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4. 풀을 먹는 호랑이

w.j.lee 2024. 4. 18. 13:19

 

14. 풀을 먹는 호랑이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 니콜라이 바이코프(Nicolai Baikov)의 작품 중 「위대한 왕」(아모르문디 역간)이라는 소설이 있다.

백두산과 만주 산림을 누비는 한국산 호랑이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물 문학 작품 중 탁월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호랑이가 호두나무 밑을 지나다가 호두를 깨물어 먹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육식을 하는 호랑이가 견과류 같은 식물의 씨앗을 깨물어 먹는 것이 상당히 생소한 느낌을 준다.

몇 년 전에는 중국의 한 동물원에서 번식기 때 풀을 뜯어 먹는 호랑이가 실재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었다.

아마도 『위대한 왕』의 작가인 니콜라이 바이코프도 만주에서 수십여 년 동안 머물면서 호랑이가 호두를 먹는 것을 직접 관찰했고 이를 자신의 소설에 반영한 것은 아닐까 싶다.

 

호랑이가 비록 소량의 풀을 뜯어 먹거나 견과류를 먹는다고 해서 초식 동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호랑이 게놈 지도 연구를 통해 호랑이가 갖고 있는 유전학적 성질들을 많이 연구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호랑이는 단백질 소화 유전자가 특히 발달했고,

사냥에 필요한 근력 유전자도 선택적으로 발달해서 선천적으로 강한 육식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이것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일련의 생화학적 공정(process)을 물질대사(物質代謝, metabolism)라고 한다.

호랑이가 풀을 먹거나 견과류를 먹을 수는 있을지라도 이러한 초식성으로부터는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물질대사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연구가 잘 보여준다.

 

만약 고기를 전혀 먹지 않고 풀만 뜯어 먹고 사는 호랑이가 발견된다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 포효하는 소리에 온 산의 모든 동물들이 부들부들 떠는 그 늠름한 위용을 가진 호랑이가 풀을 뜯어 먹는다면 과연 그것을 호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풀을 전혀 뜯어 먹지 않고 고기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토끼가 발견된다면 이 변종 토끼는 어떻게 분류를 해야 할까?

생태계 먹이 사슬의 맨 아래쪽에 위치하면서 항상 포식자 들을 피해 도망만 다니던 토끼가 다른 동물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사냥하여 그 살점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면 과연 우리는 이것을 토끼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특이한 변종들을 기존의 호랑이나 토끼와 똑같은 종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시간 주립대학교 리차드 렌스키(Richard Lenski) 교수의 주도하에 1988년부터 2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대장균의 진화 실험(E. coli long- term evolution experiment)이 진행되었다.

그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다. 12 개의 플라스크에 똑같은 성분의 각종 영양소가 들어 있는 배양액을 채우 고 유전적 성질이 동일한 같은 개체군의 대장균을 집어넣어 배양을 시킨다.

이 12개의 플라스크는 향후 20년 동안 대장균이 격리되어 진화가 진행될 각기 다른 장소라 할 수 있다.

 

플라스크에 담겨진 배양액에는 대장균이 분해해서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양소뿐만이 아니라 전혀 분해 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글자 그대로 "그림의 떡" 같은 영양소도 들어간다. 

배양액 속에 들어간 대장균들은 사용할 수 있는 영양소를 분해 하여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증식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사용 가능한 모든 영양소가 바닥이 나면 대장균들은 증식을 멈추고 일정한 개체 수를 유지한다. 

 

다음날 대장균이 잔뜩 증식해 있는 12개의 플라스크의 배양액에서 정확히 1%의 배양액을 유리 피펫으로 추출해 동일한 영양소를 가득 채운 새로운 12개의 플라스크에 넣어준다.

가용한 모든 식량이 바닥이 나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대장균 중 아주 운좋은 1%는 유리 피펫이라는 노아의 방주를 타고서 식량으로 가득찬 새로운 플라스크로 옮겨가 다시 증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세대가 증식을 하는 대장균을 이러한 배양 과정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20년 동안 반복하면서 12개의 플라스크를 통한 각각의 유전적인 변화를 약 45,000세대에 걸쳐 관찰한다.

