림없는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영어 번역본의 외경에서 이 부록은 항상 하나로 모아져 있다.

히브리어 에스더에 누락된 헬라어 에스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르드개의 꿈과 왕에 대한 반란이 무산된다는 이야기. 이에 대한 17절이 정경의 제1장 앞에 위치한다.
2. 페르샤 제국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하도록 초래할 편지가 페르샤 왕에 의하여 발송된다.

     이 내용은 히브리어 본문의 3:13 뒤에 나오며 벌게이트에서는 13:1~7에 해당된다.
3. 히브리어 본문의 4장에 뒤이어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가 나온다.

     벌게이트에서는 13:8-13이 모르드개의 기도이며 14:1~19가 에스더의 기도이다.
4. 왕에 대한 에스더의 알현이 70인경에는 16절에 이르는 반면 맛소라 사본에는 2절에 불과하다.

     라틴어 성경에서 이 부분은 15:1~ 16에 해당된다.
5. 유대인들에게 원수들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라는 허락을 내린 페르샤 왕의 편지가 8:12 뒤에 나온다.

     벌게이트에서는 16:1~24에 나온다.
6. 이 부분은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룬다. 

    첫째 주제는 모르드개의 꿈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은 부림절의 목적을 논함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 부분은 히브리어 본문 뒤와 에스더와 헬라어 본문을 결론짓는다.

    벌게이트에서는 10:4~13에 해당된다.   

    두번째 내용은 헬라어 번 역본에 첨가된 역사적 각주이며 벌게이트의 11:1에 해당된다.

 

(1) 본서의 저작 연대
A.D. 90년경의 인물 요세푸스는 헬라어판 에스더를 잘 알고 있다. 

즉, 그는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I: 6에서 그 내용을 쉽게 풀이하고 있다.

사도적 교부에 대한 책의 저자였던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에스더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금식과 겸비함 으로 간청하였다고 말하였다(55:6, 에스더 15:2[벌게이트] 참조).

굳스피드는 “기도 없이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란 언급이 정경상의 에스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제롬에 따르면 헬라어판 에스더 부록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수납되지 않았으며,

그가 아프리카누스(Africanus)의 편지에서 그것들은 읽는 자의 건덕(健德:건전한 덕)에 효과가 있다고 적고 있다.

외경 에스더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연대와 장소를 단정짓기는 어렵다. 어떤 권위있는 학자들은 에스더 부록이 B.C. 180~145면 사이에 애굽의 어느 곳에서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다.

왁스맨에 따르면 여러 권의 부록들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는 11장의 표제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거기에서는 이 편지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프톨레미의 아들인 리시마쿠스(Lysi- machus)에 의하여 해석되었으며

프톨레미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 4 년 후에 도시테우스(Dositheus)라고 하는 레위인 제사장이 가져왔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부인을 얻은 프톨레미란 왕이 4명이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결정짓기는 어렵다.

 

 

6. 집회서, 또는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

 

“교회의 책”(the Church Book)이란 의미의 집회서 (Ecclesiasticus)의 원명은 고대에 실종되었다.

집회서란 명칭은 3세기 이후의 기독교회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역시 제롬도 그렇게 불렀다.

다른 집회서들과 비교할 때 만일 널리 사용된 것이 표준이 된다면 본서는 아주 '뛰어난'(Parexcellence) 책이다.

본서는 초대교회에서 교훈적 규범서로서 이용되었던 듯이 보인다.

본서는 매우 유명하여 다수의 동양 언어, 즉 콥틱어(Coptic: Sahidic, Bohairic과 Achmimic [Akhmimic], 방언들)와 아르메니아어, 에디오피아어, 그루지아어(Georgian), 고슬라브어, 아랍어들로 번역되었다.

본서는 외경 가운데서 가장 긴 책이며 정경의 잠언에 비해 두배가 된다.

 

(1) 본서의 내용
집회서는 길이가 일정치 않은 5개의 주된 부분들로 구분된다. 

서문 뒤에 "벤 시락(Ben Sirach)의 잠언"을 수록한 가장 긴 부분, 1:1~ 42: 4이 나온다. 

이것은 종교와 윤리 문제에 대한 저자의 명상과 강의를 수록한, 느슨하게 연결된 잠언들의 결집이다.

정경의 잠언과 집회서의 이 부분 사이에는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

 

다음 부분인 42:15~43:33은 찬양의 시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저자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물질세계의 놀라운 일들을 칭송한다.

44:1~49: 16의 부분은 “이제 우리 유명한 인물들과 우리를 낳으신 선조들을 찬양하자”란 유명한 문구로 시작하며 히브리인의 역사와 위대한 지도자들의 위업을 개괄하고 있다.

이 부분은 히브리서 저자를 하나의 표본으로 하여 11장에서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고 있 다.
50~51장의 마지막 부분은 부록의 성격을 띤 것으로 고대부터 내려 오는 성전제사의 가장 훌륭한 묘사를 담고 있다(50:1~26).

 

(2) 본서의 저자

외경 가운데서 저자가 알려진 것은 오직 본서 뿐이다.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사는 엘리에셀의 아들인 “시락 의 아들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50:27). 

그의 손자는 50년 후에 본서를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저자의 손자에 대하여 이 이상 더 알려진 것은 없다.

예수 벤 시락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라고 묘사되어 있으나 본문의 진위는 의심스럽다.

어떤 학자들은 시락이 학자이며 교사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구약에 친숙한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서 전체는 구약에서 취한 사상으로 충만하여 서기관의 직위를 얻기 위한 특별한 준비를 즐꼈던 사람의 태도와 훈련의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본서에 암시된 내용들에 근거하여 그는 한가로운 사람이었으며, 여행을 좋아하고, 철학적인 생각의 소유자며, 후에 사두개파로 알려진 종파의 지지자였다고 추론되고 있다.

 

(3) 본서의 연대

본서의 정확한 저작 연대에 대한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 상이하다. 

아이스펠트(Eissfeldt)는 집회서가 B.C. 190년 경, 즉 마카비의 투쟁 이 발발하기 수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다른 학자들은 B.C. 290년이나 280년 같이 이른 시기에 저작되었다고 주장 한다.

집회서의 번역은 B.C. 130년 경에 완결되었다.

손자의 서문에서 그는 유에르게테스 왕(King Euergetes) 즉위 38년, 혹은 B.C. 132 년에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갔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서문에서 그는 번역을 하도록 격려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4) 본서의 언어

본서는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원본은 실종되었고 지금까지 헬라어 번역본에 의하여 전해져왔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책은 다른 외경들보 다 더 오랫 동안 전해졌었다. 

