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2. 합본된 두 권의 하드커버 책

w.j.lee 2024. 4. 18. 13:20

12. 합본된 두 권의 하드커버 책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서울에 사는 누이동생이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누이동생은 제한된 일정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나와 함께 사러 갔다.

누이동생은 고등학교에 입학 하는 큰 조카를 위해 백팩을 사려고 했는데, 고르는 백팩 종류들마다 전부 나를 의아스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두 작은 크기의 백팩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 대만 해도 학과목들이 많아 늘 가방에 책을 빼곡히 넣어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큰 가방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학교마다 사물함이 있어서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아무튼 내가 1980년대 중반에 치른 대입 학력고사는 아마 대입 역사상 가장 많은 과목이 포함된 입시였을 것이다. 

이때는 제2 외국어까지 학력고사 과목에 포함되어 있었고 학력고사 과목은 아니었지만 논술까지 준비해야 했기에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을 들고 학교를 오가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에 입학해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무거운 책을 분철(分)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말이 좋아서 분철이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두꺼운 책을 조각조각 찢어 가볍게 만들어 가지고 다녔던 것이 다.

특히 공대 1학년 신입생들은 교양 기초와 전공 기초라고 불렸던 과목들만 배웠다.

주로 영어, 국어, 물리, 화학 같은 과목들이었다.

이 책들 중에서 유난히 무겁고 두꺼웠던 물리나 화학 같은 책들은 어김없이 분철 대상이었다.

자연 과학과 관련된 전공으로 전과를 하지 않는 이상 토목 공학과에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과목의 책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주저 없이 분철했고 해당 학기가 끝나면 미련 없이 책을 방치했다.

 

그런데 이 패턴이 2학년 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바야흐로 전공과목을 배우기 시작하자 모두들 책을 찢어서 분철하는 버릇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공과목 도서들은 교양 과목보다 훨씬 더 무겁고 두꺼운 책들 일색이었지만

우리는 평생 먹고사는 것을 책임질 밥줄과 관련된 책들이라고 생각해 그랬는지 분철하지 않고 무거운 채로 들고 다니곤 했다.

2학 년 때 분철하지 않고 들고 다녔던 가장 두터운 책이 다스(Das) 박사가 쓴 「토질 공학 원론」이었다.

그 책은 고동색 하드커버로 된 책이었다.

역시 다스 박사가 저술한 초록색 하드커버의 기초 공학 원론 은 3학년 때 교재로 사용했는데 이 책도 분철하지 않고 그대로 들고 다녔다.

 

이 두 책들은 토질 및 기초 공학과 관련된 토목공학과의 베스트셀러 텍스트였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이 두 과목을 3년 시차를 두고 공부했다.

2학년을 마치고 상당수 동기들이 군입대를 했다가 3년 후 복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해서 기초 공학을 배울 때는 3년 전에 배웠던 토질 공학을 반드시 복습해야만 했다.

나를 포함해서 복학했던 동기들 모두가 3년 전에 배웠던 책을 고스란히간직하고 있었고 두 권의 책을 함께 갖고 다니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1학년, 2학년 때는 무거운 책들을 분철해서 갖고 다녔지만 이때는 심지어 이 두 권을 합본해서 갖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만약에 이 두 권을 인쇄소에 의뢰해서 정교하게 제본하지 않고 집에서 대충 합본을 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책의 앞표지는 고동색 하드커버가 될 것이고, 뒷표지는 초록색 하드커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고동색의 뒷표지 하드커버와 초록색의 앞표지 하드커버를 딱풀이나 강력 접착제로 붙여놓았기 때문에 책의 맨 앞과 맨 뒤에만 있어야 하는 하드커버가 책 중간에도 있게 될 것이다.'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생명체의 유전 현상에 대해 상세한 이해를 얻었다.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다.

생명체마다 다양한 숫자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사자와 호랑이는 38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개와 늑대는 78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듯이 근연 관계가 가까운 종들은 같은 숫자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 개수는 46개, 즉 23쌍이다. 

23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고 다른 23개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23쌍을 이루고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 그리고 오랑우탄 같은 거대 유인원들은 24쌍, 즉 48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유전학의 발달은 인간과 거대 유인원이 같은 조상에서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500만 년 전에 진화적 분기점을 경험 하고

서로 다른 생물종으로 갈라져 나왔다는 공통조상 이론에 대한 치명적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35억 년 된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 중에서 인간과 거대 유인원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기가 됐던 500만 년 전 염색체 개수가 달라지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과거였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35억 년 된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를 35살 된 청년의 나이로 환산한 다면 인간과 거대 유인원류가 분기된 500만 년은 불과 두 주일 전에 일어 났던 사건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개수가 달라지는 엄청난 변화를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과학자들은 공통 조상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운다.