45,000세대는 인류에게는 100만 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실험을 진행하는 도중 33,100세대 근방에서 12개의 플라스크 중 한 플라스크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배양액 속의 대장균 이 증식해서 개체수가 많아지면 그 배양액은 탁해진다. 

이 탁해진 정도를 통해 대장균이 얼마나 증식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 탁해진 정도를 OD (optical density, 광학 밀도)라고 부른다. 

 

33,100세대 직후의 한 플라스크의 OD가 갑자기 6배 가까이 증가하게 된다.

이 배양액을 옮겨놓은 후속 플라스크에서도 OD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했다. 

이는 대장균의 밀도가 몇 배 더 높아졌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12개의 모든 플라스크에 똑같은 성분의 영양액이 주어 졌으므로 한 플라스크에서만 다른 플라스크들보다 몇 배 더 많은 대장균이 증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트르산(citric acid, 구연산) 때문이 었다. 

시트르산은 우리가 귤을 먹을 때 새콤한 맛을 느끼게 하는 약한 산이다.

배양액 영양소 성분에는 시트르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장균은 산소가 주어진 환경에서(호기성 환경, 好氣性, aerobic) 시트르산을 분해하여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일체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산소가 공급되는 환경에서는 시트르산의 분해 능력이 대장균과 살모넬라 같은 병원균을 분류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총 12개 중 한 개의 플라스크에 담긴 대장균이 33,100세대 직후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시트르산을 분해하 여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11 개의 플라스크에서 배양되던 대장균은 사용 가능한 영양소를 다 소모하고는 증식이 정체되었지만,

변이를 일으켜서 시트르산을 영양소로 사용 할 수 있게 된 대장균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많기 때문에 다른 플라스크에 있는 대장균보다 몇 배 더 증식할 수 있었다.

 

진화는 생명체의 점진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창조과학회는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새가 나왔다"와 같이 진화의 속도에 대한 왜곡을 유포 하고 있다.

물론 진화와 관련한 이론 중에는 단속 평형론같이 진화의 속도를 빠르게 해석하는 이론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점진적인 진화를 설명하고 있으며, 빠른 시간대라는 것도 지질학적인 장구한 세월을 의미
한다. 

 

진화론은 한 종류의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의 작은 변이 들이 수만, 수십만 혹은 수백만 세대에 걸쳐 축적이 되면 기존의 생명체와 상당히 다른 장치들을 가지고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생명체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낸다.

따라서 기존의 생명체와는 다른 장치를 발현하는 생명체의 출현은 당연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창조과학회는 이 렌스키의 실험을 폄하한다. 

그들은 단세포 대장균이 다세포 생명체가 된 것은 아니기에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장균이 시트르산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기능의 변화는

실험실이라고 하는 환경에서 단지 20년 만에 일어난 변이의 축적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5억 년에 달하는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를 35살 청년의 나이로 환산한다면 20년은 단지 6초에 해당하는 시 간에 불과하다.

35살의 청년이 그때까지 살아온 일생 중 6초의 시간 동안 성취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렌스키 박사의 실험은 비록 지질학적으로 찰나에 불과한 2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통해서 종과 종이 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렌스키 박사의 실험은 시트르산을 분해할 수 있는 변종 대장균이 생물 분류학적으로

"너는 이 시점부터 대장균이 아니라 병원균에 더 가까운 놈이야"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정도로

기존의 대장균과는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장치들이 확연하게 달라진 생명체로 변화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렌스키 박사의 실험을 35억 년의 장구한 세월을 통해 하나님의 연속 창조의 놀라운 경륜 가운데서 이루어져왔던 역동적이고 신비한 생명 현상의 다양성의 증가를 실험실의 제한된 환경에서나마 극적으로 재현한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