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1. 구조물에 사용되는 충진재와 진화 이야기

w.j.lee 2024. 4. 18. 13:20

 

 

11. 구조물에 사용되는 충진재와 진화 이야기

 

우리가 거주하는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틀 혹은 문틀이나 벽, 목욕탕의 욕조와 욕실 타일, 또는 수도 파이프와 세면대가 맞닿아 있는 부분 등은 어김없이 빈틈을 메워주는 충진재가 덧입혀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이처럼 건축 구조물에서 물성이 다른 이질적인 두 재료가 만나는 부분에서 발생하는 틈새를 메우기 위해 시공하는 충진재를 코킹 (caulking) 재료라고 부른다.

건축 구조물은 주로 정적인 하중을 감당한다.

반면 도로나 교량 그리고 항만 같은 토목 구조물은 달리는 자동차, 기차, 이착륙하는 비행기, 파랑과 너울 등에 의한 동적 하중을 감당한다.

이러한 동적 하중을 감당하는 부재들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하는 재료를 실란트(sealant)라고 부른다.

모든 구조물에는 부재와 부재 간의 틈새를 막아 주는 충진재를 시공하여 거기에 물이나 공기가 침투하거나 이물질이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인체 역시 충진재 기능을 하는 물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충진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콜라겐(collagen)이라고 부르며,

콜라겐은 우리 몸의 구성 성분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또 가장 중요한 단백질이다.

만일 우리 몸에 콜라겐이 부족해서 충진성이 떨어 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충진성이 부족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대표 적 현상이 바로 괴혈병이다.

괴혈병에 걸리면 우리 몸에서 가장 이질적인 두 조직인 잇몸과 이가 만나는 곳이 수밀하게 충진되지 못하고 이격되어 그 틈새로 피가 새어 나와 심각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베링해협을 발견한 탐험가 비투스 베링(Vitus Bering) 이 바로 괴혈병에 희생된 대표적 인물이다.

콜라겐을 만드는 주재료는 비타민 C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간에서 포도당을 이용해 비타민 C를 합성 해낸다.

하지만 사람은 비타민 C를 합성할 수 없다.

 

사람 이외에 비타민 C 를 체내에서 합성할 수 없는 동물은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과일 박쥐, 그리고 애완용 쥐인 기니피그 등이 있다.

따라서 사람을 비롯하여 이 동물들은 반드시 음식을 통해 비타민 C를 섭취해야만 한다.

비타민 C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에 많이 들어 있다.

동물의 몸에도 비타민 C는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따라서 동물의 고기를 통해서도 비타민 C를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비타민 C는 열에 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고기를 불에 익히면 비타민 C가 파괴된다.

 

육류를 불에 익혀 먹는 인류는 육류를 통해 비타민 C를 확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류가 비타민 C를 취득하는 주공급원은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다.

그러나 북극 같은 극지방에 사는 이누이트족은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통해 비타민 C를 공급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해서 잡은 동물을 불에 익히지 않고 날고기를 먹음으로써 비타민 C를 섭취해왔다.

18세기에 이러한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던 비투스 베링은 탐험지인 베링해협의 한 섬에서 비타민 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으로 사망한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북태평양을 바로 건너가지 않고 미국 북쪽인 캐나다를 지나 알래스카를 거쳐 베링해협을 넘어 캄차카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한국 영공으로 진입한다.

즉 미국발 한국행 비행기들은 북쪽으로 올라가 북극권을 거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 서부로 여행하는 독자들은 괴혈병으로 죽어간 비투스 베링과, 혹독한 자연 조건에서도 날고기를 먹음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던 이누이트족의 생존의 지혜를 생각하면서 베링 해협을 건너보는 것도 여행의 풍미를 더할 듯싶다.

 

대분분의 동물은 비타민 C를 체내에서 합성할 수 있지만 왜 인간은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 C를 체내에서 합성할 수 없을까? 

그 해답은 인간의 염색체 8번에 있다.

8번 염색체에는 포도당에서 비타민을 합성해내는 4단계의 공정을 진행시키는 4개의 유전자가 있다.

3개의 유전자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마지막 단계를 진행시키는 GLO라는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켜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결국 이 4번째 유전자의 고장으로 인해 인간은 비타민 C를 체내에서 합성할 수 없게 되었다.

 

진화론에서는 진화를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생존에 유리한 변이가 일어난 개체는 다른 개체들보다 쉽게 생존하고,

그 유리한 변이를 물려받은 후손들을 많이 남기게 되며,

그런 식으로 수많은 세대가 지나면서 많은 변이들이 누적되면 조상과는 다른 형질과 장치를 지닌 다른 종으로 분화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하지만 비타민 C의 합성 유전자의 손실은 결코 생존에 유리한 변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생존에 유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치명적인 변이였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어떻게 인류는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채소나 과일이 인류의 주먹거리였기 때문이다.

