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3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헌

제12장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w.j.lee 2023. 5. 9. 13:37

제12장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1947년부터 지금 (1975년)까지의 28년은 중간사 문헌에 대한 괄목할 만큼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시켜주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다.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환한 빛을 던져줄 뿐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어떤 것은 팔레스틴의 역사상 페르샤 왕의 통치 기간에 대한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사해 동굴들의 발견은 팔레스틴과 근동의 고고학 가운데서 중추적인 발견을 이룬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1952 년에 한 무더기의 파편들이 비잔틴 왕조의 폐허가 있던 키르벳 미르드(Khirbet Mird)에서 발견되었다.

이 자료들에 수록된 언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팔레스틴의 아람어, 아랍어이며 그것들의 기원은 기독교 시대의 5세기와 8세기 사이로 연대가 추정된다.

 

사해에서 발견된 두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Wadi Darajah)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 (Murabba'at)의 두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 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의 문서들은 바르 코흐바(Bar Kochba)에 의하여 A.D. 131 ~ 135년에 일어났던 제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상당한 문서들이 거짓 메시야인 바르 코흐바의 군대로 부터 피신한 유대인들에 의하여 남겨졌다.

무라바아트 제1 동굴과 제 2동굴은 A.D. 1세기와 2세기에 기록된 단편적인 성경 구절의 다수를 보존하였는데

그것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약간의 법적 문서들과 바르 코흐바가 발송한 두개의 편지, 약간의 기타 문서들이었다.

1955 년 무라바아트 근처의 조그만 바위 틈에서, 쿰란에서 발견된 소선지서의 사본과는 달리 잘 보존된 소선지서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본과 실제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1962년 이른 봄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 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미국동양연구학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 search)는 여리고 북쪽 8마일 떨어진 무가렛 아부 쉬녜(Mugharet Abu Shinjeh)를 향한 이 동굴을 탐사하였다. 

두번의 원정 (1963년 1월과 1964년 2월)에 의하여 40개의 문서가 타아미레족으로부터 양도되었 다. 

그것들은 B.C. 331년에 알렉산더 대제의 로마군인들이 진주하기 전에 도피한

사마리아의 한 귀족이 운반해 온 것이었다.

그 동굴로 피신하였던 무리들은 그곳에서 학살당하였다.

이들 아람어 파피루스 들의 연대는 B.C. 375~335년으로 추정된다.

그것들은 아람어로 쓰여 졌으며 그 중 두개는 옛 히브리어(Paleo-Hebrew)로 쓰여졌다.

 

팔레스틴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이 파피루스들은 금석문학연구가 (epigraphist)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훙미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성문화된 자료가 없던 시기에 대하여 빛을 비춰주었다.

 

또 다른 그룹의 문서들이 1960년과 1961년 엔 게디 (En Gedi)의 남쪽 유대 광야에 있는 나할 헤버(Nahal Hever, Wadi Khabrah)와 나할 세 엘림(Nahal Se'elim, Wadi Seiyal)에서 탐사 중이던 히브리 대학의 고고 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1960년 "두루마리의 동굴”이라 불리운 하나의 동굴이 나할 세엘림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바르 코흐바의 시대에 누군가가 그곳에 거주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편지의 동굴" 이라 불리운 나할 헤버의 다른 동굴은 바르 코흐바 자신이 쓴 시편의 단편들과 15개의 파피루스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61년 50 또는 60통의 편지들이 더 발견되었다.

 

와디 쿰란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다섯번째 그룹의 자료들은 이따금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로 불리워진다. 

이 두루마리들은 앞에서 열거한 발견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4천개 이상의 단편들이 1947년부터 지금까지 조사되었던 259개 중의 각기 다른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그것들의 연대를 B.C. 200년 부터 A.D. 70년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쿰란의 필사본과 자료들은 가죽과 파피루스, 동판들로 되어진 것이다.

 

크로스(Frank Cross)는 쿰란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의 연대를 다음과 같이 크게 셋으로 분류한다. 즉, 

(1) 고대의 기간, 약 B.C. 200~150 년, 

(2) 하스모니안 왕조 기간, 약 B.C. 150~130년, 

(3) 헤로디안 왕조기간, 약 B.C. 30~A.D. 70년. 

크로스에 따르면 필사본의 대부 분이 하스모니안과 헤로디안 왕조 기간에 필사된 것이라고 한다.