카이로에 있는 옛 회당(Old Synagog) 의 옛 문서 보관소(genizah)에서 집회서의 단편들을 발견하였던 쉐흐 터(Solomon Schechter)의 노력에 의하여 1897년에 히브리어 원본의 상당부분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집회서의 원문의 확인 문제는 확대된 헬라어 사본이 삭제, 첨가, 전위로 인하여 변형되었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게 되었다.

독자들은 흠정역과 개역성경이 상당히 차이가 있 음을 숙지해야 한다.

 

1896년 카이로에서 히브리어 사본이 발견된 이래로 더 오래된 번역본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본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제 5권의 필사본의 첫 부분에 수록된 히브리어 본문 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쿰란의 제2 동굴은 히브리어 시락의 추가적인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이 증거들은 헬라어 본문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되었음을 가리킨다.

 

왁스맨에 따르면 본서는 이후의 유대 문헌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위대한 랍비 아키바가 본서의 독서를 금하였지만 탈무드학자들은 집회서를 끈질기게 연구하였다.

지도자적인 타나학자 (Tannaitic; 200년간 계속된 여러 학자들 가운데 한 부류 - 아랍어로 '가르친다'는 뜻의 tanna에서 유래된 명칭- 역자주)아모라 학자 (Amoraic; Mishna를 연구하는 학자들- 히브리어 '해석하다'란 뜻의
amora에서 유래된 명칭- 역자주) 들은 이것을 자유롭게 인용하였다.

20개 이상의 잠언이 바벨론과 팔레스틴 탈무드에 인용되어 있다.

탈무드에 나온 인용문구 가운데 어떤 것은 마치 성경에서 인용된 것처럼 “기록되었으되 "(It is written)란 문구와 함께 소개된다.

두 곳에서 집회서가 히브리어 구약의 케투빔, 혹은 성문서에 속한 것처럼 언급 되고 있다.

 

 

7. 솔로몬의 지혜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 지역 밖에 거주하였으며, 특히 포로기 이후에는 더욱 많은 외국 거주민이 있었는데, 

그들은 디아스포라 (Diaspora)로 알려진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유대인의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의 하나는 헬라 문화권의 지식과 과학의 중심지였던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곳에는 고대세계의 가장 큰 도서관 중의 하나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의 종교와 사상은 이방의 종교와 철학과 부딪히게 되었다.

이따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공격과 그들에 반감을 지닌 박해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 대한 변호자가 되었다.

로몬의 지혜서(the Wisdom of Solomon)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이 전해준 신앙에 신실하도록 격려하기 위하 여 기록되었다고 믿어진다.

본서는 집회서와 마찬가지로 지혜문학의 쟝르에 속하도록 구분된다.

그러나 사상의 범위는 물론이고 종교적 통찰, 종교적 개관, 사상의 조직력에서 지혜서는 집회서보다 우월하 다고 평가된다.

 

본서는 다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1~5) 지혜는 의롭고 신실한 사람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

     죽음은 불의한 자와 배교자에 대한 보응이다.
2. (6~9) 지혜의 기원과 성질, 활동이 설명된다.

     9장은 지혜를 예찬하는 아름다운 기도이다.
3. (10~19)이 부분은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와 다른 민족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재고를 담고 있다.
     a. 족장들과 출애굽(10~12)
     b. 가나안 정복 (12:3~27)
     C. 우상에 대한 논쟁 (13:1~15:17)
     d. 출애굽 때 겪은 히브리인과 애굽인의 경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숙고(15:18~19:22).

 

제1장은 의에 대한 예찬이다. 

이 의에 대한 추구는 지혜획득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지혜란 악하게 저항하는 영혼 속으로 들어가지 않거나, 또는 죄에 사로잡힌 육체에는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1:4, R.V.).

의는 이 세상의 삶에 관계될 뿐 아니라 무덤 너머에서 생명을 공로로 얻게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의인이 이 세상에서 그의 대적의 손에서 어떠한 고난을 겪든지 결과적인 승리는 그에게 있는 것이다.

 

제3장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불멸로 만드셨다”라는 것을 배웠다. 

임종 후에 의인의 영혼은 스올의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린다.

어떤 비판학자들은 기독교 이전 문학 가운데서 이것이 최초로 불멸의 교리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르쳤다고 믿고 있다.

 

제6장에서 9장까지는 지혜를 추구하라는 왕과 재판관들에 대한 호소이다.

즉, 솔로몬이 이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열심이었나를 설명하고 있다.

지혜가 의인화되고 거룩한 영이라 불리우는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 점을 강조하는 구절은 7:24~26이다.

 

뒤의 10장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어 지혜의 힘과 가치를 설명한다.

의가 부족하였던 이방인의 비참한 실패가 하나님의 선민이 거둔 승리와 대조를 이룬다.

11장~12장에 드리는 기도가 나오는데 그 표현에 있어서 고귀함의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만일 저자가 지혜서의 후반부를 요약하였다면 이 부분 외에도 많지 않은 구절이 누락되었으리라고 믿어진다.

 

족장들의 생활과 국가의 초기 역사에서 끌어낸 예화들은 지혜가 항상 성공의 근저를 이루고 지혜의 결핍은 실패를 귀결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본서의 목적

본서는 일편 논쟁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적이다. 

초두의 몇 장은 거의 확실히 사두개파를 의미하는 “불경건한 자들”에 대하여 경고가 발해진다.

그들은 미래의 생명을 믿지 않았고 따라서 심판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헬라어 언어권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향락주의 (Hedonism)가 큰 유혹이었다.

지혜서 저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을 가르쳐 그의 조상 전래의 신 앙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과거 유대인의 역사를 암시하는 은근하고 신비스런 방법은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고안되었다(10~12장: 16~19장).

이러한 기교는 또한 무녀의 신탁서들에서도 사용되었다.

 

(2) 본서의 저자

솔로몬의 지혜서 저자에 대하여는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성 어거스틴은 집회서의 저자인 예수 벤 시락이 역시 지혜서를 저술하였다고 여겨질만 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두 외경 사이의 상이점들은 이 견해가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롬은 자기 시대는 "많은 저술가들이 필로(Philo)를 저자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하며, 루터와 많은 개혁 신학자들이 이견 해를 따른다.

