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5.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론

w.j.lee 2024. 4. 18. 13:19

 

15.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론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론"(Evolutionary theory under fire)이라는 글이 창 조과학회의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다. 

나는 그 글을 읽다가 "불타 없어 져 가는 진화론"의 원래 영어 제목이 "Evolutionary theory under fire" 라는 것을 알고는 아연실색했다.

이러한 과장은 번역의 융통성을 넘어선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에서 under fire라는 관용구는 “공격을 받다", "비판을 받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Evolutionary theory under fire를 수사적인 표현으로 번역을 한다면 "격론에 휩싸인 진화론"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 될 것이다.

 

Evolutionary theory under fire는 「사이언스」(Science Magazine)의 편집자였던 로저 르윈(Roger Lewin)이 1980년 10월 중순경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필드 자연사 박물관(Field Museum of Natural History)에서 개최된 진화론 학술 회의를 요약해서 「사이언스」에 게재했던 글의 제목이었다.

전문적인 편집인이고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과학 저술가답게 로저 르윈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지었다.

창조과학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해 시카고 회의에서 대진화가 부정되었다고 주장하고있다. 

창조과학회의 웹사이트에 있는 주장을 여기 인용한다.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론"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이번 회의를 진화론의 큰 전환점이 될 역사적 회의였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번 회의에서 소진화가 쌓여 대진화를 이룬다는 종래의 진화론의 기본 명제가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종내(種內)에서의 작은 변이(變異), 즉 소진화(microevolution)가 일어난다 해서 그것을 연장하여 한 종에서 더 진보된 다른 종으로 변화한다는 대진화(macroevolution)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중심 제목을 두고 회의를 했으나, 그 대답은 분명히 No!라고 결론지었다.

 

먼저 위의 인용글에서 언급된 "소진화"(microevolution)와 “대진화"(macroevolution)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고

그다음 창조과학회의 주장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소진화란 같은 종 안에서 일어나는 진화적 다양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개의 경우 멕시코가 원산지인 조그마한 치와와부터 스위스 알프스에서 브랜디가 담긴 술통을 목에 걸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거대한 세인트버나드 같은 대형견까지 다양한 품종들이 존재한다.

어떤 품종은 몸집이 작고 어떤 품종은 몸집이 크고,

어떤 품종은 털이 길고 어떤 품 좋은 털이 짧고,

어떤 품종은 주둥이가 길고 어떤 품종은 주둥이가 뭉툭 하지만 

이들 모두 생물학적으로 개라는 동일 종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같은 종이면 자연 상태에서 교배하여 번식 능력이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다.

 

반면에 대진화란 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다른 종으로 종분화(speciation)를 이루는 진화적 변화를 의미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한 현란한 생명 다양성의 원인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 바로 이 대진화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진화라고 말할 때의 진화란 바로 새로운 종들이 탄생하는 이 대진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과학회에서는 대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창세기에 있는 문자적 표현인 "종류대로"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종의 장벽을 넘어서 다른 종으로 분화되는 대진화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진화 생물학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시카고에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소진화는 발생하지만 대진화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자발적으로 선언했다고 하니, 창조과학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처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사실 "대진화 불가" 선언이란 지구상에 존재 하는 생명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포기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 진위를 파헤쳐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 인용한 창조과학회의 글은 원저자인 로저 르윈이 「사이언스」에 게재한 내용을 왜곡한 것이다. 로저 르윈의 원글은 다음과 같다.

 

시카고 회의의 중심 의제는 소진화를 이끄는 메커니즘들이 

대진화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까지 확대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입장에 있는 분들에게는 폭력처럼 여겨질 위험성도 있지만,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오"(No)였다.

그러나 명확하지 않은 점은 소진화가 대진화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냐는 점이다.

그둘은 현저할 정도로 겹쳐지면서 연속성을 유지하는것처럼 보인다.

 

사건의 전말은 부분적인 발췌를 통한 왜곡이었다. 

“No”라는 대답까지 만 발췌해서 세계적인 진화학자들이 대진화, 즉 진정한 의미의 진화를 부정한다고 선전한 것이다.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 글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개인 홈페이지 및 블로그 등에서 공유에 공유를 거듭하면서 하나님께서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변증하는 꽤 인기 있는 아이템이 되었다.

 

선한 의도가 끝까지 선하려면 그 의도를 관철시키는 방법도 선해야 한다. 

선한 의도를 이루려는 방법이 이렇듯 올바르지 않다면 그 의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나는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론"이라는 글을 게재한 저자가 아마 공인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때는 이렇게 고의적인 조작과 왜곡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한 글쓰기를 할 때는 엄밀하게 자료를 다루면서,

어찌 하나님의 창조를 변증하는 글쓰기를 할 때는 조작과 왜곡을 우습게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로저 르윈의 사이언스 기고문에 따르면 시카고 회의의 주요 주제는 전통적인 점진적 진화론과 새롭게 대두된 단속 평형 이론과의 조율에 대한 것이었다.