어떤 동굴에서는 대부분의 사해 두루마리를 기록하기 위하여 고용된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서기관이 복사한 단편들을 보존하였는데 이것들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의 단편 위에 되어진 것이며,

고문서학자들은 B.C. 3세기나 4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연대를 추정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학자들에게 유용한 필사본들은 성격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구약성경 시대적인 것과 중간사 시대적인 것이 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특별히 제1, 제4, 제11 동굴에 서 발견된 것들이다.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제1 동굴은 주거하기 에는 너무 좁았으며 아마포로 싸고 토기(terracotta jar)에 넣은 두루마리들을 보관하는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이 동굴에서 일곱 개의 원어 사본과 70개의 번역본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타아미레족의 두 목동 이 우연히 잃어버린 염소들을 찾아 이 동굴에 들어갔었다.

제1 동굴 에서 발견된 중요한 필사본들은 하나는 전체를 담고 있고,

하나는 부분을 담고 있는 두개의 이사야 번역본과 하박국 주석』, 『공동체 규 칙』(Rule of the Community)이 있다.

완전한 이사야 두루마리와 함께 뒤의 두 필사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리아계 수도원의 대주교의 소유가 되었다.

그에 의하여 이 필사본들을 책으로 간행한 미국동양연구 학회에 넘겨졌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다른 필사본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의 수케닉 박사(Dr. Sukenik)에 의하여 입수된 것으로 서 이사야의 단편적 사본과, 어떤 종파가 결집한 감사의 시편 (히브리 어로는 호다욧-hodayoth),

역시 전쟁 두루마리』(War Scroll)로 알려진 소위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 사이의 전쟁사』(Order of the War between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라는 문헌이다.

제1 동굴에서 발굴된 첫번째 필사본은 처음에는 『라멕의 묵시록』 (Apocalypse of Lamech)으로 잘못 명명된 『외경 창세기』(Genesis Apocryphon) 란 책이다.

이것은 나쁜 상태로 보존된 두루마리의 파편으로 창세기에 대한 아람어 탈굼으로 예비판명된 것에 근거한 명명으로 세계 학자들에게 팔레스틴의 아랍어 연구에 보다 유익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일곱 편의 두루마리는 현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보관되어 있다.

 

같은 동굴에서 성경과 외경, 제의적이며 묵시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70개의 단편들이 나왔다.

제1 동굴의 단편들 가운데 구약에 관한 것으로는 미가, 스바냐, 시편에 대한 주석들과, 외경에 관한 것으로 는 희년서와 레위의 유언, 노아서의 부분들이 포함된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유대 사막에서의 발견』 (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 Oxford University Press)이란 제목의 총서로 간행되었다.

 

쿰란의 동굴은 성경적 자료들 (창세기, 시편, 애가)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이 동굴은 1952년 2월에 베두윈족(Bedouins)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러한 비밀스런 아랍인의 발견에 대한 소식을 세개의 예루살렘 고고학협회들로 하여금 쿰란 지역을 수색하는 조사단을 파송케 하였고 그들은 그 절벽에서 267개의 동굴, 혹은 구멍들을 조사하였다.

그 가운데 37개에서 공예품이 발견되었으나 단지 25개만이 쿰란의 공동체의 수도원과 관계있는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분명히 이 공동체의 일원들은 개인의 방이 아닌 공동으로 방을 소유하면서 수도원 주위의 동굴들 속에서 (또한 아마도 움막에서) 은둔자와 같이 생활하였을 것이다.

 

1952년 3월 14일 제3 동굴에서 소위 “동판 두루마리”(Copper Scroll) 란 가장 괄목할 만한 보물이 발견되었다. 

이 두개의 부분으로 되어진 두루마리는 영국 맨체스타의 공예학교(College of Technology)에서 한 줄씩 절단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사본은 A.D. 100년 경으로 추정된 원형 미쉬나 히브리어 (proto-Mishnaic Hebrew)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여리고 성내와 그 주변에 있는 여러 장소에 묻힌 보물들을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루마리와 쿰란 공동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쿰란 공동체의 중심부에서 200 야드 남짓 떨어진 곳의 제4 동굴에 서 결과적으로 많은 양의 문헌들을 발견하였는데, 약 3분의 1이 되는 400개 이상의 필사본들은 에스더를 제외한 현재의 모든 정경상의 책들이었으며, 이사야와 신명기, 시편의 많은 사본들이 있었다.

제4동 굴에서 발견된 상당량이 외경과 위경에 속한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된 문헌들이었다.

이 가운데는 토비트와 희년서, 여호수아의 시편, 위경 예레미야, 레위와 납달리의 유언, 열 두 족장의 유언의 후 편 자료들, 에녹, 외경 다니엘이 있다.

 

제4 동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가운데서 쿰란종파에 의하여 제작된 것들이 있는데, 

제1 동굴에서 발견된 것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인 「공동체 규칙』과 1947년 이전에는 오직 카이로의 옛 카라이트 회당(Old Karaite synagogue)에서만 발견된 다메섹 문서』 (Damascus Document),

그리고 법률과 제의, 미담, 축복서, 찬송, 쿰란 (아마 에세네파)의 지혜를 포함하는 다양한 책들이다.