어떤 학자들은 본서를 아볼로(Appolos)의 책과 연관시킬 려고 노력하여왔다.

그 이유는 혹자에 의하여 그가 히브리서의 저자 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근거가 확실치 않 다. 지혜서에는 특별히 기독교적 사상들이 담겨 있지 않으며 이 때문 에 이 이론은 심각한 반대에 부딪힌다.

 

(3) 본서의 저작 연대

권위있는 학자들간에 연대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견해들은 B.C. 150년에서 A.D. 40년에 이르고 있다. 

2:10~20에 언 급된 박해와 15:14에 언급된 압제는 유대인이 프톨레미 피스콘 (Ptolemy Physcon) 정부에 대항할 때 그가 행한 방법들을 암시하는 것 일 수 있다.

자리에 없는 지도자들에 대한 숭배와 또한 박해를 언급 하는 15:6은 A.D. 40년 자신이 인정되길 원했던 황제 칼리굴라 (Caligula)에 대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른 학자들은 신약에 미친 솔로몬의 지혜서의 영향은 본서의 연대를 A.D. 40년 이전으로 요 구한다고 주장하며 B.C. 100년,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한다.

마카비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지혜서 안에는 유대인의 신앙 결핍 문제가 기론되며, 이것은 정통적인 유대인들이 자주 박해를 받았던 B.C. 2세기의 문제였다.

 

(4) 신약에 미친 영향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의 지혜서가 신약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고 있다.

어떤 학자들을 본서와 바울 서신 중의 어떤 책들 사이에 평행구절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리아리티(Moriarity)는 성 요한과 성 바울 모두가

그들의 기독론적 사상들이 본서의 교훈에 영향 받았음을 의심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혜서의 영향은 지혜의 개념이 말씀 (헬라어 Logos)의 성육화의 방법을 예비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제4 복음서에서 특히 자명하다고 여겨진다.

신약에는 지혜서에서의 직접적인 인용 은 전혀 없다.

 

 

8. 바룩

 

바룩서(the Book of Baruch)는 네라야(Neraiah)의 아들이며 예레미야의 친구겸 서기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자증한다(1:1).

본서의 증거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 후 5년째 되는 해, 즉 B.C. 592년, 혹은 582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예레미야의 신실한 추종자인 바룩은 귀환한 포로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의 제사를 돕기 위한 기금을 위탁받았으며 유대인이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인 벨사살을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이것이 파괴된 성전과 흩어진 제사장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저자는 분명히 적고 있지 않다.

네라야의 아들인 바룩은 유대인의 전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정경 예레미야를 재기록하였다고 증거되며, 또한 예루살렘 멸망을 목도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남왕조의 패망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1) 본서의 내용

바룩은 세 부분으로 구분된 

제1부, 1:1~3: 8은 바룩의 편지 (1:1 ~14)와 의식상의 고백과 기도를 포함하며, 

제2부인 3:9~4:4은 지혜에 관한 짧은 장을 포함하며 이것이 바로 본서가 이따금 집회서와 솔로몬의 지혜와 더불어 지혜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유이다.

본서에서 유대인이 겪는 환란은 이스라엘이 지혜의 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제3부인 4:5~5:9은 백성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시온의 최종적인 회복을 약속한다.

4:5~35에서 “기운을 내라”, 혹은 그와 비슷한 후렴이 계속하여 나타나며 (5, 21, 27, 30절), 4:30~5 :9에서 "오 예루살렘아"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본서의 마지막 부분의 마지막 구절은 낙관적인 어조로 끝을 맺고 있다.

 

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동편을 바라보라. 

거룩 하신 이의 말씀대로 동과 서에서 모여드는 너희 자손을 보라. 

그들 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도다.

 

바룩은 질적으로는 균일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들의 결집 형태를 띤다. 

본서는 둘 혹은 심지어 세개의 구별되는 문서들로 구성 되어 있다. 

본서의 가장 분명하고 예리한 구분은 3:8과 3:9 사이에 온다. 

이것을 거점으로 글의 형식이 산문에서 운문으로 변하며, 또한 하나님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1:1~3:8에서 저자는 하 나님의 성호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주 22회, 주 전능하신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각기 2회, 주 우리 하나님 15회. 

이성호들 중의 어느 하나도 두번째 부분에서 (3:9~5:9)는 사용되지 않는다. 

 

본서는 독자에게 그들의 바벨론 군주에게 공헌하며 복종하도록 설득 하며 (1:11~12 참조), 

예루살렘 멸망을 야기시킨 그들의 죄를 회개 하도록 촉구하며, 

결국 하나님이 유대인을 포로에서 귀환시키신다는 신앙을 갖게 하려고 기록된 것이다.

 

(2) 본서의 연대

학자들은 본서가 바벨론 포로와는 관계없다고 하여 보다 늦은 기원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본서를 저술하게 조장한 당시의 상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은 양분된다.

한 학파는 본서의 기원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 이후로 주장하고 반면에 다른 학파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한다.

제삼의 견해는 본서의 후반부는 A.D. 150년과 같이 늦게 기원되었다고 주장 한다.

비록 후반부가 A.D. 2세기에 유래되었다 할지라도 전반부는 매우 오래 전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3) 본서의 언어
비록 헬라어 번역본이 현존하고 있지만 원어는 히브리어였을 것이다.

학자들의 주장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부분과 헬라어로 기록된 부분이 어디인가에 대하여 각기 차이가 있다.

오늘날 본서는 헬라어 사본으로만 전해지며, 또 B,A.Q, 사본과 몇 개의 초서체 사본에 발견된다.

이것은 시내 사본이나 C 사본(C Codex)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바룩은 두 가지 형태, 즉 페쉬타(The Peshitta)와 수로-헥사플라 (Syro-Hexaplar)의 수리아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전자는 아마도 70인 경에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원본에 근거한 듯이 보인다. 

라틴어 역본 역시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지는데 모두가 헬라어 사본에서 번역 되었으며 아르메니아어, 아랍어, 에디오피아어, 콥틱어 역본도 마찬 가지이다.

 

(4) 본서의 목적

굳스피드는 본서가 많은 유대인들이 수납하기 어렵다고 여긴 제국에 대한 충성스런 태도를 가르치고자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반란을 도모하지 말며, 제국에게 충실히 봉사하며 제국으로부터 굴복을 얻으라고 권면받고 있다.

A.D.132-135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의 반란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충고의 필요를 보여준다.

