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3. 고리종 이야기

w.j.lee 2024. 4. 18. 13:20

 

13. 고리종 이야기

 

1991년은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첫 해였다. 

복학 후 첫 학기를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경북 점촌 지역에서 열린 여름 농촌 선교에 참여했다. 

하루 늦게 출발한 탓에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가지 못하고, 승용차를 타고 점촌으로 향했다.

당시 충청북도 괴산에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길에 발견했던 두 가지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첫 번째는 언어였다. 

괴산에서 문경으로 다가갈수록 충청도 사투리가 점점 경상도 사투리로 변하더니 괴산과 문경의 경계에서 접했던 말은 충청도 사투리인지 경상도 사투리인지 분간이 안되다가 새재를 넘는 순간 경상도 사투리로 분명하게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

언어적 점이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던 길가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절경(絕景)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만들었던, 그 수려한 경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진흥왕이 이 새재를 넘어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이유가 신라가 험준한 산맥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이 새재라는 천혜의 요새를 두고 사방이 훤히 트여 있는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운 것이 결코 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역사적인 깨달음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한국과 또 다른 풍광이 재미를 더해주는 흥미로운 지형을 가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남북으로 1,240km에 이르는 긴 태평양 해안선을 접하고 있다.

내륙 방향인 동쪽으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격렬한 지진 활동을 일으키는 샌앤드리어스 단층대를 따라 늘어서 있는 해안 산맥(California Coast Ranges)이

태평양 해안선을 좇아서 마치 병풍을 둘러 세운 것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산맥의 산들 중에는 안텔로프힐처럼 몇 백미터가 채 안 되는 나지막한 봉우리들도 있지만 로마 프리에타봉(1,150m)이나 산티아고봉(1,730m)처럼 높고 험준한 산들도 꽤 있다.

이 산들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나아가면 언제 험준한 산들이 있었느냐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게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평원은 센트럴 협곡(Central Valley)으로 불린다.

나는 이 평원이 캘리포니아 주 중앙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센트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한다.

비록 좁고 긴 골짜 기라는 뜻의 협곡(valley)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이곳은 720km의 길이에 평균 폭이 8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하게 광활한 평원 지역이다.

 

협곡을 가로질러 더 동쪽으로 가보면 해안 산맥보다 몇 배 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Range)이 위용을 드러낸다.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 최고봉인 4,400여 미터의 휘트니 산과 그 유명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품고 있는 산맥이 바로 이 시에라네바다 산맥이다.

 

해안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캘리포니아 주 거의 북쪽 끝에 있는 레딩(Redding)이라는 도시 부근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160km 정도 북쪽에 위치한 테하차피 (Tehachapi)라는 도시 인근에서 또 다시 합쳐진다.

 

센트럴 협곡은 마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지휘한 군대의 반월진 속에 갇혀버린 로마 병정들같이, 

혹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에 포위당한 왜적의 군선들처럼 두 산맥 사이에 끼어서 완벽하게 갇혀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센트럴 협곡은 협곡이라고 불리기에는 엄청나게 큰 평원 지대이지만

해안선을 따라서 늘어선 해안 산맥과 동쪽 내륙 쪽에 있는 웅장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의해

동서남북이 꽉 막혀 있는 분지 같은 지형을 형성하므로 협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평원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산맥에서 벌어졌던 재밌는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 species)은 생물을 분류하는 최소 단위였다. 

유성 생식을하는 생물의 경우는 교미해서 번식할 수 있느냐 여부가 매우 중요 한 종 분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분류의 최소 단위인 종만으로는 충분치 않은지 "아종(種, subspecies)이라는 하위 단계까지 만들어졌다.

아종은 분화가 진행되어 다른 형질들이 많이 발현됐지만 서로 교배를 통해 번식이 가능하기에 다른 종으로는 분류되지 않는 상태다.

태평양을 접하는 미국의 주는 3개가 있다. 앞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이 남쪽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며 살펴보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 주, 워싱턴 주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서해안 주들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워싱턴 주는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이 아메리카 대륙의 길고 긴 서부 태평양 해안가를 따라 서식하는 도롱뇽이 있다.

이 도롱뇽들은 원래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같은 미 대륙의 북부 해안가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이 도롱뇽들은 미대륙의 해안 선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미국의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까지 이르는 대단히 넓은 지역에 걸쳐 서식지를 확장한다.

하지만 도롱뇽들이 더욱더 남쪽으로 서식지를 확장하여 캘리포니아 북부에 이르렀을 때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만난다.

센트럴 협곡이라는 광활한 평원 지대가 펼쳐져 있던 것이다.

광활한 대평원 및 작열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조그만 도롱뇽들이 생존하기에 결코 우호적인 조건일 리 없다.

따라서 도롱뇽들은 두 갈래길로 우회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센트럴 협곡을 둘러 싸고 있는 해안 쪽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서식지를
넓혀나갔다. 

아라비아 카라반들은 톈산산맥을 피해서 산맥 남쪽과 북쪽으로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 도롱뇽들은 오히려 평야 지대를 피해서 평야 지대의 서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 산맥을 따라 서식지를 남쪽으로 넓혀갔던 것이다.

 

따라서 협곡 서쪽에 있는 해안 지대 산맥으로 남하했던 도롱뇽들과 협곡 동쪽에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갔던 도롱뇽 들은 서로 유전자를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도롱뇽들이 80km에 이르는 광활한 대평원을 횡단해서 교미를 통해 유전자를 교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해안 지대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도롱뇽들 은 무수히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격리될 수밖에 없었고 색깔이 달라지고 얼룩이 뚜렷해지는 등 점점 다른 형질을 발현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해안 지대 산맥을 따라 내려온 도롱뇽들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따라 내려온 도롱뇽들은 대평원이 끝나는 남부 캘리포니 아에서 마침내 조우한다. 