인류는 체내에서 비타민 C를 합성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먹거리를 통해서 비타민 C를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다.

인류 이외에 체내 비타민 C 합성 기능을 상실한 다른 동물들은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과일 박쥐, 기니피 그 등이 있고 이 동물들은 전부 과일을 주식으로 한다.

유전자에 발생한 치명적 결함이 생존에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은 인류를 포함한 이 동물들의 먹거리 때문이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침팬지, 그리고 오랑우탄과 고릴라는 진화적인 근연 관계가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 옛날 과일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던 인간과 다른 유인원들의 공통 조상의 GLO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다.

그 변이가 일어나서 기능을 못하게 된 유전자는 유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되어 오다가 인간과 다른 유인원들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진화적인 분기점들을 겪으면서 다른 종으로 분화되어왔다는 설명이 성립된다.

 

인간,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는 근연 관계가 가까우므로 위의 설명이 타당해보인다.

하지만 인간과 진화적인 근연 관계가 먼 과일 박쥐와 기니피그가 공통적으로 지닌 GLO 유전자의 기능 상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브라운 대학교의 생물학과 교수 케네스 밀러는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케네스 밀러 교수는 과제를 제출한 두 학생의 보고서가 너무도 똑같아서 부정행위를 의심하고 교수실에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

두 학생은 부정행위를한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교수님 저희들은 룸메이트입니다. 

매일 스터디를 같이 하고 참고 도서도 같은 것을 보기 때문에 자연히 생각이 같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비슷한 보고 서를 제출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에 대해 케네스 밀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네들 말이 맞을 수도 있구먼."

혐의를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고 느낀 학생들의 얼굴에선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뒤이어서 케네스 밀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그런데 이 두 보고서를 보면 똑같은 철자의 오류가 있는 단어 6개가 정확하게 겹치는데 이것도 좀 설명해줄 수 있겠나?"

 

두 학생이 스터디만 같이 하고 서로의 보고서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두 보고서에는 철자의 오류가 동일한 단어가 6개나 겹칠 리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철자가 오류인 단어들을 공유한다는 것은 두 학생들이 보고서의 워드 프로세서 파일을 공유했고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보고서를 통째로 베껴 썼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후손에게 유전 물질을 전달하는 과정도 마치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의 "복사 및 붙여넣기"와 흡사하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유전 물질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마치 위 에피소드에 나오는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보고서를 "복사 및 붙여넣기" 했을 때 철자 오류가 고스란히 전달되듯이, 부모의 특정한 유전자의 구조 오류도 똑같이 후손에게 전달된다.

 

인간과 침팬지의 GLO 유전자의 고장난 구조는 상당히 흡사하다. 

하지만 침팬지보다 근연 관계가 먼 오랑우탄의 GLO 유전자의 고장난 구조는 좀 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과 근원 관계가 아주 먼 과일 박쥐나 기니피그의 고장난 GLO 유전자의 구조는 인간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염기 서열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정확하게 공통 조상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4천만 년 전 인류와 다른 유인원의 공통 조상의 GLO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하는 변이를 일으켰고 그 변이를 수반한 GLO 유전자는 계속 후손에게 유전되어왔다.

기능을 상실한 결정적 변이를 겪은 GLO 유전자이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변이들이 일어나며 유전 되었다.

따라서 가장 최근에 진화적인 분기점을 경험한 인류와 침팬지의 GLO 유전자의 서열은 매우 흡사할 수밖에 없다.

 

다소 오래된 과거에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과 진화적 분기점을 겪었던 오랑우탄이나 고릴라의 GLO 유전자의 서열을 인간의 GLO 유전자의 서열과 비교하면 침팬지보다 차이점이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과 진화적인 계통이 전혀 다르므로 근연성이 떨어지는 과일박쥐나 기니피그의 고장난 GLO 유전자의 서열은 인간 및 다른 유인원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에 생물학자들은 해부학적인 구조 혹은 외관상의 특징을 통해 진화적인 계통을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유전학의 발달은 진화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마치 차량의 블랙박스가 차가 이동한 경로와 그 경로를 운행하는 중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영상 데이터로 생생히 기록하듯이

생물의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의 진화적 경로와 사건을 기록한 블랙박스 역 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유전학을 통해 밝혀진, 장구한 시간대에 걸쳐 우리의 세포 속에 남겨진 진화의 증거 한 가지를 다음 장에서 살펴보 도록 하자.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