 

 

9. 예레미야 편지

 

예레미야의 편지(The Letter of Jeremiah)는 원래가 분리된 책이었으나 바룩과 예레미야가 친구이자 협력자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룩서에 병합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편지의 저자와 전혀 무관하였다고 학자들은 확신한다.

이제 예레미야 편지는 바룩 6장에서 발견되며, 외경의 여러 필사본에서는 각기 다른 곳에 삽입되어 있다.

벌게 이트에서는 본서가 바룩에 첨부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편지로 주장된 책은 정경 예레미야 10: 11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 구절은 전 예레미야에서 아람어로 된 유일한 곳이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너희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에서 2인칭은 이 진리를 이방인에게 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한다.

 

(1) 본서의 내용과 목적

첫 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바벨론 왕에 의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는 백성을 교훈하기 위하여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

예레미야 29장은 선지자가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 10: 11의 사상과 일치하는 편지를 후대의 유대인이 기록하였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 구절을 강조하여 여러 가지 논증을 사용하면서 우상숭배의 죄가 지닌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이방신들에 대한 조소가 이사야 44:9~20과 시편 115, 135편과 같은 히브리 문헌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야웨 와의 비교에서 목상(the wooden deity)이 박쥐와 도둑, 갈매기, 새, 고양이의 잠자리로 사용된다고 풍자한다.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사음식들이 제사장에 의해 시장에서 판매되며 심지어 그의 부인들은 소금으로 절인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28절).

이방신들은 “오이 밭의 허수아비처럼” 쓸모가 없다.

만일 신전에 불이 나면 그 신은 나 무와 함께 타버린다.

 

본서의 목적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편지의 저자가 "신들"을 언급하면서 마음 속에 탐무즈 신(the god Tammuz)을 생각함이 거의 확실하다고 메쯔거는 믿고 있다. 

헤로도투스(Herodo- tus)와 스타보(Stabo), 루시안(Lucian) 같은 저자들이 암시하듯이 43절에서 탐무즈의 숭배와 관련된 음탕한 풍요의식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 듯하다.

 

(2) 본서의 언어

예레미야 편지가 기록된 원어의 성질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가 나뉘어진다.

볼(Ball)은 본서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토레이 (Torrey)는 볼이 그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재의 헬라어 본문이 번역된 아람어가 그 원어라고 주장한다.

 

(3) 본서의 저작 시기
원어로서 헬라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편지가 이방종교에 대한 공격으로써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되었으며 B.C. 70년경에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어로서 히브리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B.C. 4세기 말로 그 저작 시기를 잡는다. 

이 주장에 따르면 편지에 언급된 바벨론은 실제의 바벨론이며, 본 편지는 바벨론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동화를 경고하기 위하여 보내어졌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은 여기서 언급된 우상숭배는 로마의 쥬피터 신전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세라피스(Serapis) 신전에서 실제로 행하여진 것이었 으며, 

편지의 느부갓네살은 베스파니안 황제이다. 

바벨론은 로마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벨과 용의 이야기, 솔로몬의 지혜서 후반부, 그리고 므낫세의 기도
의 내용과 더불어 예레미야의 편지는 특별히 이방종교의 우상숭배 관습에 대항하여 기록된 문헌이다.

 

 

10. 아자랴의 기도서와 세 청년의 노래

 

70인경에 수록된 다니엘서는 벌게이트에서도 답습되듯이 정경에서 는 발견할 수 없는 세 권의 부록이 있다. 

즉, 아자랴의 기도서(the Prayer of Azariah)와 세 청년의 노래 (the Song of the Three Young Men), 수산나(Susanna), 벨과 용(Bel and the Dragon)이다.

 

아자랴의 기도서와 세 청년의 노래는 모두 헬라어 다니엘 사본들의 3:23과 24 사이에서 발견된다. 

다니엘의 두 부록은 두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즉 적절한 번역인 70인경의 번역본과, 영어 번역본들로 번역된 테오도티온의 것이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아랍어 사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흠정역과 1885년의 개역성경에서 이 부록은 이런 서두를 수록하고 있다. 삼인의 거룩한 청년들의 노래, 다니엘의 세 친구가 타고 있는 화로에 뛰어들었다고 주장한 후 다니엘 3장에 나온다(23절).

 

아자랴의 기도서는 그것이 삽입된 장의 문맥과 연결되어 있으며 반면에 세 청년의 노래는 화로의 열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불에 탄 사실과 주의 천사의 하강을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두 책이 동일저자의 기록이 아니며 원래는 함께 위 치해 있지도 않았다고 믿고 있다. 다니엘의 네 친구 중의 하나인 아자라는 마카비 반란 때의 한 영웅인 다른 아자랴로 생각하는 학자들 도 있다.

 

아자랴의 기도서는 하나님의 예루살렘 심판이 정당하심을 천명하고, 적군의 잔인함과 사악함을 애통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유대인의 비참한 사정을 묘사한다. 즉, 그들은 “왕이나, 제사장, 지도자, 번제, 제사, 봉헌, 분향,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처소가 없다”라고 묘사되었다.

저자는 백성의 회개가 그들의 회복과 적국에의 심판을 가져올 것을 희망하고 있다.

 

29-68절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드린 하나님에의 찬양을 싣고 있는 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오, 너희 모두는 주를 따르며 주께 찬양하라." 

이 아름다운 노래는 영국 성공회의 아침기도서에서 테데움(Te Deum)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아자랴의 기도서는 유대인의 경건문학의 뛰어난 예로 생각된다.

"그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며 그를 영원토록 높일지어다”란 후렴이 노래 전체에서 32회 반복된다.

 

(1) 본서의 저작 시기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니엘 3장에 나온 이 두 부록은 셀류키드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치세 때 (B.C. 167-163년경)로 추정되 는 마카비 시대에 저작되었다고 믿어진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커다란 환란을 겪었다.

9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비통해 한다.

“당신은 우리를 불법한 적군과 가장 증오스런 배교자들, 세상에서 가장 악한 불의의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이것은 마카비 1서 1:1~15에 나 오는 회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 왕의 잔인함에 대한 언급으 로 보인다(마카비 1서 1:20~24; 41~64를 보라).
초기 교부들은 로마 가톨릭이 지금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부록 들을 정경으로 취급하였다. 

정경 다니엘에 미친 이들의 영향은 전기 독교 교회에서 심각하였다. 

