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6. 과학과 세계관

w.j.lee 2024. 4. 18. 13:21

 

 

6. 과학과 세계관

 

중세 유럽은 가톨릭의 억압 속에 인간의 이성적 활동이 탄압을 받던 지적 암흑기였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자연 과학적 성취들이 완전히 명맥을 잃고 천 년 이상 사장되었다.

인류의 물리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학자들의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 아인슈타인과 아이작 뉴턴이 1, 2위를 다툴 것이다.

300년 전 시대에 살던 아이작 뉴턴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와서 현대 물리학회에 참석한다면 그는 아마 무슨 이야기 들이 오고가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약 150여 년 전에 『종의 기원』을 썼던 찰스 다윈이 현대 세계로 온다면 요즈음 공부 좀 한다고 하는 고등학생들보다 오히려 생물학 지식이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천 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인간의 이성과 학문적 성취들이 퇴보했다는 사실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지금 세상에 비춰볼 때 대단히 아깝기 그지없는 역사의 공백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의 위세에 눌려 가사 상태에 빠져 있던 인간의 이성적 활동이 다시 깨어나게 된 계기는 스콜라 철학을 통해서였다. 

십자군 원정 실패 및 그로 인해 야기된 중세 유럽 사회의 가치관의 아노미 상태, 무소불위의 힘으로 중세 유럽 사회를 휘어잡았던 교황권의 실추 등 

가톨릭 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시작된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는 이성을 통해 신앙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스콜라 철학을 통해 유럽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인간 이성의 중요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끼친 결정적인 영향력은 이슬람 세계에서 왔다.

아븐 시나(Avicenna)나 이븐 루시드(Averroes) 같은 이슬람 대철학자들의 그리스 고전 연구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스콜라 철학이 전개되었다.

근현대 인류 문명사를 이끌어왔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서구 사회가 종교로부터의 결박에서 풀려나 한 단계 진일보한 문명을 만드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다른 문명권,

그것도 지금은 서구인들이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라고 얕잡아보는 이슬람 문명권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주지하듯이 이슬람은 기원후 7세기에 태동했다.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600년이나 더 늦게 창시되었다.

더욱 늦게 태동되었다는 점은 근대적인 합리성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태동한 자그마한 종교 세력이 당대 최고 수준의 문명을 자랑하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문명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 인도 문명과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당나라의 장군 고선지와 벌인 탈레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중국 문명까지 끌어안으며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으로 융합한 것은 이슬람이 가지고 있던 근대적 합리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서구 유럽이 기독교 신학의 속박 아래서 학문과 이성적 활동이 마비되었을 무렵,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과학을 계승해 철학, 의학, 수학, 그리고 자연 과학 분야에서 더욱 찬란한 진전을 이뤄냈고

그 성과를 다시 유럽에 전해주면서 유럽이 천 년 동안이나 봉인됐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의 많은 신자가 이슬람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카카오톡 등을 통해 회람되는 이슬람 정보들은 상당수가 터무니없이 왜곡된 것이라는 점 이다.

이슬람 세계가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데다가 낙후되어 있다는 선입견은 서구 문명사에 영향을 끼쳤던 이슬람의 학문적인 성취와 그 성취를 가능케 할 수 있었던 합리성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

어쨌 거나 위대한 이슬람 학자들의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슬람이 16억 신도를 거느린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요즈음 이슬람 세계의 모습이 전근대적으로 비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들 역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종교의 운동이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장점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고려 말의 불교가 번뇌를 극복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고유의 모습을 상실하고 권력에 빌붙어 타락한 사실이나

조선 시대의 유교가 수기치인(修己治人 : 스스로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린다 )의 모습을 상실하고 사변적으로만 심화 되는 자가당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구한말의 혼란을 초래한 모습들은 지나간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종교의 퇴행성과 관련한 생생한 예들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역시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잃어버리고 퇴행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17세기 들어 데카르트와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혁명이 태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스콜라 철학에 의한 충분한 정지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을 통해 서구 세계는 종교의 테두리 에서 벗어나서 인간 이성의 재발견이라는 거대한 변혁을 경험할 수 있었 고, 이로 인해 창의적인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과학 혁명에서 태동한 과학적 성과는 과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구 사람들은 과학의 진보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이제 자연에 관한 경이감은 사라졌고 자연을 기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기계로 인식했다는 것이 서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자신이 사용하는 기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영어권에서는 자동차나 보트 같은 기계류를 지칭할 때 여성 대명사(she)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신이 사용하는 기계를 아끼고 의인화하는 경우는 종종 있을 수 있다.

