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제 3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 문헌

제11장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

w.j.lee 2023. 5. 9. 13:37

제11장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

 

예레미야 시대 이후부터 유대인의 한 식민지가 애굽에서 정착하였음이 항상 발견되어 왔었다.

B.C. 587년 예레미야를 강제 동반하여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은 엽(Jeb), 혹은 엘레판틴에 세워진 군사적 식민지를 이끌어간 후예들의 조상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B.C. 525년 보다 얼마 전에 신전을 건축하였다.

알렉산더 대제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던 B.C. 332년은 애굽의 그리스의 식민지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이 때부터 유대인들은 이 거대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A.D. 1세기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서 2 개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졌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헬라어를 사용하였는데 그들은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번역본이 필요하게 되었다.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이 필요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유대인들에게도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이 필요하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Septuagint, LXX)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70인경은 한 개인의 번역활동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히브리어 구약의 24권을 코이네 헬라어 (Koine Greek) 로 번역하는데 1백년 이상을 종사한 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번역본의 내용이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히브리 성경의 사본을 추가하기 위한 것보다는 유대인 민중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70인경이 번역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구약이 외국어로 번역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번역본이 나오게 된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B.C.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여러 고대의 기록들이 일치하고 있을 뿐이다. 

번역에 사용된 언어는, 번역자들이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이었으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70인경 본문의 인용이 B.C. 200년 이전의 그리스 문헌에 서 발견된다는 것을 증거해준다.

 

70인경의 기원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가 어떤 필로크라테스(Philocrates)에게 보내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에 묘사되고 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왕 프톨레미 2세 필라 델푸스(B.C. 285~246)가 그의 도서관장인 데메트리우스 팔레루스(De. metrius Phalerus)의 제언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왕립도서관에 유대인의 토라, 혹은 율법책을 비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애굽 왕의 요청에 따라 각 지파에서 6명의 장로들을 선발하여 보냈으며 그들은 매일 각자에게 할당된 부분을 번역하여 72일만에 완성시켰다.

이들은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각자가 한 번역을 비교하여 모두의 번역이 일치하도록 하였다.

후에 기독교 작가들은 이 이야기를 미화하였다.

그리하여 보다 후에 출간된 이 이야기는 72명의 서기관이 각자의 독방에서 번역하여 동일한 번역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미 필로(Philo)의 시 대에 이렇게 수정된 전설이 널리 전해졌다.

 

현대의 70인경 학자들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실린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세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고대사』(XII, 2, 1~13)와 아피오넴에 반대하여』 (Contra Apionem)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서 따온 것 같다.

B.C. 125년 경에 쓰여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비역사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면이 있다.

아리스테아스 이야기는 그 번역본이 필라델푸스의 때에 이루려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불확실성을 말하고 있다.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미 2세 필라델푸스의 치세 때는 도서관장이 아니었다.

필라델푸스는 왕위에 오르자 데메트리우스가 애굽 왕에 다른 사람을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추방하였다.

또 다른 오류는 왕을 방문한 유대인 사신을 위한 왕의 연회에 에레트리아의 메네데무스(Menedemus)가 참석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메네데무스는 프톨레미 1세의 통치가 끝나기 2년 전에 사망하였었다.

 

모세오경(Pentateuch)은 의심할 바 없이 번역된 히브리어 구약의 앞 부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이 보기에 모세오경은 구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회당의 예배에서 다른 어려운 책들은 단지 부분적으로 낭독된 반면에 그 책은 3년 동안 계속 낭송하도록 된 계획(triennial lectionary plan)에 따라 안식일마다 계속 하여 읽혀졌다.

아마도 처음에는 각각 다른 모세오경의 번역본이 여러개 있었을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것이 유대인을 위하여 필요하였으며 아킬라(Aquila)가 이것을 위하여 착수하였다. 

원래는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그는 A.D. 2세기 초반에 살았다.

그의 번역은 새롭게 정리된 히브리어 사본을 따랐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를 독창성이 없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거의 헬라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각개의 단어들은 헬라어이면서도 헬라어 구문법과 작문법에 따라 배열되지가 않았다.

그의 번역 가운데 흥미있는 한 가지는 이사야 7: 14인데 그곳에서 그는 히브리어 "알마"(almah)를 헬라어 "파르테노스"(partenos, '처녀') 대신에 "네아니스"(Neanis, '젊 은 여인')로 번역하였다.