제4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 가운데는 또한 미가, 시편, 호세아, 나눔과 같은 많은 구약책에 대한 "주석들"이 있었다. 제1 동굴 역시 미가와 스바냐, 시 편, 하박국에 대한 주석들이 발견되었다.

 

성경과 비성경적인 사본들의 작고 중요하지 않은 단편들이 쿰란의 제2, 제5, 제10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제2 동굴에서는 히브리어로 된 집회서의 조각들을 발견하였다. 

새 예루살렘의 묘사(Description of New Jerusalem)의 단편 하나가 제2 동굴과 제5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제11 동굴에서는 지금은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과 약간의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시편 두루마리 한 장도 있다.

또 다른 특출한 사본인 레위기는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그 책의 약 6분의 1이 수록되어 있다.

 

1. 훈련 규범

 

『훈련 규범』 (The Manual of Discipline, 히브리어로 Serek Hay-yahad). 혹 은 『공동체 규칙』은 학자들에게 쿰란 공동체의 기본 이상, 조직, 실제에 대한 아주 명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공동체 규칙』의 사본에 대하여 반 데르 플로에그(van der Ploeg)와 뷰로우스(Burrows)는 오히려 그것이 여러개의 원본에서 따온 부분들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다른 학자들은 하나로 보았다.

그것은 한 기둥(column)에 26줄로 이루어진 11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이 책에 대하여 엉거(Unger)는 이렇게 말한다.

 

1947년 필사본들의 원저장소에서 발견된 소위 『훈련 규범』은 이 방면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에세네파로 알려진 유대인의 종파가 실시한 규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지극히 중요한 이 문헌은 신약의 비평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리라고 기대된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훈련 규범』이 에세네파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이 그룹은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중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다른 유대인들이 혼란과 배교의 죄를 범하였을 당시에

그들은 율법과 하나님의 언약을 주장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최후의 심판이 임 하기 전에 사람들을 참된 길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에세네파는 그들 스스 로 “일종의 교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하나의 조직체로서 그들은 확정된 원칙들과 제도가 필요하였으며 이것들은 『훈련 규범과 『사독의 단편』과 같은 형태로 보존되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훈 련 규범』의 히브리어 명칭은 세렉 하-야하드(“공동체의 질서 "The order of the Community)이다.

에세네의 공동체에 가입한 자들은 악에서 떠나 의인의 길을 걷도록 가르쳐졌다.

초보자의 입단식(Initiation) 에 읽히는 『훈련규범』에는 의인에 대한 축복과 행악자에 대한 저주가 적혀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모세오경의 구절들, 즉 민수기 6: 22 이하와 신명기 37:13 이하; 29: 17~19와 다른 책들의 일부에서 뽑아낸 것이다.

『훈련규범」에 따르면 1년에 한번씩 쿰란의 모든 형제들 앞에서 한 차례의 시험이 치러지고 따라서 각자는 그 조직체 안에서의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연례 회집시에 구성원들은 작정된 진도에 근거하여 계급이 상향되는데 공동체의 규칙들을 계속 하여 위반하는 자들은 마침내 축출된다.

 

훈련 규범』을 읽어보면 쿰란의 형제단은 고도로 조직화된 엄격한 생활방식을 채택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자세한 내용이 묘사 되어 있다.

이 공동체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 평회원들이 있었다.

공동체의 모든 활동에 제사장 계급이 선행하였다.

공동체의 지도권은 3명의 제사장과 12명의 평회원이 장악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율법과 그 적용에 정통한 사람들이어야만 하였다.

10명이 한 그룹을 이루며 그 중에 한 사람은 꼭 제사장이어야 했고 평회원들은 그들의 서열에 따라 그 앞에 앉았다.

 

「훈련규범」에 보면 여인들과 아이들은 형제단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훈련 규범』에 이러한 진술이 나타난다. 

“그들이 오면 그들은 모든 도착자들,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그들의 귀 에) 언약의 규례들을 낭송할 것이다."

소년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20살이 될 때까지는 결혼의 허락을 받지 못한다.

 

형제단의 행정상의 책임자는 또한 작업을 할당하고, 회계를 보며, 특별한 공동회합에서는 사회자가 되는 감독도 있었다.

공동체에 가입을 희망하는 개인들은 검열관(파키드-paqid)에 의하여 시험을 받았다.

형제단의 판정관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4명의 제사장과 6명의 평회원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하기서 (the Book of Hagi 또는 Hagy)와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다.