하지 만 어떤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계가 너무 좋아서 인간과 똑같이 취급하는 경우를 본다면 느낌이 어떨까?

 

만일 자신이 소유한 자동차를 지나치게 의인화해서 사람 대하듯 하는 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인간에게 하듯 항상 자동차에게 말을 건넨다.

차를 세차할 때 마치 아기 목욕시키듯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세차한다. 

겨울밤에는 행여 추울까봐 따뜻한 난방이 켜진 차고에 이부자리를 펴놓고서 그 위에 차를 주차한 다음 베개를 괴어주고 담요를 덮어준다.

게다가 잘자라고 자장가까지 불러 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정상인 취급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명으로 가득찬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없어지고 자연을 기계로 인식하게 된 근대 과학 혁명을 통해 서구인들은 자연을 기계처럼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로써 근대 과학 혁명 이후 서구 세계, 더 나아가 우리 인류가 자행했던 광범위한 자연에 대한 착취와 파괴가 합리화되어버렸다."

 

또한 기계는 우리가 그 구동 원리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미래에 어떻게 작동할지 충분히 계산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기계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이 구동되는 원리에 충분한 데이터를 집어넣기만 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해낼 수 있다는 낙관적 결정론을 사람들에게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17세기 과학 혁명 이후에 나타난 이러한 성향의 세계관을 우리는 기계적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이 기계적 결정론의 세계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모든 일들이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단지 확률적 지식밖에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양자 역학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 지 않는다"라고 탄식했다.

이 유명한 탄식은 정량적인 인과율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기계적 결정론의 세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 매몰된 사람들에게는 정량적인 인과율에서 벗어난 사건들은 결코 일어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기계가 구동원리에서 벗어나 오작동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만약에 우리가 자동차를 주차하려고 후진 기어를 넣었는데 차가 갑자기 전진을 해 버리면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이 기계적 결정론 속에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한 역사의 진행은 전혀 필요가 없는, 마치 기계가 인과율의 작동 원리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과 같은 차갑기 그지없는 세상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계적 결정론은 결국에는 지극히 당연하게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관으로 귀착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옥스포드 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윌슨, 터프츠 대학교의 다니엘 데닛 같은 과학자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을 이끌고 있는 세계적 지성들이다.

또한 스티븐 호킹도 2010년에 출간한 『위대한 설계』라는 저서를 통해서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의 대열에 합류한다.

 

지금까지 기계적 결정론과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세계관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간단히 훑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다음 둘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일까?

 

1. 과학적 이론이 세계관을 형성했을까?
2. 세계관의 변화가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만들어냈을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계적 결정론이나 과학적 무신론 같은 세계관 담론은 과학 이론의 정립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대해 오해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 이론이 세계관 담론 속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빅뱅 이론이나 진화론이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에 담긴 진화론의 근간이 되는 적자 생존에 관한 영감을

토머스 맬서스가 1798년에 출간한 『인구론』에서 얻었기 때문에

진화론은 과학이 될 수 없다라고 목 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물론 진화론의 핵심 요소인 적자 생존 이론이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적자 생존이 자연 세계의 모습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과학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다.

과학사를 살펴본다면 자연의 모습을 잘 설명해내지 못해서 폐기된 과학 이론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천동설이다.

천동설은 천수백 년 동안 우주의 모습을 설명해왔던 막강한 이론이었지만 관측 기술이 발달하는 것과 발맞추어 새롭게 발견된 자연의 모습을 설명하지 못해 폐기되었고 지동설로 대체되었다.

