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1-9.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w.j.lee 2024. 4. 18. 13:24

 

9.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과학의 발달은 신앙에 대한 도전일까?

 

『만들어진 신』, 『이기적 유전자』 등 수많은 대중 과학 베스트 셀러를 저술한 리처드 도킨스 박사는, 종교는 인류가 지성적으로 계몽되지 못한 시대에 만들어진 반지성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란 과학이 발달하고 인류의 지성이 향상된 현대 세계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에 따르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요정이나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믿듯이 유아적이고 비지성적이라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최근 들어 종교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훨씬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무신론(Scientific Atheism) 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기독교 신앙과 현대 과학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불구대천지 원수"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본래 물리학자의 길을 걷다가 신학자가 된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했다.

 

첫 번째는 "갈등" (Conflict) 관계다. 

앞서 언급했던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제리 코인, 그리고 다니엘 데닛 같은 무신론 과학자가 이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편으로 이들과의 대척점에서 현대 과학의 성과를 전혀 수용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수용하고 있는 창조과학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독립"(Independence) 관계다. 

신앙과 과학은 각자가 다루는 영역이 상이하기 때문에 서로 무관한 독립적 실체라는 주장이다. 

즉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신앙은 "왜"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두 연인이 휴대 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다.

어떻게 통화가 가능할까?

과학은 이에 대해 첨단 전자 공학, 전파공학, 회로 이론 등 과학 이론으로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연인이 서로 이야 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두 연인의 통화를 이렇듯 딱딱한 과학적 원리로만 설명해야 할까?

이 두 연인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니까 애틋한 마음을 담아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 아니겠는가!

둘 중 어떤 것이 정답일까?

둘 다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둘의 영역은 서로 중첩되지 않는다. 

이렇듯 과학과 신앙은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다른 실체라는 것이 바로 이 입장이다.

 

세 번째 유형인 "대화"(Dialogue)와 네 번째 유형인 "통합"(Integration) 은 구별하기가 다소 모호하다. 

이 유형은 과학과 신앙이 서로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낸다.

현대 신학의 거장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같은 경우 신학과 그 외의 학문, 특별히 과학과의 조화를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판넨베르크는 현대 물리학의 전기장이나 자기장 같은 장(場) 개념을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성령의 활동에 대한 교의적 함의를 진행시켰다.

또한 창발적 성질을 가진 생물 진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를 논증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계의 입장에서도 신앙과 과학의 조화가 중요하다. 

첨단 과학 기술의 홍수 속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현 시대에 기독교 신앙은 과학 기술을 슬기롭게 통제하고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도록 방향과 목적을 제공할 수 있다. 

이렇듯 과학과 신앙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유형은 앞서 언급한 양자의 독립적인 입장을 넘어서 과학과 신앙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학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바른 자세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의외로 이원론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원론이란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선한 일이고,

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활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 는 하지만 그다지 선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이것은 교회를 빛의 영역으로,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극단적으로 나눠 접근하는 태도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는 물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실체가 동등하게 다투고 있는 혈투의 장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우주 전체를 통 치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이미 가지고 있는 화기와 진지 의 절반을 적에게 내어주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 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라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 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빅뱅이나 진화론 같은 과학 이론은 마귀의 학문이다"라는 생각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성경에 나오는 문자적인 표현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착한 과학 이론'이고,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론은 악한 과학 이론이라는 것은 극 단적인 이원론적 주장이다.

 

만약에 우리가 월드컵 결승전을 시청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선수가 맹활약을 펼쳐 여러 골을 넣고 자국팀을 우승시켰다고 하자.

그런데 그 선수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은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신앙이 없는 친구로, 당연히 형편없는 선수야, 따라서 그가 골 넣은 것도 다 무효야." 이런 반응이 그 선수에 대한 올바 른 반응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특정 축구 선수의 실력은 신앙과 관계 없이, 오로지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기량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5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쇼팽 콩쿠르는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선망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콩쿠르다. 

쇼팽 콩쿠르는 순위에 적합한 연주자가 없을 때는 심지어 해당 순위를 비워놓기도 한다.

그 결과 몇 번이나 우승자가 나오지 못한 적이 있을 정도로 엄격하고 까다로운 콩쿠르다.

이런 엄청난 대회에서 2015년에는 한국인이 우승하기도 했다.

이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연주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가 완벽한 테크닉과 감성이 넘치는 연주를 했음에도 단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연주가 형편 없다고 폄하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연 주자가 가진 종교적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 연주의 깊이와 완성도를 객관 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태도가 유독 과학 분야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대다수 교회에서는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 다른 해석을 제공하는 과학 이론을 무신론적인 사탄의 이론이라고 매도 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기실 과학 이론이란 자연이 어떻게 운행되는 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 이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섭리를 더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자연이 운행되는 양상을 더 정확하게 포착해낸 위대한 과학 이론이 항상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대한 과학적 진보와 발전들은 그리스도인 과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이슬람 과학자, 힌두교 과학자 또는 무신론 과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져왔다.

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룩된 위대한 과학적 성취들은 전부 무가치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마치 그리스도인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 혹은 성당을 설계하고 시공할 수가 있듯이

비그리스도인 과학자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과학 이론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잘 설명한다면, 

그 이론은 그것을 도출해낸 과학자가 무신론자이든지, 힌두교 신자이든지, 아니면 이슬람 신자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 과학 이론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잘 설명해내는 과학 이론이 단지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근대 과학 혁명 이후 과학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런 경이로운 진보가 단지 인류가 운이 좋았기 때문에 이루어졌던 것일까? 

몇 년 전 발견된 힉스 입자(Higgs Particle)는 자연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학의 활동이 얼마나 정교하며 효율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힉스 입자에 대한 가설이 맨처음 제안된 때는 1964년이었다.

그 후 49년간에 걸쳐 수많은 물리학자들 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 핵물리연구소에서 무려 10조 원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 건설한 강입자가 속기에 의해 2012년 힉스 입자를 인공적으로 재현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 실험 도중 획득한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분석해서 힉스 입자를 찾아낸 것을 2013년 3월에 공식 발표했다. 

이 예는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맞는다면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을 예측하여,

그것을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 검증하는 과학의 합리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0조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간 강입자 가속기뿐만 아니라

49년간에 걸쳐서 힉스 입자 연구에 종사했던 모든 과학자들의 연구 시간과 사용된 자원을

전부 다 비용으로 환산한 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 산출될 것이다.

이렇듯 과학은 수많은 연구자들이 바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가 쌓아 올린 위대한 성취임이 분명하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면 성경에 대 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한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과학은 인류의 삶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경제적으로 막강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고, 이런 경제적 힘은 당연히 정치, 사회, 문화등 우리를 에 워싼 삶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입김을 미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그 과학을 효과적으로 통제 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

 

더 나아가 자연 과학적 인과 관계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