70인경은 파르테노스로 번역하며 마태복음 1:23에 나타난대로 기독교적 해석과 조화를 이루었다.

 

A.D. 2세기 말엽 또 다른 유대교 개종자인 테오도티온(Theodotion) 은 또 다른 구약의 헬라어 역본을 내어놓았다. 

테오도티온은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지 않고 기독교 이전 시대에 나왔던 헬라어 역본을 A.D. 100년의 새 표준 히브리어 사본에 따라 개역한 것으로 믿어진다.

테오도티온의 다니엘서 역본은 Greek Bible의 다니엘서를 위한 표준문서로 채용된 역본이기도 하다.

다니엘서의 70인 역본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필사본은 오직 두개 뿐으로 초서체 87(A.D. 9~ 11세기, 로마의 Chigi 도서관에 소장)과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Chester Beatty Papyri, A.D. 3세기)가 있다.

 

테오도티온 이후의 또 다른 히브리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은 에비 온파(Ebonites)라는 유대인의 기독교 종파에 속한 심마쿠스(Symmacus)에 의하여 번역되어졌다. 

아킬라의 번역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심마쿠스는 숙어적(idiomatic) 헬라어 역본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70인경은 히브리 구약성경의 본문연구를 위하여 가치있는 번역으로 간주된다. 

파이퍼(Pfeiffer)는 많은 경우에서 70인경은 히브리어 사본들보다 더 믿을 만하고 더욱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70인경 을 사용하는 본문 비평주의 학자들은 70인경의 본문을 담고 있는 초기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둥 문제삼는다.

70인경의 모든 현존하는 필사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필사되었으며 기독교회 내에서의 사용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파이퍼는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 이전 시대와 초대 기독교 시대의 70인경은 그 실체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이 받아들여 지고 있을지라도 헬라어 성경의 인쇄본이나 심지어 필사본으로 보존 된 헬라어 사본을 70인경으로 말하는 것은 무비판적인 행동이다."

로버츠(Roberts)는 기독교 시대 이전에 70인경의 한 사본이 표준화되 었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그들의 교육적이며 선교적 프로 그램 가운데 사용되고 필사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의 결과로 다른 다양한 번역본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70인경에 대하여 말할 때면 주의할 사항이 있다. 

어떤 현대학자들은 70인경을 단일한 작품으로 주장하거나 언급하는 것은 하나의 허구 (fiction)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번역된 많은 책들의 다양한 번역본들의 결집(collection)이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번역본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혹자가 이러한 주장을 채용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70인경이 한 번역자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맥켄지(McKen zie)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분명히 번역이 단일한지도 아래서 실시되었다고 주장할 불가피한 이유는 없다. 유대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구약의 일부로서 모세 오경이 제일 먼저 번역되었으며 이것이 의식에서 사용되기 위하여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적어도 다른 책들 가운데 서 몇 책이 사적인 번역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박카리(A. Vaccari)는 히브리 원본의 한 번역으로서 70인경의 여러 책들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아가서와 전도서는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모방이 대단하며, 시편과 선지서(다니엘 제외)는 문자적이고, 모세오경과 역사서는 충실하며, 욥기와 잠언, 다니엘, 에스더는 의역이거나 제멋대로이다.

헬라어 어법의 관점에서 평가해보면 잠언이 최상이고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이사야는 평범하며, 다른 책들은 열등하다.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해보면 모세오경이 최상이고, 이사야와 소선지서, 잠언은 최하이다.

박카리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 70인경의 번역은 하나의 번역으로서는 잘 되어진 것이 아니며 어떤 관점에서 보면 불충분하다.

이 번역 사업은 현대의 번역가들이 사용하는 현대적인 도구들, 즉 사전류, 문법서, 성구사전류,

그리고 학자들이 쓴 주석들을 갖지 못한 개인들에 의하여 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매우 정통하다거나 헬라어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였다.

 

열왕기는 "5명의 각기 독특한 특징을 자닌 다른 번역자들의 작품임을 반영하며 여기에는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1:1~ 11:1, 11:1~열왕기상 2:11 ,2:12~12:43, 22:11~11, 22:1-열왕기하를 포함하고 있다.” 

독자들은 쉽게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 성경의 욥기는 맛소라 사본보다 6분의 1이 더 짧아 누락될 구성들이 있는 데 이것들은 70인경의 최신판인 테오도티안 번역에서 보충을 받는다.”