그것은 라틴어와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수리아어, 콥틱어, 에디오피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야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세 청년의 노래』는 또한 중세교회의 예배의식 의 변이에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 가톨릭과 감독교회, 루터교회는 이 것을 일종의 아가(Canticle)로 사용하고 있다. 

축성시(祝聖詩, the Be- nedictus, 35~65절)는 기독교 초기부터 찬미의 시로 사용되어왔다. 

1549년에는 사순절 동안에 테 데움(Te Deum)을 대신하도록 제1 기도 서에 실려있다. 

1928년에 나온 「미국 기도서』의 개정판에서 기도의 첫 부분이 베네딕투스란 이름으로 아침기도서에 수록되었다.

 

 

11. 수산나

 

수산나(Susanna)의 역사는 다니엘서의 앞에 위치시킨 70인경의 20세 기판에서 발견된다. 

벌게이트는 다니엘 13장으로 이것이 수록되었다. 

세이어즈(Miss Dorothy Sayers)는 그녀의 「범죄의 옴니버스』(Omni-bus of Crime : 1939년)란 신화모음집의 처음 두개의 이야기로서 수산 나를 '벨과 용'과 함께 수록하였다. 메쯔거는 수산나를 "세계문학 가 운데서 가장 훌륭한 단편이야기"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1) 본서의 내용
이야기의 배경은 바벨론이며 때는 포로기이다. 

수산나는 바벨론에 사는 어느 부유한 유대인의 아름다운 아내였다. 

두명의 유대인 장로 들이 그녀의 미모에 정념을 태우며 그녀를 심히 탐내었다. 

어느날 두 사람은 수산나를 몰래 염탐하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서 로가 수산나에 대한 자신의 비밀스런 욕정을 고백하고는 

그녀가 자기 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그녀가 목욕하는 정원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녀의 시종들이 그녀만 남겨두고 떠나자,

몸을 드러내고 만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간음죄로 고 발하겠노라고 위협하였다.

수산나는 그들을 거절하였고 다음날 이스 라엘의 법정에 고소당하여 호출되었다.

그녀는 두 장로의 거짓된 송 사에 대항하여 자기를 변호할 수가 없었고, 사형언도를 받았다.

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수산나가 끌려가는 도중에 청년 다니엘이 나 타나 소리쳐 행렬을 세우고 증인들에게 질문할 자격을 요구하였다.

청년은 두 장로를 따로 시험하여 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위증을 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성공하였다.

수산나는 방면이 되 고, 두 장로는 그녀를 대신하여 처형되었고, 다니엘의 명성은 온 백 성에 널리 퍼졌다.

 

(2) 본서의 저작 시기와 장소
수산나의 저작 시기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학자들간에 이 책의 원어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어떤 학자는 히브리어라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는 아람어라고 말한다. 

헬라어가 원어라고 주장 할 만한 두 가지 말놀이(pun, 동음이어의 단어를 사용하는 재담)가 있다.

수산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탄생 200년 전, 알렉산드 리아에서 기록된 것 같다.

영어 번역본은 70인경이 아니고 테오도티 안에서 번역되었다. 예일 의 토레이(Torrey)는 테오도티안이 2세기 중엽에 그의 번역본을 완성 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소위 다니엘의 부록이란 히브리 - 아람어 사본 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23) 토레이에 의하면 테오도티안의 헬라어 번 역본과 헬라어 수산나는 히브리어의 관용어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것은 현재의 수산나 헬라어 번역이 히브리어 원본을 사용하였음을 지 적한다고 한다.
(3) 본서의 저작 동기
클락은 이 이야기가 예레미야 29: 21~23에 의하여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아합과 시드기야가 그 이웃의 아내들과 행음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24) 클락은 이 이야기가 “바리새파와 사두 개파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6-79) 후기에 저술된 비유라고 믿고 있다. 25)
가장 잘 알려진 설화체의 이 허구적 내용은 어떤 목적으로 저술되 었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수산나의 저자는 증인에 대한 심문, 특히 공모의 혐의가 있는 증언에 대한 더욱 엄격한 심문 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나아가 위증한 자에게는 그 그릇된 증언에 의한 희생자가 언도받은 형량과 동일한 형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을 법칙화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수산나는 교회 교부들에게 관심있는 책이었으며, 그 중에 어떤 이 들은 풍유적 해석을 하였다. 3세기에 로마의 주교였던 히폴리투스 (Hippolytu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수산나는 교회의 예표이며, 그녀의 남편인 요아김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정원은 교회에 심기워진 과실 나무와 같은 성도들의 단체이며, 바벨론은 세상이다. 두 장로는 교회 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두 나라, 즉 하나는 할례의 유대, 다른 하나는 이방 국가의 예표이다”26) 이 해석방법은 수산나가 소설의 형 태로 전해진 방법 때문인 듯하다.
전 세기를 통하여 수산나의 이야기는 유명하였다. 많은 화가들이 이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샤일록이 포르티아에게 "다니엘이 재판 하러 온다”라고 말한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 나오는 유명한 말은 수산나 전설에서 다니엘이 맡은 역할을 모방한 것이다.

 

 

12. 벨과 용

 