 

이런 천동설의 폐기와 지동설의 정립은 가톨릭이 지배했던 중세 정치 질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 자들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 이론을 만들어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단지 자연의 모습을 더 잘 설명하고 미래에 벌어질 현상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을 연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학 이론은 결국 정치와 사회 체제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켰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천착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빅뱅 이론이나 진화론은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세계관 같은 이데올로기 담론에서 힌트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그 이론들이 자연의 모습을 잘 설명해내지 못하고 또 자연 현상에 대해 정확 한 예측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 이론들은 진작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어떤 과학 이론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현재 그 이론이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중 장 방정식(Field Equation)이라는 공식이 있다. 

이 장 방정식의 결론은 시공간의 팽창을 이야기한다. 

1929 년 에드윈 허블이 우주 팽창의 증거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이미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 팽창을 예견했다.

우리는 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장 방 정식을 이용한 기기를 우리의 일상에서 손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우리가 항상 들고 다니는 휴대 전화나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이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인공위성과의 교신을 통해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목적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공위성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구와의 중력 차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인공위성의 운동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은 미세하게 왜곡되어 있다.

지상의 내비게이션 시스템과 교신하는 GPS 인공위성의 고도는 약 20,100km 상공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위치에서는 지표면의 중력보다 약한 중력이 작용 하므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구체적으로 하루에 약 100만 분의 45초 정도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다.

또한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는 시간이 늦게 흐르는데, 시간당 14,000km, 즉 초당 3.8km로 이동하고 있는 GPS 인공위성에서의 시간 지연 효과는 하루에 약 100만 분의 7초 정도에 이른다.

 

따라서 GPS 인공위성에서는 하루에 100만 분의 45초의 시간 선행 효과와 100만 분의 7초의 시간 지연 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공위성에서 시간은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는 지표면보다 매일 100만 분의 38초만큼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이 100만 분의 38초의 시간은 극히 작기 때문에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극미한 시간 선행 효과가 지표면 상의 거리로 환산되면 그 정도는 생각보다 더 크다. 그거리 오차는 무려 11km가 넘는다.

하루에 11km 이상의 누적 거리 오차를 발생시키는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무용지물일 뿐이다.

 

이러한 문제투성이 내비게이션을 휴대하고 설악산 대청봉을 등반하려는 등반객은 내비게이션 오작동으로 조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대청봉에 오르기 위해 하루 종일 산을 올랐던 등반객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대로 가파른 울산 바위 절벽을 대청봉으로 알고 등반하다가 추락사할 수도 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이 오차를 항상 보정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보정 작업은 바로 상대성 이론의 장 방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빅뱅 현상을 예견한 과학 이론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해서 빅뱅 이론을 부정하는 이들은

단지 우주가 138억 년 되었다는 우주의 나이만 부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인류의 삶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무수한 과학 이론들을 부정해야만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게 되는, 문제가 많은 태도에 불과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계관에서 과학 이론이 태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곧 과학 이론에서 세계관이 태동한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강성 무신론자는 자신의 전공인 생물학의 진화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 세계관을 변증하고 있다.

스티븐 호킹 같은 물리학자는 빅뱅 이론 같은 물리학 이론을 자신의 무신론적 신념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과학 이론인 빅뱅 이론이나 진화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인 신념을 강화할뿐더러 세계관 체계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흔하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자연신학 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 이론이 무신론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지적이며, 마치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면서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현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분명한 것은 현대 과학 자체를 부정하고 폐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현명한 대응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이 제공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고 원시적 상태의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예들 들 면 40대 초반에 고혈압 증상을 보인 이들조차 혈압 약만 꾸준히 복용하면 기대 수명을 70세, 80세, 90세 이상까지도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학 이론을 거부하고 이러한 편익들을 포기한다면 40대 후반에 사망할 확률이 증가한다. 

건강을 잘 관리하면 수명을 30년, 40년 이상 연장할 수 있는데도, 현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속히 폐기되어야 한다면서 건강을 내팽개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 도인들은 더 늦기 전에 현대 과학이 무신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현대 과학을 과학적 유물주의 같은 왜곡된 세계관 속에서 건져내어 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임에 분명하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