잠언의 헬라어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해볼 때 상당한 변질이 있다.

이 사실은 "잠언은 ... 자유스런 번역이 문자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 개역자를 통하여 상당히 확대되어졌으며 ... 이 중어적(doublet) 번역들이 첨가되었다”라는 것을 말한다.

도서의 본문은 대단히 문자적이며 무미건조하고 아킬라 번역의 영향을 받은 것 처럼 보인다.

70인경의 에스겔은 매우 문자적이며 히브리어가 충분 히 이해되지 않았고 이따금 왜곡되었음을 보여준다.

 

헬라어 성경의 예레미야는 키텔(Kittel)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Biblia Hebraica)에 실린 현재의 히브리 본문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사본에 기초하여 번역되었다. 

70인경의 본문에는 2,700개가 못되는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장의 배열도 차이가 난다. 

70인경의 다니엘은 지금은 두개의 사본만이 쓸만하다.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 초까지, 기록연대가 고대 것이 아니면 다니엘서의 데오도티안 이전 사본(Ur-Theodotian text)을 대신 사용하였음에 틀림없다."

 

어떤 학 자들은 헬라어로 된 다니엘의 각기 다른 두 사본이 나란히 존재하였으며 테오도티안에 수록된 것은 11세기의 Chigi 필사본과 967/968년 의 Chester Beatty에서 발견되는 어느 한 사본을 편애하여 필사된 것 이다.

헬라어의 이사야는 그것이 신약에 인용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 의 변증론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에 의하여 특별히 연구되어온 주제였다.

“이 번역은 매우 자유스러우며” 맛소라 사본의 본문 비평을 위한 목적에는 쓸데가 없다.

 

맥켄지는 “70인경이 유일한 번역은 아니며 구약의 최초의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탄생 전 수세기 동안 구약의 초기 책들에서 발견되는 신인동형동설(anthropomorphisms)와 신인동정동설 (anthropopathisms)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손"은 "권세" 로 되었고 “반석”은 "도움"으로 되었다.

 

대부분의 70인경 학자들은 70인경을 번역시에 사용하였던 히브리어 사본은 오늘날 알려진 맛소라 사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70인경과 맛소라 사본 사이의 차이점들은 번역상의 오류나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게만이 주장하기를 “70인경은 맛소라 이전의 히브리어 사본을 대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역본은 본문과 해석의 연구에 중요한 것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70인경은 맛소라 사본을 교정하기 위한 기계적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70인경이 사용한 히브리어 사본의 성격은 쿰란에서 발견된 약간의 필사본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필사본들은 70인경에는 있으나 맛소라 사본에는 없는 약간의 히브리어 사본의 단편들을 포함 하고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쿰란의 필사본에 근거하여 기독교 이전의 수세기 동안에 히브리어 사본의 상이한 몇 개의 형태가 팔레 스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70인경이 기초한 것과 유사하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 쿰란에서 발견된 필사본을 원 맛소라 사본(proto-Massoretic), 즉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로 인쇄된 현 재의 히브리어 성경의 선구자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한다.

70인경의 본문을 담고 있는 쿰란의 맛소라 사본은 히브리어로 된 사무엘서의 부분을 담고 있는 약간의 단편들이다.

 

로마 가톨릭 학자인 프레인(Fraine)은 본문비평에 있어서 70인경을 사용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물론 70인경의 배후에 담겨진 히브리어 사본을 재구성함에 있어서는 대단한 주의가 기울어져야 한다.

이 헬라어 번역본이 조잡할수록 이 목적을 위하여는 70인경이 더욱 유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안심하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쿰란에서 발 굴된 성경 사본 가운데서 히브리어의 유사한 유형들이 발견될 때에만 쉽사리 정당화된다.

물론 단순히 70인경이 기독교 시대의 2세기 전에 번역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공식 적으로 표준 사본이 된 맛소라 사본(MT)보다 더 오래되고 따라서 더욱 좋은 사본을 간직한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레인은 일반적인 맛소라 사본이 70인경이 근거한 필사본에 보다 더 원문에 가깝다고 설득된 셈이다. 

쿰란의 필사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케년(Kenyon)은 히브리어 사본과 70인경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과 또 다른 히브리어 사본을 70인경이 말한다고 주장한다. 