벨과 용(Bel and the Dragon)의 설화는 70인경의 다니엘 뒤에 나온 다. 메쯔거(Bruce Metzger)는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탐정소설 이라고 부른다. 벨과 용에 담긴 두 가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 상숭배를 경시하고 이교의 제사장직을 혹평하려는 유대인의 변증적 노력의 재미있는 표본을 보게 된다. 바벨론 유수 이후로 유대인들은 주변국가들, 특히 정복국가의 남신과 여신들에게 유혹을 받았다. 많 은 유대인들은 이방신들이 우월하여서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이겼다 고 느꼈다. 더우기 유대인의 대다수가 디아스포라에 살았는데 이곳은 알렉산더 대제가 이룬 정복 이후에 그리스의 관습과 문화를 채용하려 는 세계적인 경향이 있는 곳이었다.
이방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와 바벨론과 같은 중심지에서 이방종교를 포함한 그 지역의 관습을 받아들임으로써 환 경에 자신을 적응시키게 하는 커다란 압력들이 유대인들을 억눌렀다. 벨과 용, 예레미야의 편지는 인간이 만든 우상을 믿는 어리석음을 조 롱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1) 본서의 내용
벨과 용은 사실상 두개의 구별된 관계없는 이야기, 즉 다니엘서에 나타난 설화의 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야기는 다니엘서 3장 에 나오는 금신상의 설화에 기초하였고, 두번째 이야기는 다니엘서 6 장에 나오는 사자굴 속의 다니엘 이야기에 근거한 것이다. 먼저 고레 스왕이 페르샤 왕위에 오르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날 그는 친 구인 다니엘에게 왜 그가 바벨론의 주신이며 매일 상당한 떡과 기름 과 양들을 바치는 벨신을 섬기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다니엘은 고레 스를 설득하여 언제나와 같은 양의 음식을 신전 안에 두고 밖에서 잠 그고 봉하게 한다. 벨 신상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마루에 재를 뿌려서 밤이면 신상 밑의 뚜껑문을 통하여 가족들과 함께 나와서 음식과 제물을 가져가는 제사장의 발자국 을 남기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다니엘과 왕이 다시 와보니 음식이 사라졌다. 왕은 벨아 살아있는 신이라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말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사람들이 비밀문으로 들어와 우상을 위하여 그곳에 바쳐진 많은 음식 을 가져갔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에 의하여 마루 에 찍혀진 많은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러한 기만으로 인하여 이야기 는 진전되어 제사장들이 처형을 당하고 다니엘은 우상을 훼파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용은 벨의 이야기와 유사한 줄거리이다. 여기서 왕은 살아있는 뱀 을 섬기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것은 에피다우루스(Epidaurus)에 있는 애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와 같은 동방의 사원에서 뱀을 숭배 하는 그리스인들의 관습의 흔적이었다. 뱀에 경배하도록 소환된 다니 엘은 뱀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그는 뱀에게 역청과 비계와 기름을 섞 은 혼합물을 먹여 몸둥아리가 파열되게 하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신 에 대한 이러한 처사에 분노하였고 왕에게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고 사자들에게는 먹이를 금하여 더욱 난폭하게 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6일 동안 다니엘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사자들도 다니엘을 잡아 먹지 않는다. 7일째 되던 날 유대에 있는 추수군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던 선지자 하박국은 다니엘을 위하여 자기가 음식을 놓아두었던 사 자굴을 보고 갑자기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한 쪽 눈을 반짝이면서 선 지자는 유대 광야로 돌아간다. 제7일에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꺼 내주고 대신에 그의 대적들을 그곳에 넣어버리자 사자들이 즉시 달려 들어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굳스피드는 "용"(Dragon)이란 이름이 헬라어 drakon과 라틴어 draco 에서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다. 28) 바벨론의 서사시에 나오는 마르둑 (Marduk)에 의하여 살해된 티아맛(Tiamat)과 이 뱀을 연관시키려는 시 도가 있어왔다 (알렉산더 대제가 인도에서 뱀을 숭배하는 모습을 발견 하였다고 전해진다).

(2) 본서의 저자와 언어
벨과 용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본서가 히브리어 로 기록되었는지, 아니면 아람어인지 분명히 단언할 수가 없다. 외스 텔리는 헬라어가 원어라고 믿는다. 29) 다니엘과 같이 벨과 용은 테오 도티안 사본에서 번역되었다.

 

 

13. 므낫세의 기도서

 