 

『훈련 규범』에 따르면 이 사회의 정식회원이 되기 전에 초보자는 세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초보자는 맨 먼저 검열관 앞에서 왜 그가 다수의 공동체(Community of Many)에 가입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시험을 받는다.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기간이 경과된 후에 다수의 회원들은 그에 대하여 토의하고 그를 가입시키거나 거절하는 일을 한 다.

만일 그가 용납되었다면 그는 공동체의 회원(Party of Community)으로 한 단계 높아지지만 아직 다수의 순결 (Purity of the Many)의 단계에 가세하지는 못한다.

만일 형제단의 정회원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초보자는 1년 후에 더 높이 올라간다.

1년간 계속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초보자는 이제까지 공동의 소유가 아닌 자기의 것으로 인정된 모 든 세속적인 소유와 재물을 감독에게 양도한다. 

이 단계에서 그는 메시야 대망의 연회(Messianic banquet)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지만 다수의 순결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다.

만일 이 단계의 마지막에서 그가 정회원의 자격이 있다고 판정되면 그는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의 계급에 임명되고 그의 재물은 공동기금에 추가된다.

만일 그가 청원하면 그는 조언을 하는 일도 허락받는다.

이때 그는 하나님앞 에서 언약을 세우는데 “그가 명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고 벨리알이 통치 동안 겪게 될 역경과 공포, 시련 앞에서 계속하여 그를 좇을 것" 을 서약한다.


언약을 세우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통적인 고백을 한다. 

“우리는 진리를 좇는다 하면서 패역하였으며 악한 일들을 행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오니 우리와 우리의 열조에게 그의 심판을 [행하셨나이다].

그리고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그의 자비를 베푸시나이다."

 

2. 다메섹의 사독문서

 

1897년 옛 카이로(Old Cairo)에 게니자(genizah, 회당의 창고)에서 『훈련 규범』과 관계있는 한 문헌이 발견되었다. 

뉴욕의 유대인 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의 교장인 쉐흐터(Solomon Schechter)는 카이로 게니자에서 발견된 어떤 단편들이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유사 하다고 판정하고 그것들을 『사독의 작품의 단편들』(Fragments of a Zadokite Work, Cambridge, 1910)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훈련 규범』과 마찬가지로 다메섹 문서』(Damascus Document)는 일종의 결집형태를 취한 것이다.

밀릭(Milik)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결집의 연대와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상당히 다양한 가정들이 제시되었으며 그 연대는 마카비 이전 시대부터 중세에 훙하였던 카라이트 종파 (Quraites 또는 Karaites)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추측되고 있다.

『훈련 규범』이 출판되었을 때 즉시 학자들은 이 책과 다메섹 문서』 로도 알려진 『사독의 단편』 (사독의 작품에 묘사된 집단이 다메섹으로 이주했었기 때문에) 사이의 유사성을 간파하였다.

 

브라운리(Brownlee) 교수는 “기독교 이전의 종파들과 언약자들의 사해 두루마리 비교"(A Comparison of the Covenanters' Dead Sea Scrolls with Pro-Christian Sects)에서 두 문헌에 담긴 언어와 사상들의 유사성이 어떠한지를 보 여주었다.)

두 문헌들에는 “의의 선생" "거짓의 사람”, “새 언약", “공동체”, “사독의 아들들”, “공동체의 사람들”이란 용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이 쓴 문헌들 가운데서는 어느 곳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은 "하구의 책"(The Book of Hagu)이 “규칙" 또는 "질서" 란 흔치 않은 의미로 사용된 “세렉"이란 단어와 함께 『다메섹 문서』 와 『훈련 규범』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쿰란 동굴들에서 발견된 단편들이 다메섹 문서』의 일부임이 판명 되자 이러한 동일시한 견해가 확실해졌다. 

제6 동굴에서 『다메섹 문 서』5:18~6:2과 일치되는 단편들이 발견되었고 제3 동굴에서 『다메섹 문서』의 A 사본의 7 문서에 속하는 단편들(fragments of seven documents of Text A)이 발굴되었다.

동일한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 리 가운데서 빠져있는 『훈련 규범』의 제1부에 속한 상당한 부분이 이 단편들 가운데 있었다.

4쿰란의 견본이 제공하는 본문은 약간의 가치 있는 첨가내용이 있는 카이로에서 발견된 교정본 A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쿰란의 제4 동굴에서 다메섹 두루마리의 일부가 발견된 것은 이 책의 교훈들이 쿰란 공동체에서 기원된 것을 말해준다고 믿고 있다.


3. 빛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

 

앞의 두 문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두루마리는 『빛의 아들들과 어 두움의 아들들의 전쟁』(War of the Sons of Light and the Sons of Darkness), 혹은마지막 전쟁의 규칙』(Rule for the Final War)이다.