"인간의 세포 속에 있는 두 개의 염색체가 서로 들러붙어서 한 개의 염색체가 되었다."

세포 속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염색체가 붙어서 한 개의 염색체로 바뀌 었다면 그것은 500만 년이라는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염색체 숫자가 변해버린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인간의 세포 속에 보이지 않는 딱풀 같은 것이 있어서 두 염색체를 들러붙게 만들 었다면 과학자들은 과연 이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텔로미어(telomere)라는 것은 반드시 염색체의 양쪽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마치 책의 하드커버가 책의 제일 앞면과 제일 뒷면에서 본문의 페이지들을 보호하듯이

텔로미어도 염색체의 양쪽 끝단에 자리 잡고서 유전 물질이 들어 있는 염색체를 보호해주고 있다.

또한 염색체의 중앙부에는 감수 분열을 할 때 방추사가 연결되는 센트로미어(centromere)가 있다.

만약에 거대 유인원류와의 공통조상에서 분기되어 나온 인류의 조상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세포 속에 있는 두 염색체가 들러붙어 한 개의 염색체가 됨으로써 전체 염색체의 수가 23쌍이 되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 텔로미어가 양쪽 말단뿐만이 아니라 정중앙에도 있는 염색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또한 텔로미어가 양쪽 말단뿐만이 아니라 정중앙에도 있는 염색체는 한 개의 센트로미어가 아닌 두 개의 센트로미 어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과 거대 유인원류의 공통 조상론은 성립될 수 없고 따라서 진화론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과연 과학자들은 인간의 세포 속에서 텔로미어가 양쪽 끝뿐만 아니라 중간에도 존재하는 염색체를 찾아냈을까? 

2005년도에 「네이처」(Nature) 에는 이런 염색체가 인간의 세포 속에 들어 있음을 밝혀냈다는 논문이 게 재되었다. 

해답은 인간 염색체 2번에 담겨 있었다. 

그 논문은 마치 2권의 하드커버 책이 합본이 되어 두꺼운 하드커버 표지가 책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듯이, 

인간의 2번 염색체에는 텔로미어가 염색체의 양쪽 말단 뿐만이 아니라 한가운데도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센트로미어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과 거대 유인원의 염색체 개수가 다른 이유를 설명하는 인간 2번 염색체의 융합에 대한 이 연구 역시

과학의 절차와 방법을 잘 보여주는 예로서, 먼저 자연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이 옳다면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을 예측한다.

그 예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서 확인한다.

인간 염색체 2번에 대한 논문은 이러한 과학적 절차와 방법이 효과적임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인류의 조상이 변이를 겪음으로써 두 개의 염색체가 융합되며 거대 유인원류와 진화적 분기점을 경험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500만 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과 절차를 통해 그 사건이 500만 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추적해낼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런 것을 밝혀내는 과학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영장류와 공통조상을 공유한다는 그 따위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을 약화시킬 뿐 아닌가?"

 

인간의 염색체의 융합을 추적하는 기술과 우리의 일상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첨단 유전학 지식은 유전 공학, 제약, 농학 같은 첨단 바이오 산업에 직접 응용된다.

우리는 현대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첨단 바이오 산업이 제공하는 편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우리는 마트에서 산 식료품들을 통해 바이오 산업이 주는 편익을 누릴 수 있고,

약국에서 구입해 복용하는 감기약에도 진화론을 응용한 현대 유전학의 성과가 들어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항암 치료도 첨단 유전학과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첨단 유전학 지식을 통해서 인간과 거대 유인원들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인간과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이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생태계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생명과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태도를 향 상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출현할 수 있도록 매우 긴 시간에 걸쳐 모든 환경을 조정하시고 관장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다 (창 1:26).

또한 그분은 자신의 형상을 담지한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특권을 주셨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메시지를 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자연에 투사해볼 때,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탁월한 경륜 앞에 경탄하며 진정한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 창조세계 및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모든 생명을 아끼고 돌볼 수 있는

생태학적 소명을 발견해야 마땅하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