어떤 유대인의 외경 목록에는 므낫세의 기도서(the Prayer of Man- asseh)란 짧은 책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70인경에 속해 있지 만 시편 마지막에 송가집(Songs)이라 불리우는 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역대하 33:10~13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유대에서 가장 악한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버리고 외국의 종교 를 도입함으로써 죄를 지었다(왕하 21:1~8과 대하 33:1~20). 그 의 우상숭배는 결과적으로 유대에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 및 바벨론 으로의 포로를 당케 하였기 때문에 므낫세와 유다의 종국은 비참하였 다(왕하 23:36 이하; 24:3, 렘 15:4).
므낫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는 형벌을 받 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심오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므낫 세의 기도서는 앗수르에서 한 왕의 회개의 기도를 전하고 있다.
(1) 본서의 내용
모두 15절로 구성된 기도서는 하나님을 위한 변화(1~7절), 죄의 고백 (8~10절), 사죄의 간청 (11~15절)으로 구분된다. 문학적인 관점 에서 평가하자면 이것은 바리새적인 색채를 띤 훌륭한 회개의 기도이 다. 이 기도가 역사적인 것으로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이 기도서는 가상적인 저술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2) 본서의 연대와 저자 및 언어
학자들은 이 짧은 외경의 저작시기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어 떤 학자들은 미상의 유대인이 B.C. 150년에서 50년 사이에 이 기도 서를 기록하였다고 믿고 있다. 예일의 학자인 토레이는 보다 늦은 연 대를 잡아 2, 3세기로 주장한다. 30) 이 주장은 기도서의 일부가 헬라어 로 쓰였으며, 늦게야 출현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것이 히브리어나 아람어, 헬라어 가운데 어느 언어로 기록되어있는 지를 결정할 수가 없다. 기도서 안에 증명할 만한 단서는 전무하지만 메쯔거는 헬라화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보다 팔레스틴의 유대인을 지지하는 것 같다. 31)
므낫세의 기도서는 70인경과 벌게이트의 가장 많은 사본들에서 발 견된다. 이것은 에디오피아역 성경에도 들어 있다. 또한 디다스칼리 아 (the Didascalia)에서 발견된 수리아역은 3세기에 헬라어역에서 번역 되었다. 헬라어 사본은 A.D. 4세기의 작품인 『사도적 율례』 (Apostolic Constitutions)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3) 로마 가톨릭에서의 본서의 위치
므낫세의 기도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14권의 외경 가운 데 10권을 2차적 정경으로 인정한 것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최소한 분실되어서는 안되는 책”으로서 벌 게이트의 부록이 되었다. 기도서에서 인용된 문구들이 로마교회의 성 무일과서의 화답성가(responry)로 사용되고 있다.
14. 마카비 1서
(1) 마카비 1,2서의 역사적 중요성
마카비 1서와 2서는 중간사 기간의 역사를 위한 귀중한 두 권의 책 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마카비 1서는 마카비 2서보다 더욱 큰가치가 있는 책으로 간주된다. 만일 역사서의 평가의 기준이 기록된 사실들의 확실성에서 보면 마카비 1서는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 이다. 이 책의 사료편집은 직설적인 표현과 진실함이 특징을 이룬다. 마카비 1서의 미상의 저자는 기적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초자연적인 간섭을 어떤 사건에도 연루시키지 않으며, 부활의 교리를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는 바리새파 보다는 사두개파의 인생관에 적합한 보수 적인 종교성향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카비 2서는 마카비 1서 보다 더욱 감동적인데, 그 이유는 전자가 초자연을 소개하고 믿기 때문이 다. 그러나 마카비 2서는 마카비 1서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역 사적 객관성이 부족하다.
(2) 본서의 내용
마카비 1서에는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에 대항한 유대인의 투쟁이 결국에는 하스모니안 왕조시절에 유대의 독립을 가 져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서는 마카비 반란의 발단부터 마타디 아스의 다섯 아들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인 시몬이 죽을 때까지인 B.C. 168~136년을 전해준다. 저자는 본서의 각 부분마다 마카비 일 가의 특정인 한 사람을 다루도록 계획하고 있다. 제1장은 마카비 투 쟁의 서론이고, 제2장은 마타디아스의 반란을 전하며, 3:1~9:22 유다의 공적을 기록하고, 9:23~12:53은 요나단의 활동상을 그리 며, 마지막 부분인 12:53~16:23은 시몬의 경력을 설명해준다. 이야기는 연대기적 순서로 진행되어서 마카비 1서는 알렉산더 대제 의 정복과 사망, 제국의 분열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마 카비 1서에 수록된 사건들은 B.C. 175년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 함께 시작되어 B.C. 135년의 시몬 마카비우스의 죽음에 까지 도달한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는 유대교를 위배하는 이교의 관 습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헬라화된 당파가 형성된다. 유대인들이 에피 마네스(Epimanes, “미치광이”)로 부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팔 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헬라의 문화와 문명, 종교를 강요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결과 에피파네스의 군대와 유대인의 애국지사들 사이 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모독된 후 마타디아스 와 그의 아들들은 모딘(Modin)에서 왕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산 속으 로 도망하였다.
3:1~9:22에서 유다 마카비우스가 주인공이다. 이 부분은 수리아 장군들과 싸워 아폴로니우스, 세론, 게오르기아스, 리시아스, 니카놀 을 패배시키는 그를 묘사하고 있다. 성전이 모독된지 3년 이내에 유 다와 그의 형제들은 제단을 재봉헌하고 전통적인 제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유다는 로마에 사신을 보내어 로마군과 협정을 맺었다. 유다의 정치적 야망은 후에 바리새파가 된 하시딤을 그로부터 격리시 켰다. B.C. 160년 유다는 수리아군 사령관 바키데스와의 전투에서 패 하고 살해된다.
유다의 막내 동생인 요나단이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그를 계승하였 다(B.C. 160~142). 9:23~12:53은 그의 지도력을 다룬다. 비록 요 나단이 오랫 동안 무기력했지만 결국에는 수리아의 장군 바키메스를 격파하였다. 그 결과 유다는 평화를 구가하였다. 요나단은 데메트리 우스 2세와 발라스의 적대관계를 이용하여 후자에게서 대제사장의 직 함을 받았다. 요나단은 또한 데메트리우스 2세와 안티오쿠스 2세 사 이의 적대관계를 이용하여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대단한 술수를 보여 주었다. 그의 형 유다와 마찬가지로 요나단은 여리고 근교에서 가진 연회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가 요나단의 대제사 장직을 계승하여 한 직위에 유대 나라의 정치, 군사, 종교적 지도력 을 통합시켰다.
다음은 마타디아스의 둘째 아들인 시몬(13~16장, B.C. 142-135 동안 지도자로 군림)이 유대인을 이끌고 수리아에 저항하였다. 그는 수리아 주둔군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하고 데메트리우스 2세와 또 다른 외국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 수리아는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원하 는 사두개파의 꿈을 간파하고 시몬을 장군이자, 분봉왕과 대제사장으 로 삼았다. 시몬은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그의 사위인 프톨레미에 의 하여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시몬의 세째 아들인 요한 힐가누스가 차 기의 계승자가 되었다.

 

(3) 본서의 저자
마카비 1서의 저자는 훌륭한 역사가이자 아마도 어떤 사건들은 직 접 목격한 증인인 듯하다. 그는 분명히 그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 건들과 인물들에 관한 1차적인 정보를 수집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사회심리학자로서 그는 그의 동족들이 커다란 승리를 얻기 위하여 수 행한 처절한 전투의 심층적인 의미를 파악하였다. 그는 수 많은 전투 에 참가한 사람처럼 팔레스틴의 지형과 지리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었다. 본서는 전통적인 이름들에 대단히 공정을 기하는데, 그 이유는 본서가 분명히 유대교의 자유수호자로 묘사된 마카비 일가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목표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마카비 1서는 반헬라 적이어서 수리아군을 하나님 백성의 원수로 묘사할 뿐 아니라 헬레니 즘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노력하는 배교적인 유대인도 원수로 묘사 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을 마카비 1서가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같은 문제 가 거론될 법한 곳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언급하지 않는 사실이 이상 하다고 여기고 있다. 사실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교리들이 거부 되는 것을 알고 있던 어떤 사두개인이 마카비 1서를 기록하였다고 추 론케 한다. 32) 그러나 왁스맨은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경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리들의 누락이 다른 이유들, 즉 마카비 1서 의 저자가 교리의 진술보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서술에 관심을 가 질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3)
(4) 본서의 현저한 특징
굳스피드는 마카비 1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 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갖는다. 34) 이러한 결여는 저자가 분명 불신앙 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 때 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독자는 하나님이 유대 국가의 운명을 인도하 고 계셨다는 신앙을 감지한다.
저자의 종교적인 관심은 또한 성전과 제사장직에 대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정결케함 보다는 율법에 대한 그의 관심 속에서 나타난다. 저 자는 종교적 자유가 부여된 이후에도 계속하여 정치적 자유가 또한 어떻게 획득되었는지를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마카비 1서에는 약 12개의 의정서와 조서들, 선언문들, 로마와 스 파르타에 보낸 서한들이 수록되어 있다. 만일 그 문서들이 진본이었 다면 그것들은 본서에서 말하는 연대보다 조금 뒤에 발표된 것이라고 굳스피드는 주장한다. 35) 대부분의 학자들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생각 하는 수리아 왕들의 조서는 어떤 다른 저술가가 마카비 2서 2:23에 언급된 구레네인 야손(Jason of Cyrene)의 역사에서 취하여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에 삽입시켰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14~16장이 원래는 본서의 일부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역은 『유대 고대사』에 서 마카비 1서를 매우 밀접되게 따르던 요세푸스가 13장 이상은 참고 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하여는 다른 참고자료를 인용한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에텔슨(H. W. Ettelson)의 『마카비 1서 의 완전성』 (Intergrity of 1 Maccabees)에서는 14~16장이 마카비 1서의 일부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본서의 원어
제롬은 그의 프롤로구스 갈레아투스(Prologus Galeatus)에서 히브리 어로 쓴 마카비 1서 사본을 본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들은 역시 아람어가 원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세계통의 사본 중의 어느 하나도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마카비 1서는 시내 사본, 베네투스 사본, 그리고 다른 몇 개의 사본들이 전해주듯이 70 인경의 형태로 현존한다. 벌게이트에 수록된 번역본은 옛 라틴어 사 본의 개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6) 본서와 구약 정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로마의 히폴리투스, 오리겐, 유세비우 스 모두는 본서를 성경의 하나로 언급한다. 애굽에서 이 책은 마카비 2서와 함께 클레멘트가 작성한 성경의 목록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70 인경에서 벌게이트로 전달된 마카비 1서는 중세가 끝날 때까지 구약 정경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7) 본서의 연대
마카비 1서는 B.C. 105년에 있었던 요한 힐카누스의 사망 직후인 B.C. 100년과 9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5. 마카비 2서