이 필사본은 19개의 기둥과 상당수의 작은 단편들로 이루어졌는데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의 레위, 유다, 베냐민의 세 지파의 연합세력과, 에돔과 모압의 군대, 그리고 암몬 족속, 블레셋 족속, 앗수르의 "키팀”(Kittim)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계속 하여 빛의 아들들은 야벳의 후손들(그리스인)에 대적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키팀"과 전쟁을 벌인다.

이 종말론적인 전쟁에서 처음에는 이편이, 나중에는 저편이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빛이 아들들이 벨리알의 아들들과 싸울 것이며 세번은 전자가 후자를 이길 것이다.

그러나 일곱번째 여호와는 어두움의 아들들이 패배하고 불복하게 하신다.

전쟁의 규칙은 환상과 실제가 뒤섞인 저작의 하나이다.

이것은 묵시록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것이 은밀한 계시의 형태로 역사를 상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의 묘사가 현대 독자들에게는 허황되고 비실제적으로 보여진다.

쿰란의 언약자들 자신들이 마지막 세대에 살고 있으며 언젠가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에 묘사된 것과 같은 전쟁을 수행하도록 소집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듯이 보인다.

 

야딘(Yadin)에 따르면 군대가 무장한 무기와 장비가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 세기에 팔레스틴에 주둔한 로마군인의 것과 똑같이 묘사되었다고 한다.

 

제4 동굴에서 발견된 각기 다른 세개의 필사본의 단편들은 마지막 전쟁의 규칙과 동일한 본문을 사용한 듯이 보이지만 다른 두개는 그렇지 않고 다른 듯이 보인다.

하나에 나타난 상이점들은 그 본문에 대한 또 다른 고정본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이점들은 이 작품의 찬송부분에서는 더욱 현저하게 서술적인 부분에서는 별로 없다.

야딘은 서술적 부분이 로마군의 전술학에 근거한 군사적 문헌에 의존한 듯이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묵시적 군대의 묘사는 헤롯의 군대를 위하여 준비된 교범을 이용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다.

밀릭은 말하기를

“이러한 엄격한 군사교범은 아마도 성전을 위한 제사장의 필독서(vade mecum)였으며,

이러한 군대의 묘사는 다양하게 확대되었 으며, 특히 찬송 부분에서 그러하였다”라고 한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원본의 3분의 2 이상, 또는 심지어 2분의 1 이상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편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공회(the Restored Congregation_of Israel)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메시야에 의해 주관된 연회석에서 낭독된 의정서 (protocal)에 대한 묘사가 있기 때문에 학자 들의 흥미를 자아낸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이상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본은 마치 기름부은 왕이 배석 하면, 대제사장이 첫 자리에 임석하고 식사 전에 은혜를 선포하는 것 이 그의 특권인 듯이 말하고 있다.

 

4. 감사의 시편

 

쿰란의 제1 동굴에서 발견된 그 종파의 제3의 문헌은 「감사의 시 편』(Thanksgiving Hymns)이며, 

이 명칭은 최초의 편집자에 의해서 호다 욧(Hodayot, 히브리어로 감사란 뜻)으로 명명되었다. 

「감사의 시편의로 내용을 수록한 부가적인 필사본이 쿰란의 제4 동굴에서 발견되었 다.

 

이 형제단은 히브리어 시의 시편에서 보여지는 특징을 지닌 자체의 찬송책을 소유하였던 듯이 보인다. 

제1 동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가운 데 하나는 18개의 기둥과 상당수의 단편들을 갖는데, 이 단편들은 탐구되고 번역되었다.

 

개스터(Gaster)가 주장하고 있는 대로 각 시의 끝에는 여백이 있었지만 각 필사본의 끝부분이 부식되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어느 곳에서 하나의 시가 끝나고 다른 시가 시작되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주 장한다.

 

어떤 찬양시는 “주님, 당신께 감사드리옵니다”이란 문구로 시작하며 반면에 다른 시는 “찬양을 받으소서"라는 형식을 취한다. 

고대에는 "감사"와 "찬양"의 범주에 속하는 의식상의 노래집이 있다. 

따라서 개스터가 주장하는 대로 이 찬양시집에 적당한 제목은 “찬양과 감사" (히브리어로는 Beraschoth we Hodayoth)가 될 것이다. 

 

형제단의 모든 문헌들 가운데서 「감사의 노래』가 가장 독창적인 것이다.

이 노래들은 형식과 용어에 있어서 구약과 유사하다.

학자들이 이 시편의 결집에 대한 배경과 상황에 대하여 단정짓기가 어렵다.

35 편의 노래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핍박이란 혹독한 역경 속의 저자를 보여주며 그는 그의 생애를 간섭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어떤 몇 개의 감사 찬송을 지은 이로는 '의의 교사'로 추정하고 있다.