같은 조상을 둔 두 상이한 도롱뇽 집단이 장구한 시간에 걸친 여행 끝에 재회를 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어떤 일이벌어졌을까? 

 

길고 긴 시간 동안 못 만났던 회포를 풀기 위해 두 도롱뇽 집단의 젊은 청춘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고 교미하여 번식했을까? 

아쉽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이 두 집단의 도롱뇽들은 서로 생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성 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에는 상호 간에 생식이 가능한가의 여부가 같은 종으로 분류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센트럴 협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도롱뇽들의 격리가 시작된다.

센트럴 협곡 입구에서부터 캐나다에 이르는 북쪽에 사는 도롱뇽들과 협곡 서쪽인 해안 산맥에서 살아나가는 다양한 도롱뇽 개체군들은 이웃하는 도롱뇽 개체군들과 교미를 통한 번식이 가능하다. 

또한 협곡 북쪽의 똑같은 도롱뇽들과 협곡 동쪽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서식하는 도롱뇽 개체군들도 인접한 장소에 서식하는 도롱뇽 개체군들과 생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협곡을 고리처럼 한 바퀴 돌아서 남쪽에서 만난 두 도롱뇽 개체군들끼리는 생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달리 변해버렸던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오리거넨시스(Oregonensis)라는 이름의 도롱뇽은 

캐나다에서부터 미대륙 서부 해안선을 따라서 미국의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서식하고 있었다. 

이 오리거넨시스 도롱뇽은 갈색 바탕에 희미한 얼룩무늬를 지니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와 캘리포니아 북부에 이르게 된 오리거넨시스는 센트럴 협곡을 만나서는 서쪽의 해안 산맥과 동쪽의 시에라네바다 산맥 두 갈래로 분기하여 계속 남쪽으로 서식지를 확장한다.

 

해안 산맥을 따라서 남하를 계속한 오리거넨시스는 크산토프티카 (Xanthoptica)와 에시숄치(Eschscholtzii)라는 아종으로 분화했으며 몸에 지니고 있는 희미한 얼룩은 점점 사라졌고 적갈색 혹은 옅은 핑크나 오렌지 색 같은 단일색을 띤다.

오리거넨시스는 크산토프티카와 생식이 가능하며, 크산토프티카는 협곡 서쪽에서 그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서식하는 에시숄치와의 생식이 가능하다.

마치 사슬이 연결되듯이 도롱뇽들은 자신들이 서식하고 있는 인접 지역의 도롱뇽들과 생식을 통해 번식할 수 있는 같은 종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동쪽 내륙의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남하를 계속한 도롱뇽들은 오리거넨시스에게 있었던 희미한 얼룩이 점점 또렷해지는 외관상의 변화가 발생했고 플라텐시스(Platensis), 크로케아테르(Croceater), 그리고 클라우베리(Klauberi)로 분화되었다.

이 도롱뇽들 역시 이웃 지역의 도롱뇽과 생식이 가능한 아종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해안 산맥을 따라 서식하는 도롱뇽들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서식하는 모든 도롱뇽 집단들은 이웃하는 다른 도롱뇽 집단들과 생식이 가능한 아종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협곡이 끝나는 지점인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다시 만난 두 도롱뇽의 아종인 에시숄치와 클라우베리는 서로 교미가 불가능하다.

교미를 통한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협곡 북쪽 및 동서 산맥에 사는 모든 도롱뇽 개체군들이 다 멸종 되고

협곡이 끝나는 남쪽에서 만나게 되었던 에시숄치와 클라우베리, 이 두 도롱뇽 개체군들만 남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이 두 집단을 다른 종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하지만 남쪽에서 만난 두 도룡뇽 집단은 해안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 각기 다른 갈래로 다양한 아종들을 형성하며,
원서식지인 협곡 북쪽에서 살아가는 오리거넨시스 도롱뇽 집단과는 전체 적으로 같은 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고리종(ring species)이라고 한다. 

고리의 끝을 보면 분명 다른 종이다.

하지만 끝을 제외한 전체적인 고리의 모양을 보면 분명 같은 종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리종은 하나하나의 개체군을 이웃 개체군과 연결하면 같은 종이지만

계속 연결해서 고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만 나는 곳에서는

두 개체군이 같은 종으로 폐합되는 고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이 됨으로써 끝이 어긋나버린 고리로 끝난다.

 

이 고리종이 가져다주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같은 종으로 묶을 수도 없고 다른 종으로 떼어낼 수도 없다.

한편으로는 같은 종으로 묶어버릴 수도 있고 다른 종으로 떼어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리종은 우리에게 종의 개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괴산에서 문경으로 넘어갈 때 충청도 방언이 점이 지역을 거치며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다가 완전히 경상도 방언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종 개념도 한 종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변화를 수반한 점이 단계를 거쳐서 분화가 일어나는 것,

즉 진화 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창조과학회에서는 “종류대로"라는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에 집착한 나머지 자연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종 분화와 진화의 증거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고리종의 사례를 통해서 종이라는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지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연속 창조를 통해 지구상에 발현 된 생명의 다양성을

단지 우리 시대의 시간적 단면 위에서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종이란 고정되거나 불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의 놀라운 경륜을 통해서 충분히 재정의할 수 있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일 뿐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