 

마카비 2서 (2 Maccabees)는 마카비 1서의 속편이 아니다. 루터는 이 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마카비 일가의 투쟁에 대한 하나의 두번째 책이지 그 두번째 책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카비 1서에서 발견 된 사두개파의 관점에 불만을 느낀 어떤 사람이 바리새파의 관점에 따라 하스모니안 왕조의 역사를 진술하였다고 주장한다. 마카비 일가 의 이야기를 마카비 1서의 취약성을 느낀 미상의 저자가 수정하여 바 리새파의 용어로 다시 기록한 것이다.
(1) 본서의 내용
마카비 2서의 양식과 강조점은 마카비 1서의 그것과 대단히 상이하 다. 마카비 2서의 저자가 마카비 1서의 내용과 친숙하였는지 아닌지 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간에 논쟁이 되고 있다. 마카비 1서가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반면에, 마카비 2서는 역사적 탐구 의 노력을 전하지 아니하고 단순히 구레네인 야손의 긴 역사서를 축 약시키고 있다(2:23). 마카비 2서의 범위는 마카비 1서에 비하여 제 한적이다. 하스모니 안가의 영웅에 대한 묘사는 유다에 국한되며, 요 나단과 시몬의 행적은 무시되고 있다. 저자는 본서의 귀결을 희극적 으로 하기 위하여 니카놀에 대한 유다의 승리로 그의 이야기를 결론 짓는다.
본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서론적인 편지들, 1:1~2:18. 2. 저자의 서문, 2:19~32.
3. 발홍기의 역사, 3:1~6:11.
4. 두 명의 순교자, 6:12~7:42.
5. 니카놀 사후의 발전, 8:1~15:36.
6. 결미, 15:37~39.36)
본서는 서두에 하누카 봉헌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애굽에 있는 유대 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편지 두 통을 삽입하고 있다(1:1~2 :16). 두번째 편지는 예루살렘의 제단에 대한 전설과 선지자 예레미 야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전한다. 뒤이어 나오는 저자의 서문에서 그는 마카비 전쟁에 대한 자기의 이야기가 단순히 하나의 약사라고 선언하고 있다(2:20~23). 설화는 두개의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1부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세 하에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3:1~10:8). 즉, 대제사장의 직책을 위한 투쟁들, 유대인을 헬라화하려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시도, 성전의 모독 사건, 수 리아군의 패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사망, 성전의 정화가 포함 되어 있다. 성전의 정화를 기념하는 절기의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제2부 (10:9~15:37)는 안티오쿠스 5세 유파터와 데메트리우스 1 세 치하에서 발생한 사건들, 즉 인접 족속들과 수리아인, 특히 니카놀 과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이 니카놀을 패배시킨 사건은 후에 니카놀의 날(the Day of Nicanor)이라 불리우는 절기의 제정을 초래시 켰다. 본서의 결론부(15:38~39)는 서론(2:20~23)의 재현이다. 본서의 목적에 대하여 저자는 친히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본서에서 우리 민족이 당한 재난의 기사를 읽고 실망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징벌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채찍질하시려는 것이었다. 악한 행동을 오랫 동안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즉시 징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인자 하시다는 표지이다. 주님께서는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를 즉시 벌하지 않고 그들의 죄가 막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 러나 우리 민족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 때마다 벌을 내 리셔서 우리의 죄가 절정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셨다. 따라서 주님께 서는 우리에게서 자비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채찍질하시는 것이 지 절대로 내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이 몇마디 말로 독자들은 진리 를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6:12~17, 공동번역).
(2) 본서의 연대
마카비 2서는 B.C. 12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된 것 같다. A.D. 40년에 사망한 필로(Philo)에게 이 저작이 알려졌었다. 클락은 저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B.C. 63년에 있었던 폼페이의 예루 살렘 함락 이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7) 어떤 학자들은 신약의 히 브리서에 끼친 영향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한다(히 11:35이 마카비 2 서 6~7장과 관계있는 듯이 보인다).
(3) 본서의 언어
중간사 기간의 문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양식에 근 거하여 마카비 2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본서에 소개된 두 편의 서신이 비록 히브리어의 표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 질지라도 역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4) 본서의 종교적 가치
저자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그의 독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들에게 팔레스틴의 동포들과 공통되는 유대인의 민족성과 종교에 대 하여 의식하도록 권고하고자 노력하였다. 저자는 순교자들과 자기들 의 나라와 믿음을 수호하였던 이들의 용기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그 의 권면을 계속한다. 그는 또 빛들의 축제와 니카놀의 날을 지키게 된 이유들을 설명한다.
38)
만일 마카비 1서가 사두개파의 관점을 표방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면 마카비 2서는 분명히 바리새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그는 결코 이야기의 도덕성을 지적하는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본서 가 말하는 신학의 가장 흥미있는 모습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교훈 이다. 사실상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교리는 본서가 몇 구절을 인용했으리라고 추정되는 (4:20~5:14) 솔로몬의 지혜서를 제외하고 중간사 시대의 문학 가운데서 여기서 만큼 명확하게 가르친 39) 곳은 없다. 마카비 2서에서 사후의 보상과 징계 (6:26; 7:36:12 :45), 죽은 자를 위한 기도(12:43, 44, 45), 성자의 중보에 관한 교리들이 가르쳐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