 

5. 창세기의 미드라쉬

 

쿰란의 제1 동굴에서 발견된 일곱개의 독창적 사본 가운데 하나는 학자들이 처음에 “라멕의 두루마리”(The Lamech Scroll)라고 부른 것 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파괴된 두루마리의 몇 개의 조각에 근거하여 학자들이 해독할 수 있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11 월 8일, 히브리 대학교의 마이슬러 (Maisler) 교수는 신문기자들에게 이 사본의 다섯개의 기둥과 그 번역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비가드 (Avigad)와 야딘(Y. Yadin)은 창세기에 대한 미드라쉬를 해독하여 『창세기 외경: 유대광야에서 발굴한 두루마리』(A Genesis Apocryphon: A Scroll from the Wilderness of Judea)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것은 미 드라쉬의 형태로 씌여진 창세기에 대한 정교한 진술을 담고 있으며 팔레스틴의 아람어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저자는 그의 기초자료로 창세기의 히브리어 본문을 취하고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 하여 그것을 확대시켰다.

히브리어 사본이 일곱줄 반을 사용한 내용을 미드라쉬의 저자는 아람어를 사용하여 30줄로 확대시킨다.

 

6. 동판 두루마리

 

1952년 3월 15일 쿰란의 제3 동굴에서 특기할 만한 보물이 발견되 었는데 이것은 두드려서 펼친 구리로 된 두개의 녹이슨 두루마리, 즉 동판의 두루마리 형태였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녹이 슨 동판의 둘둘 말린 것을 펴는 방법을 고안해내기 수년 전에 발견되었다.

맨체 스타의 과학기술 대학에서 개발된 특수한 기술에 의하여 두루마리가 작은 띠로 절단되었다.

1956년 6월 1일, 이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하여 최초의 발표가 있었다.

 

이 문서의 12개 기둥이 동판의 띠에서 발견되었다. 

동판 두루마리는 보물의 목록과 그 보물들이 숨겨진 위치를 수록하고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보물은 금과 은, 기타의 귀금속으로 약 200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60가지의 각기 다른 보물들이 열거되고 은밀히 보관된 곳으로 주장된 장소도 수록되어 있다.

크로스(Cross)는 이 발견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보물의 터무니 없는 양과 숨겨진 장소의 허황되고 전설적인 성격의 두 요소는 이 문서가 지닌 민간 전승적인 성격을 증명해준다."

쿤(Kuhn)과 듀퐁-좀머(Dupont-Sommer)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보물의 위치를 기록하기 위하여 값비싼 순동의 두루마리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동판 두루마리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다양한 대답이 제시되어 왔다.

“동판 두루마리"와 작은 동굴들에서 발견된 자료들은 『유대 광야에서의 발견』(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의 제3권에 수록 발간되었다.

 

7. 쿰란에서 발견된 주석서들

 

성경에 관한 저작들은 유대교의 인물들이 행한 연구의 가장 귀중한 자료였다.

따라서 구약에 대하여 특별한 연구를 행한 에세네파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이 자신의 시대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기 다른 책들에 대한 주석들은 학자들이 논쟁한 정확한 의미와 그들이 제시한 다양한 설명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선지서 하박국에 대한 주석이며 그 안에는 “의의 교사”, “악한 선지자”, “거짓의 사람”, “압살롬의 집" 과 같은 명칭들이 나온다.

단편적인 『미가의 주석』과 『나의 주석』 은 역사적 언급이 거의 없다.

 

8. 하박국 주석

 

『하박국 주석』 (The Habakkuk Commentary)은 1947년에 발견된 쿰란 필사본들의 최초의 저장소에서 보존된 것이다.

이 필사본은 길이 5피트, 폭 7인치로 밑의 옆부분이 곤충에 의해 먹히운 자국이 있다.

이 필사본은 하박국의 예언을 한절 한절씩 해석하고 있다.

주석의 저자는 형제단의 역사와 연관시켜서 모든 것을 해석하였다.

주석가는 하박국의 예언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모든 주석들이 “해석”(interpreta- tion)이란 종파적인 유형이라 불리우는 모습을 대단히 심하게 보여주는 것이 발견되었다.

즉, 이 주석들은 진정한 의미의 성경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성경의 배후에서 읽고자 시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보면 독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해석: 악한 제사장에게, 그가 가난한 자에게 행한 것이 그에게 돌아온다.

레바논은 공동체의 회의(the Coun cil of Community)이며 짐승은 유다의 연약한 자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IQ1 12:1~5 하박국 2:17에 대한 주석.


