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18. "시치미를 떼다"와 궁창 위의 물

w.j.lee 2024. 4. 18. 13:18

 

18. "시치미를 떼다"와 궁창 위의 물

 

우리말 표현에 "시치미를 떼다”란 표현이 있다. 

이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연상이 되는가? 

필경 어떤 일을 저질러놓고도 아닌 척하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연기하는 모습이 주로 연상될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 "떼다"란 단어가 들어있지만 부착되어 있는 것을 잡아 뜯어버리거나 어떤 표식을 떼어내 제거해버리는 물리적인 행위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치미란 단어는 어떤 뜻일까?

이 단어는 설날 세시 풍속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설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다.

우리 민족은 떡국으로 세찬을 먹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 후 윷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잔치 분위기는 부럼깨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등 또 다른 다양한 세시풍속 놀이가 행해지는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 이후로는 이러한 세시풍속 놀이가 자취를 감추면서 본격적으로 새해 농번기를 준비한다.

 

요사이 우리는 세찬으로 먹는 떡국 국물을 소고기를 우려서 만든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떡국은 꿩고기를 우려내어 국물을 만들었다. 

꿩이 없을 때는 닭을 사용하기도 했기에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나왔지만,

우리 조상들은 설날 떡국에 사용되는 고기를 장만하기 위해 꿩 사냥을 했고 이때 대개 매를 이용했다. 

 

매의 꽁지에 방울을 달아 꿩을 잡기 위해 날려 보낸 매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했지만 매 자체가 워낙 빠른 날짐승이다 보니 가끔은 주인도 매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꽁지에 매방울뿐만 아니라 매의 주인이 "어느 마을에 사는 아무개"라고 밝힌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만일 마음씨 좋은 사람이 주인을 잃어버린 매가 꿩을 사냥한 채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면 그는 꽁지에 달린 표식을 보고 주인을 찾아서 매와 꿩을 돌려줄 것이다.

그 경우 매의 주인은 잃어버린 매를 찾아준 사람을 다음번 사냥에 초대하여 잡은 꿩을 선물로 나누어주곤 했다.

반대로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매를 발견한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매의 꽁지에 붙어 있는 표식을 떼어낸 다음 매뿐만 아니라 그 매가 사냥한 꿩도 가로챌 것이다. 이때 매의 꽁지에 부착되어 원주인을 알려주는 표식 이름이 바로 시치미다.

 

따라서 "시치미를 떼다"란 말은 지금은 알면서도 모른 척, 해놓고도 하지 않은 척

음흉한 연기를 하는 것으로 이 해를 하고 있지만,

본시 무언가 붙어 있는 것을 뜯어내는 물리적 행위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부지불식간에 현대적 개념을 통해 이해하면서 곡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창세기 1:6 이하의 "궁창"(穹蒼)은 현대 과학에 경도된 우리들이 원래의 이미지를 잘못 그려내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다.

한자 번역인 궁창(하늘 , 푸를 )의 뜻을 생각해 보자.

개명 천지인 현대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떠올리는 궁창 이미지는 "태양빛이 공기에 산란되어 파랗게 보이는 텅비어 있는 공간"이다. 

어느 누구라도 궁창이란 단어를 통해 파란 하늘이 펼쳐진 빈 공간에 구름이 있고 그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연상하기 쉽지, 딱딱하고 견고한 방탄 유리벽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궁창을 뜻하는 영어 표현은 firmament이다. 

firm이라는 영어 단어는 "딱딱하고 견고한" 모양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firm이라는 철자가 접두사로 쓰인 궁창을 뜻하는 firmament라는 단어 자체에서 딱딱하고 견고한 물체가 암시된다.

그러므로 이 영어 표현은 궁창이라는 한자 단어보다 히브리 원어에 가깝다.

궁창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는 라키야(raqiya)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했던 하늘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늘과는 사뭇 달랐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하얀 구름이 펼쳐 있는 푸르고 빈 공간이 아니라,

중세 유럽의 성당의 돔(Dome) 모양의 천장처럼 생긴 딱딱하고 투명한 천정(天)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분명히 물이 존재 할 텐데,

물이 허공에 있다면 당연히 땅으로 왕창 다 쏟아져야 하거늘 비가 올 때만 가끔 물이 내려오는 것을 봐서는 물을 막고 있는 투명하고 견고한 천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천정에는 수문이 장치되어 있고 그 수문이 열릴 때 떨어지는 물이 비라고 생각했다(창 7:11, "하늘의 창"을 참조하라).

또한 고대 히브리인들은 별과 달, 그리고 태양과 같은 천체물들은 이 투명한 천정에 붙어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물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물을 가두어두는 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세 유럽 성당의 둥그스름한 돔 모양처럼 생긴 하늘에 있는 거대하고 투명한 구조물을 라키야(궁창)라고 불렀다.


결국 이 궁창이라는 단어에는 지구의 물의 순환 과정을 몰랐던 고대인들의 과학 상식이 담겨 있다.