70인경의 현존하는 필사본들이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필사본보다 몇 세기 앞선 것이라고 해서 70인경이 원 히브리어 성경을 위한 우리가 가진 최선의 증거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70인경의 번역자들이 당시에 사본을 소유한 자유를 지녔던 훌륭한 히브리 학자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맛소라 사본의 70인경이 히브리어의 정경적 사본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가란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 주장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은 지금은 어렵다. 

70인경의 맛소라 사본이 구약의 원본을 대변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오를린스키(Orlinsky) 는 이렇게 말한다.

 

70인경이 현재 사용되는 히브리어 성경이 보여주는 읽기와 다른 히브리어 읽기를 보여주거나 혹은 보여주는 것 같을 때,

오직 하나만이 원래의 읽기일 수 있다는 두 가지의 선택적인 사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70인경은 단순히 해석이듯이 하나의 읽기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헬라어의 구약은 히브리어의 구약 정경과 그 내용과 배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세 가지 구분으로 되어 있다. 

즉, 1) 율법서(모세오경), 

2)선지서, 이를 세분하면 

a) 전선지서로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 이루어졌고,

b) 후선지서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 소선지서,

3) 케투빔(Kethubim), 혹은 성문서(Hagiographa)로서 시편, 욥기, 잠언, 에스더, 전도서, 애가, 룻기, 역대기, 에스라-느헤미야, 다니엘로 모두 24권으로 구분된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읽혀졌고 히브리 성경의 24권과 함께 출판된 것이 분명한 소위 외경을 여러권 포함하고 있다.

이 외경들은 에스드라 1서 (얼마의 구절이 첨가된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의 또 다른 번역),

에스드라 2서 (정경상의 에스라 느헤미야임), 지혜서, 집회서, 유딧, 토비트, 바룩, (어떤 필사본에만 있는) 마카비의 4권의 책들이다.

이 외경들은 히브리어 정경을 수납한 제롬 (Jerome)에 의하여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외경들을 그가 발행한 벌게이트 번역본(the Vulgate translation)의 기초로서 인정하지는 않았다.

 

루터(Luther)는 히브리어 정경을 좇았으며, 영어성경의 번역자들은 루터를 따랐고, 그 결과 히브리어 정경과 일치하는 영어성경은 외경을 배격하였다.

 

어떤 헬라어 성경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의 말미에서 발견되는 솔로몬의 시편과, 신약의 유다에서 인용된 에녹서, 그리고 에스드라 4서와 같은 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성경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율법과, 선지서, 성문서라고 하는 세 가지 구분이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의 필사본들 가운데는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점 들이 있기는 하지만

항상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는 4권의 이스라엘 역사서에 첨가되며, 예레미야와 다니엘 (역시 수산나와 '벨과 용' 을 포함하는) 뒤에 나오는 애가와 바룩은 세개의 대선지서와 함께 한 그룹을 형성한다.

성문서 (집회서와 지혜서, 유딧, 토비트를 포함하 는)는 벌게이트와 영어성경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선지서들 앞에 배열된다.

 

70인경은 알렉산드리아의 성경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배포되었고 따라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회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확정된 보다 작은 정경을 사용하였다.

A.D. 1세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헬라어 신약의 저자들이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24권으로 된 정경을 따랐다.

그 이유는 비록 유다서에서 에녹서를 언급하는 것처럼 (유 14~15절)

신약성경이 외경이나 정경상의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말씀들에 대한 언급을 성경으로서 포함할지라도

외경의 어떠한 책에 대한 인용이 신약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 문이다.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70인경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수난을 당하였고 그 결과 A.D. 3세기에 오리겐(Origen)은 70인경의 본문에 대한 방대한 비평작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원래의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번역본의 정확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헥사플라』(Hexa pla)라는 두 본문을 병행시킨 성경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6개 성경을 병행시킨 6개 칼럼 (column)으로 되어 있다.

즉, 1. 히브리 어의 성격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사본,

2. 헬라어의 성격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필사본,

3. 아킬라의 번역본,

4. 심마쿠스의 번역본,

5. 70 인경 본문,

6. 테오도티온의 번역본.