하박국 주석은 미국 동양연구학회에 의하여 1950~51년에 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두루마리 제1권,

이사야 필사본과 하박국 주석 (The Dead Sea Scrolls of St. Mark's Monastery,  Vol. 1, The Isaiah Manascript and the Habakkuk Commentary, New Haven, 1950)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주석의 번역판으로는 뷰로우스(Millar Burrows)의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pp. 365~370을 보도록 권한다.

 

이사야와 미가, 스바냐, 호세아, 시편에 대한 주석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작은 단편들 뿐이다. 

의의 교사와 그의 적대자는 미가의 주석과 시편 37편의 주석에서 언급되고 있다.

 

9. 성전 두루마리

 

1967년에 있었던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사해 두루마리로 알려진 가장 긴 두루마리를 입수하였다. 

이것은 길이가 8.6m, 혹은 28피트 이상이어서 7.3m인 완전한 이사야 사본과 대조를 이룬다.

성전 두루마리(the Temple Scroll)의 초두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고 이 두루마리의 일부분이 전해지지 않지만 모두 66개의 기둥이 보존되어 있다.

야딘(Yigael Yadin)은 성전 두루마리가 어느 정통한 서기관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믿으며 이것의 결집 연대를 B.C. 1세기 후반이나 기독교 시대 1세기 초로 추정한다.

사실은 B.C. 2세기 말 정도의 이른 시기로 이 두루마리의 연대를 잡을 확실한 이유들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독특하다.

 

이 내용은 네 가지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1. 모세오경에 언급되는 다수의 주제들에 대한 상당수의 할라호트(Halakhoth-종교적 규례들)가 포함되 어 있으며, 모세의 토라가 첨가와 삭제 또는 변형되어 인용되고 있다.

2. 이 두루마리는 다양한 유대인의 절기 때에 드려진 제사와 제물들의 목록을 싣고 있다.

3. 성전 건축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있다.

4. 성전 두루마리의 마지막 부분은 각 지파에서 1,000명씩 차출된 12,000명의 왕의 경호대를 묘사하고 있다.

 

성전 두루마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규례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며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따금 저자는 오경 본문의 3인칭을 1인칭 단수로 고쳐 쓴다.

4자어(四字語, Tetragramma- ton)인 YHWH란 하나님의 성호가 항상 두루마리 본문과 동일한 문자 로 쓰여져서 YHWH를 팔레오- 히브리어로 쓴 다른 쿰란 두루마리들 의 통례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 두루마리에서는 오경 전체에 분산된 율법들이 한 자리에 모아져 있으며, 이 사실은 이 두루마리가 종파 이며 논증적이란 점을 증명해준다.

 

야딘은 이 서기관이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쿰란에서 보편화되었고 또 희년서 저자가 사용하였던 특별한 달력을 고집하고 있다.

성전 두루마리는 장막절과 유월절, 대속죄 일이 지켜진 방법에 대한 자세한 논쟁을 수록하고 있다.

쿰란에서 유행하였던 달력은 매달이 30일이며, 매 석달마다 하루씩이 첨가되어 1 년이 364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월의 첫날은 정규적으로 화요일이 되었다.
두루마리의 잘 보존된 부분은 미래에 건축될 성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새 성전 건축에 대한 지시는 장막의 축조를 다룬 출애굽기 35 ~40장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미래의 성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는 헤롯의 성전의 규모와 일치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야딘은 쿰란의 종파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고 주장한다.

두루마리의 상당부분이 도시 자체의 정결과 불결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다.

제4부는 왕의 경호대를 다루며 “이스라엘의 땅"을 근절시키고자 원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군대 동원계획을 개괄하고 있다.

야딘은 군사의 묘사와 전쟁을 묘사하는 용어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의 중기나 말기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성전 두루마 리에서 묘사된 군사동원과 전쟁 수행을 위한 규례들은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에서 발견되는 규례들과는 상이하다.

 

10. 마사다에서의 발견

 

유대 광야에 있는 마사다(Masada)에서의 대대적인 발굴은 A.D. 70 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수년에 대한 귀중한 문헌들을 얻게 하였다.

히브리 대학교의 야딘의 지휘 아래 1963~64년과 1964 ~65년에 있었던 문헌상의 발견은 최초의 유대인 반란 시대의 것들이 었다.

A.D. 73년에 유대인들이 장악한 헤롯 왕조의 요새가 로마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

증거자료들은 이 때에 거의 1천명에 이르는 유 대인들이 노예로 잡혀가 고생하기 보다는 자결하였음을 보여준다.

마사다에서 발견된 중요한 문헌은 집회서의 히브리어 사본이었다.

이 필사본은 B.C. 75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시편과 레위기, 창세기의 단편들도 발견되었다.

이들 단편들의 성경상의 내용들은 무라바아트 (Murabba'at)의 성경 필사본과 유사하다.