즉 진화의 속도(tempo)에 관한 것이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분화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다윈 이후 진화 생물학의 주류였다.

장구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진화, 이 전통적인 관점을 점진주의(Gradualism)라고 부른다.

다음 그림은 점진주의적 관점에서 종 A가 종 B로 분화되는 것을 도해한 것으로, 매우 긴 시간 동안 완만하게 누적되는 진화 과정을 거쳐 종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단속 평행 이론(Punctuated equilibrium)은 종과 종 사이가 분화 되는 과정이 길고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속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단속 평형 이론은 하버드 대학교 고생물학과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교수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닐스 엘 드리지(Niles Eldridge) 박사에 의해 1972년에 제창되었다.

다음 그림은 단 속 평형 모델을 도해한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종분화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고 형태적인 변화가 없는 안정기가 길게 계속되는 양상이 표현되어 있다.
위의 두 그림들은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도해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발생되는 진화의 양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공통조상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를 하며 생명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역동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그림으로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독자들이 진화에 대해 갖기 쉬운 오해 중 하나가 진화는 단선적인 가닥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화의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

동시에 여러 갈래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나무처럼 다선적으로 분기되어 진행된다.

굴드는 현생 포유류 중 최다 종수를 자랑하는 박쥐, 영양, 혹은 설치류의 진화 과정을 나무로 표현한다면 수천 개의 가지를 지닌 복잡한 나무가 될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창조과학회에서는 단속 평형 이론을 가리켜 "괴물 이론"이라고 폄하 한다. 

어미와 똑같은 새끼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미와 생판 다른 괴물이 태어난다는 의미다.

창조과학회는 "어느 날 파충류가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새끼 파충류 대신 새가 알을 깨고 나왔다"라고 표현하며 중간 종의 화석이 없는 것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단속 평형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위 그림에서 단속 평형 모델에서 종 A에서 종 B가 분화되는 시간을 짧게 묘사해놓았다.

과연 얼마나 짧을까?

창조과학회의 주장대로 파충류 어미가 새를 낳듯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세대만에 급격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장구한 지질학적 시간에서 "짧다"라는 표현은 수만 년 이상을 의미한다.

단속 평형 이론에서 주장하는 급격한 종 분화는 수십만 내지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분화가 일어난다는 기존의 점진주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으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급속한 종 분화가 몇만 년 안팎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집에서 즐겨보는 텔레비전의 변천사를 진화와 비교해보자. 

193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70여 년 동안 가정에는 무거운 브라운관을 지닌 텔레비전 밖에 없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자 새로운 모델의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기술이 상용 화되면서 브라운관이 도태되고 텔레비전이 갑자기 가볍고 얇아진 것이다.

브라운관의 두께와 텔레비전의 무게가 7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줄어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프로젝터 타입의 DLP, 플라즈마 타입의 PDP, 그리고 LCD 타입 등 벽에 걸 수 있을 만큼 홀쭉하고 가벼워진 텔레비전들이 다선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즉 급격한 형태의 변화가 한 순간에 단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선적인 변천 과정이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프로젝터 타입의 DLP는 곧 시장에서 도태된다. 출현하자마자 단종되어버린 것이다.

이 텔레비전을 진화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종 분화에는 성공했지만 곧 멸종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플라즈마 타입의 PDP는 LCD 타입과의 경쟁에서 서서히 밀려나면서 2016년인 지금은 거의 단종 직전에 이 르렀다.

텔레비전 변천 과정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LCD 타입도 백라이트 유닛으로 LED를 사용하는 타입, 그리고 유기 발광 다이오드를 사용하는 OLED(Organic LED) 타입 등등으로 계속 분기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느 날 갑자기 브라운관이 도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신기술들을 수없이 개발하고 테스트를 해왔기 때문에

그 기술 변천사를 꿰뚫 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텔레비전의 등장이 급작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조형적인 외관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텔레비전이 개발되어 하루아침에 확 바뀐 모델을 디자인해야만 했을 것이다.

 

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점진주의적 모델이 더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유전학자들은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는 동안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변이들을 추적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진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점진주의적 관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화석 증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고생물학자의 관점에서 진화의 양상을 결정짓는 형태학적 변화는 격변적으로 단속되며 불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고생물학자는 단속 평형 모델이 타당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 10월 미시간 호의 호반에서 열렸던 시카고 회의는 진화의 속도와 관련하여, 진화 생물학 분야의 국제적 석학들의 의견을 조율했던 역사적인 회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 한쪽에서는 이 기념비적인 회의에서 세계적인 진화 생물학자들이 진화를 부정했다는 왜곡된 정보를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를 뒷받침하는 인기 있는 증거로 악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