창세기 1:6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기준으로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물과 물을 나누셨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을 나누신 것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갈 장소를 만드신 절대적인 은혜라고 여겼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그로 인한 홍수는 삶의 터전을 전부 휩쓸어가는 죽음의 재앙이었다.

따라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과 혼돈의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유리처럼 투명하고 견고한 궁창을 만들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물을 가두어두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궁창 개념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을 수용했던 그리스를 거쳐 중세 막바지인 16세기까지 유럽의 천문학을 지배했다. 

그런데 16세기 후 반인 1577년 11월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가 혜성을 관측한다. 

혜성은 이심률이 큰 타원 궤도를 이루며 저 멀리 궁창 너머에서 행성들이 붙어 있는 궁창을 뚫고 지구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만약 이 딱딱하고 투명한 궁창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궁창은 혜성에 의해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튀코 브라헤는 우주에 궁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창조과학, 특히 젊은 지구론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담겨 있는 창세기 1장이 현대 과학의 사실성에 부합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과학을 통해서 이러한 창조의 흔적을 증명해내 겠다는 다양한 시도들 중에는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것이 많다.

창조과학 회에서는 16세기 튀코 브라헤 시절에 이미 폐기된 궁창 개념을 마치 흘러 간 옛 노래를 리메이크하듯 되살리고 있다.

창조과학회는 궁창 위의 물이 노아 홍수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그들은 궁창의 모습을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한 것같이 유리처럼 투명하고 견고한 아치 모양의 천정이 아니라 현대적 개념의 하늘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이해해야 현대 과학의 모든 성과가 성경 말씀에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아 홍수를 일으킬 그 막대한 양의 물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대기 중에 떠 있는 것도 참 이상하다.

더 나아가 창조과학회는 이 궁창 위의 물이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위험한 방사선이나 에너지가 높아 유해한 단파장의 광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고대인들의 수명은 지금보다 훨 씬 더 길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위도에 관계없이 온실 효과에 의해 지구 전체가 동일하게 온화한 기후를 가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농밀한 이산화탄소 대기를 지닌 금성의 표면은 온실 효과에 의해 섭씨 400도 이상의 초열 지옥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만일 금성의 이산화탄소 대기의 농도와 비교할 수도 없이 거대한 수권층이 지구를 감싸고 있었다면 지구는 온실 효과에 의한 온화한 기후는커녕 금성 이상의 불지옥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창조과학회에서는 아담을 비롯해 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대부분 900 세 이상을 살았고 

특히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가 969세까지 살며 인류 최장수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궁창 위의 물이 유해 광선을 차단해준 효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홍수 이후에는 노아를 포함한 족장들의 수명이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는 통계학적인 방법론까지 동원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포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은 과학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일례로 노아의 홍수 때 민물 어종이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가에 관한 창조과학회의 설명을 살펴보자. 

창조과학회는 "홍수 때 염수와 담수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홍수 때도 담수로 고립된 지역이 있었다", "연어처럼 해수와 담수에 같이 사는 어종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들은 전혀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과학적인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정량적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즉 담수와 해수가 층을 이룬 곳이나, 담수로 고립된 부분이 있었다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홍수 속에서 그 부분만 해수에 섞이지 않고 담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유체 역학적으로 규명하고,

그 담수로 고립된 지역에서 살아남은 담수 어종들이 어떻게 전 세계의 담수 지역에 고르게 퍼져나가게 되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또한 모 든 담수 어종이 담수가 해수와 섞이면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연어처럼 담수와 해수에서 동시에 살 수 있는 몇몇 어종들은 어떻게 현대의 수많은 담수 어종들로 "분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진화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합리적인 설명을 일절 제공하지 못하면서 "홍수 때 해수와 담 수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홍수 때도 담수로 고립된 지역이 있었다”, “연 어처럼 해수와 담수에 같이 사는 어종이 있다"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지구상의 섬들은 대륙과의 연계성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대륙섬(Continental Islands)과 대양섬(Oceanic Island)이 그것이다.

대륙 섬은 한 때 대륙과 연결된 적이 있었던 섬이다.

일본, 영국, 마다가스카르 등이 대표적인 대륙섬이다.

반면 대양섬은 바다 한복판에서 탄생해서 한 번도 육지와 연결된 적이 없는 섬이다.

하와이 같은 폴리네시아 섬들이 대표적인 대양섬이다.

대양섬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담수 어종이 서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지의 민물에 사는 담수 어종이 육지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대양섬까지 짜디짠 바닷물을 헤엄쳐서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 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노아 홍수 때 담수 어종을 방주에 태웠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홍수로 인해 바닷물이 범람해서 강이나 호수 같은 담수와 섞여버렸다면 노아 시대에 서식하던 담수 어종들은 다 멸종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모든 담수 어종들은 불과 4 천 년 전 노아 시대 때

홍수에서 살아남은 바다 어종들 내지는 연어나 숭어 혹은 농어 같은 해수와

담수에서 동시에 살 수 있는 어종들이 진화해서 민물에 적응하여 생겨난 어종일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 불과 4천 년 남짓한 시간에 현재 지구 상에 있는 수만 종의 담수 어종이 나타난 것은 현대의 첨단 생물학에서조차도 전혀 주장하지 못하는 과격하기 짝이 없는 진화론이다.