 

오리겐은 70인경의 최초의 순전 성을 회복시키고 그것이 히브리어 성경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하여 70인경 개역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 세 속문헌들에 사용하였던 비평상의 부호를 채용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구절에는 오벨루스(obelus, 혹은 ÷)를, 그리고 70인경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는 구절에는 아스테리스 크(asterisk, *)를 붙여서 표시하였다.

메토벨루스(metobelus)는 오벨루 스나 아스테리스크가 붙여진 구절들의 길이를 지적하기 위하여 구절의 끝에 붙여졌다.

 

오리겐의 『헥사플라』는 6,500페이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책의 원본은 팔레스틴의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제롬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타협하였으나 A.D. 6세기까지는 접근이 가능하였던 듯이 보이지만 A.D. 7세기에 사라센족이 이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 분실되었다.

오리겐의 성경은 일반적으로 육주식 고정본(六株式 固定本,Hexaplaric Recension)이라 불리우며 상당히 많은 필사본들이 비록 전체가 아니라 최소한 일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또 다른 두 명의 고대학자들이 70인경의 비평판을 발간하였다.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 학자 헤시키우스(Hesychius)가 70인경을 개역하였으며 그의 고정본은 애굽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동일한 시대에 안디옥의 루시안 (Lucian)도 헬라어를 원래의 히브리어 성경에 보다 가깝게 하려는 노력 가운데 유사한 고정본을 발행하였다.

루시안 고정본은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채용되었다.
70인경의 전체나 혹은 부분을 담고 있는 많은 필사본들이 현존하고 있다. 

1827년 홀메스(Holmes)와 파슨스(Parsons)는 그들이 출판하기 위하여 타협한 300개 이상의 필사본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많은 새로운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잘 알 려진 것은 A.D. 4~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cus; A) 과 A.D. 4세기의 바티칸 사본(Vaticanus; B), 1844년부터 1859년 사이에 티쉔도르프(Tischendorf)가 발견한 A.D. 4세기의 시내 사본(Sinaiti- cus)이 있다.

 

이 필사본들 외에도 애굽의 모래밭이 보존을 가능하게 하였던 파피루스를 추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파피루스는 단편적이지만 상당히 긴 것들도 있다.

릴란드 파피루스 458(Rylands Papyrus 458)은 신명기의 단편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A.D. 2세기 중엽의 것으 로 연대가 추정된다.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는 모든 11개의 파피루스 사본으로 된 하나의 결집인데 이 가운데 두개의 창세기 필사본의 단 편들과, 민수기와 신명기의 하나, 이사야의 하나, 예레미야의 하나, 에스겔과 다니엘, 에스더를 수록한 하나, 집회서의 하나가 있다.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961과 962(A.D. 3세기 후반)와 베를린 파피루스 911(A.D. 3세기 후반)은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보다 더 완전한 창세기의 본문을 보존하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소선지서의 헬라어 역본의 나머지는 가죽에 기록된 채 발견되었다. 

이것은 1952년 키르벳 쿰란(Khirbet Qum- ran)에서 발견되었는데 마가와 요나, 나훔 하박국 스바냐, 스가랴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로버츠(C.H.Roberts)는 그것들을 B.C. 50년에 17)서 A.D. 50년 사이로 연대를 추정한다.

바델미(D. Barthelmy)는 1세기 말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발견된 번역본은 독립된 사본이기 보다는 고정본이라고 결론짓는다. 

 

1. 70인경의 중요성

 

70인경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만일 70인경이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대한 또 다른 번역이 사실이라면 70인경 사본의 회복은 구약의 본문비평에 중요한 일이다.

「표준개정역』(Revised Standard Ver- sion)과 『신영어성경』(New English Bible)은 이 두 번역성경의 저자들이 흠정역자들(King James translators)이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읽기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크게 70인경 사본에 의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70인경의 중요성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베버스(Webers)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그러나 70인경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번역문서로서 대부분이 원본에 기초되어 있지만

특별히 이러한 책들에 있어서는 그 해석이 원문에 구속을 받지 않는 점들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개관을 이해하는데 가치있는 자료가 된다.

아리스테아스 서사시(Aristeas legend)의 저자에 의하여 배격된 많은 모습들이 70인경의 일부 역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사야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저자와 분명히 일치된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점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 하고 있는 점이다. 

헬라어로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하여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준다.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은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하여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 유래된 것이다.

키텔(Kittle)의 『신 약신학사전』(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의 이용자는 신약연구를 위한 70인경의 중요성과 가치를 곧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