마사다에서의 가장 흥미있는 발견 중의 하나는 “안식일 제사의 노래 두루마리"(Scroll of the Songs of the Sabbath Sacrifice)의 사본으로 쿰란의 제사 동굴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11. 바르 코흐바 반란

 

유대 광야에서 저술된 문헌들은 A.D. 132~135년에 있었던 바르 코흐바(Bar Kochba)의 반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증가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자신이 쓴 편지에 의하여 바르 코흐바가 시므온 벤 코시바(Simeon ben Kosiba)로 불리웠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조상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랍비 아키바(Akiba)는 “바르 코흐바" (별의 아들)란 이름으로 그를 메시야인 왕으로 선포할 책임을 부여받 았다.

그러나 모든 랍비들이 아키바의 입장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제 2차 반란의 초기에 로마군은 유대 전역에서 축출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 유대인이 장악하였고, 성전에서의 제사의식(祭司儀式)이 재현되 었으며, 이스라엘은 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고, 이를 알리기 위하여 주화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A.D. 133년, 세베루스(Julius Severus) 장군의 지휘 아래 3만 5천의 로마군은 황제 하드리안의 명을 따라 공격해왔다. 

로마군단은 먼저 갈릴리로 진군하고, 그 후에 예즈레엘(Jezreel) 계곡을 탈환하고, 이어서 유대산지를 정복한 뒤 마침내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였다. 

A.D. 135년 베탈(Bethar)에 있는 바르 코흐바의 최후의 요새가 침공당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유대인이 장악하였던 요새의 모든 언덕과 동굴이 탈취되었다.

 

사마리아인의 배반과 식수의 부족 중의 어느 하나에 의하여 베탈 요새는 함락되었고, 바르 코흐바는 살해되었는데 아마도 뱀에 물려 죽은 듯하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포함한 베탈의 전 안구가 거의 학살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50개의 요새와 985개의 마을이 초토화 되고 반란의 결과로 58만명이 죽었으며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질병과 기아로 죽었다. 

유대는 폐허가 되었으며 전체 인구가 괴멸되었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도시가 되어 유대인에게 거룩한 성에 들어오는 일 조차 금해졌다.

 

나할 헤버와 나할 세엘림에 있는 무라바트 동굴들은 제2의 유대인 반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이 운명적인 몇년 동안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하여 더 자세한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서신들과 문헌들을 제공 하고 있다.

1952년 와디 무라바트(Wadi Murabba't)에서 바르 코흐바가 예수아 벤 갈골라(Yeshua ben Galgola)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후자는 갈릴리인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바르코 흐바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는 바르 코흐바가 그의 휘하 지휘관에게 직접 명령을 시달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절대적인 복종을 기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60년 히브리 대학교의 발굴단은 나할 헤버의 수 많은 동굴들을 탐사하였다. 

이 동굴들 가운데 하나에서 끈으로 묶은 조그만 상자를발견하였는데 이 안에는 바르 코흐바가 발송한 15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9통은 아람어로, 4통은 히브리어로, 2통은 헬라어로 쓰여졌다.

한 편지는 4개의 목판에 쓰여졌다.

히브리어로 된 편지 모두가 각기 다른 필체였고, 바르 코흐바의 서명이 없었으며 이것은 그것들 이 서기관에게 구술되었음을 보여준다.

 

바르 코흐바가 발송한 편지들은 제2차 유대인 반란에 대한 많은 불명료한 관련사들을 밝혀주었다.

그것들로부터 학자들은 바르 코흐바가 다루었던 각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처음으로 132 ~135년 사이에 벌어진 반란 기간에 포함된 유대의 마을 이름들이 알려졌다.

엔게디 (En Gedi)는 바르 코흐바의 경제와 군사의 본거지였다.

바르 코흐바는 자신을 "모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동굴의 해골에 덮은 순전한 양털의 옷과 숙곳(Succoth)의 축일을 그들이 준비한 점이 지적하듯이 반란군은 유대교를 진지하게 신봉하는 유대인들이었음이 편지를 통하여 분명해졌다.

새로운 문헌 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이 그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는 보트니야 바르 미아사(Botniya Bar Miasa)라 하면 일반적으로 오직 모세와 유다에게만 붙여진 칭호인 라베누(Rabenu)라고 불리웠다.

새로운 문헌들은 또한 제2차 반란이 단지 정치적일 뿐 아니라 종교적이었음 도 보여주었다.

 

유대 광야의 많은 동굴들에서 많은 가정용품들, 즉 요리용 집기들과 직물들, 가구들, 의복들이 발견되었으며

이것들은 바르 코흐바의 반란 기간에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생활에 대한 새롭고 가치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