 

어쨌거나 곁가지를 쳐내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노아 홍수 당시 강우량은 얼마나 됐을까? 

창세기 7:19-20에 의하면 홍수 수위가 “천하의 높은 산들보다 "15규빗이 더 높았다고 한다. 

1규빗이 현대 단위로 45cm 정도이므로 

천하에서 가장 높은 8,848m의 에베레스트 산보다 15규빗, 즉 약 7m가 높았다는 노아 홍수의 수위는 약 8,855m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정도 수위의 물의 양은 45억1천6백만 입방 km이며 이것을 중량으로 환산한다면 451경 6천조 이라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무게가 나온다.

실상 적당히 말하자면 바다의 평균 수심이 3,800m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8,855m에 육박하는 수심이면 바닷물의 양보다 몇 배 더 많아야 할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물이 공중(궁창)에 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과연 창조과학회의 주장대로 유해광선 차단 효과에 의한 수명 연장과 전 지구적으로 따뜻한 기후가 형성될까?

 

창조과학회는 이 물층의 위치가 오존층 아래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오존층은 지구로 들어오는 단파장의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생물의 생존에 유해한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오존층의 파괴는 현대의 심각한 환경 문제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대기 중의 대부분의 오존은 지상에서 10km에서 40km 사이인 성층권에 존재한다.

이 오존층에서 가장 오존 농도가 높은 25km 지점 바로 밑에서 물층이 시작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물층의 두께는 약 8,790m가 된다.

태양의 가시 광선은 절대 8,790m 두께의 물층을 통과할 수 없다.

바닷속 파래, 다시마, 김, 미역 같은 해조류들이 수심에 따라 다른 색을 띠는 이유는 수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바닷속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수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태양빛이 물입자에 산란되어 흩어져버려 전달되는 태양빛이 감소하기 때문에, 제한된 태양빛으로 광합성을 하기위해 깊은 곳에 사는 해조류일수록 진한 붉은 빛을 띤다.

만일 8,790m의 물이 대기 중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유해한 방사선과 광선은 물론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고 또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가시광선마저 통과하지 못하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물층이 대기를 누르는 압력일 것이다. 

물 층 아래 존재하는 대기에는 물층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8,790m 두께의 물이 내리누르는 압력은 과연 얼마만큼일까? 

인간이 잠수할 수 있는 한계는 잠수복의 도움을 받고도 고작 300m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그 이상의 수압은 인간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 

8,790m의 물층이 누르는 대기의 압력은 우리가 8,790m의 물속에 맨몸으로 잠수했을 때와 동일 한 수압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과연 그런 엄청난 압력을 어느 누가 견뎌 낼 수 있을까?

8,790m의 심해 수압에서는 세계 최초로 잠수 장비를 발명한 자크 쿠스토가 아니라 자크 쿠스토의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못 배겨낼 것이다.

 

물론 지하에 내재한 "깊음의 샘이 터지면서 나온 물이 있기 때문에 궁창 위의 물층의 두께가 그다지 두껍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깊음의 샘에서 터져나온 물의 양은 얼마일까?

노아 홍수 당시 전체 홍수량의 50%가 깊음의 샘에서 나왔을까?

그렇다면 궁창 위의 물층의 두께는 4,395m가 된다.

여전히 인간을 포함한 육상 동물이 견뎌 낼 수 있는 압력은 결단코 아니다.

전체 홍수량의 90%가 깊음의 샘에서 나왔을까?

그렇다면 궁창 위의 물층의 두께는 879m가 될 것이다.

이 두 께의 물층이 대기에 가하는 압력은 879m의 심해에서 잠수할 때 느끼는 압력이다.

이 역시 잠수 장비를 착용했다고 해도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몇 배나 넘어선 압력이다.

 

과학은 수치로 된 증거를 통해서 자연의 모습을 설명한다. 

창조과학회가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 의해 물층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세웠다면,

그들은 그 물층의 높이와 물의 양, 그 물층으로 인한 수명 연장 효과 등을 정량적으로 설명해내야 한다.

또한 그 물층으로 인한 역효과, 즉 앞서 말한 것처럼 가시광선이 절대로 투과되지 않는 암흑천지,

그리고 물층의 중량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대기압을 성경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전의 족장들이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이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설명해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고작 성경에 나오는 문자적 표현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짜깁기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 할지라도 결코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시치미 떼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매의 꽁지에 매달린 주인의 이름표를 똑 떼어내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에서 궁창이라는 표현을 읽는다면 구름이 흐드러지게 번져 있는 파란 하늘을 연상할 것이 아니라 밥사발을 뒤집어놓은 듯한 돔 모양의 천정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했던 우주관을 가지고 창세기를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류의 모든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묵상 해보는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가 함께할 것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