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아론의 송아지

2-20.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 균일과 격변

w.j.lee 2024. 4. 18. 13:18

 

20.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 균일과 격변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본회퍼 목사님이 남긴 유명 한 격언이 있다. 

이 격언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공동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교회가 사용하는 공간, 교회의 조직 및 구조는 전부 비본질적인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이 세상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다양한 지체들의 하나 됨을 유난히 강조한 성경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 

한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바울서신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되었느니라(롬 12:4-5).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 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이라(엡 5:30).

 

사도 바울이 강조한 다양한 지체들 간의 조화에 관한 말씀 가운데서 특히 고린도전서 12:21의 표현은 은유적인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눈이 손에게 쓸 데가 없다고 한다든지 "머리가 발더러 쓸 데가 없 다"라고 하는 표현처럼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할 지체들 중 하나가 다른 하 나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코 한 몸으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도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자연의 모습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가고 있다.

현대 지질학에서는 겉보기에는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방법론을 통해 지층의 형성 과정과 장구한 지구의 역사를 도출해낸다.

동일과정론(Unifomitarianism)과 격변론 (Catastrophism)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동일과정론 및 격변론이란 무엇일까? 

동일과정론이란 지질학적 변화가 긴 시간에 걸쳐서 균일한 비율로 일어난다는 이론이다. 

반면 격변론이란 지질학적 사건이 긴 시간에 걸쳐서 균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쉬운 예를 통해서 동일과정과 격변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어떤 젊은이가 좋은 직장에 입사했다.

상여금을 포함해 연봉이 5천만 원이나 되고 복리 후생 제도도 꽤 괜찮은 좋은 직장이다.

비록 공휴일이지만 1 월 1일을 입사 기준일로 삼는다면, 그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까지 이 청년의 급여 통장에 회사로부터 입금된 돈은 얼마일까?

물론 정확하게 5 천만 원의 급여가 통장에 입금되었을 것이다.

 

이런식의 접근이 바로 균일론적인 접근이다.

이 접근은 긴 시간에 걸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빠른 접근과 쉬운 해석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일과정론적인 접근은 지질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과학 분야뿐 아니라 특히 공학 같은 응용 과학에서도 다양하고 복잡한 자연계의 양태를 우회해서 파악하고자 하는 현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긴 시간대에 걸처서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서 통시적인 조망(projection)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이 입사한 바로 그해 여름에 자동차를 구매하려고 한다면 앞서 설명했던 방법으로는 충분치 않다. 

구체적인 현금 유동성(cash flow)을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 청년의 급여 통장에는 연간 총 5천만 원이 입금된다. 

하지만 청년의 급여 통장에는 매 순간순간 일정한 비율로 급여가 입금되는 것은 아니다. 

일 년을 구성하는 31,536,000초마다 1.59 원씩 또박또박 입금되어 일 년에 5천만 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통장 내역을 살펴보면 매월 급여 지급일에 통장 잔고가 격변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상여급을 받는 달에는 격변적인 증가율이 더욱더 커지게 된다.

이렇듯 매월 격변적으로 입금되는 금액과 지출되는 금액을 파악해서 정확한 현금 유동성을 계산해야지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연봉이 자동차 가격보다 높다고 자동차를 구매하는 시점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현금의 흐름과 계좌의 현 황을 고려하지 않고 덜컥 일시불로 계약을 한다면 그는 자칫 잘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이 격변적인 사건(events)을 고려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지질학적 사례를 살펴보자. 

어느 지질학자가 강을 끼고 있는 어떤 지역의 지층을 연구했다. 

그는 몇 년간에 걸쳐 지층의 침식률을 관찰한 결과, 평균적으로 일 년에 1mm씩 침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은 10년 전에는 지층의 표고가 1cm 정도 더 높았을 것이다.

100년 전에는 현재보다 10cm 정도 더 표고가 높았을 것 이고 1,000년 전의 지층의 표고는 당연히 현재보다 1m 더 높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계산해낼 수 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10,000년 전 과거로 돌아가 지층을 살펴본다면 지층의 표고는 현재의 표고보다 10m 가 높았을 것이고

그 10m의 흙과 암석은 10,000년의 세월 동안 침식을 당해 현재의 지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일과정론이 제공하 는 지질학적 해석이다.

 

반면에 격변론은 지질학적 사건들이 동일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해석이다.

앞서 살펴본 동일 과정론과 똑같이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의 예를 들어보자.

일 년에 1mm의 침식이 평균적으로 발생하지만 이러한 침식이 일 년 내내 동일한 비율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건기에는 침식이 거의 일어나지 않다가 우기에 집중적으로 침식이 발생한다.

몇 년 동안은 가물어서 그다지 침식이 발생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떤 해의 우기에는 이전 몇 년간 내리지 않았던 비 까지 모조리 내렸는지 큰 홍수가 발생해서 연 평균보다 많은 토사가 침식 되어 쓸려내려가게 된다.

이것이 격변적인 해석이다.

 

창조과학회에서는 현대 지질학이 동일과정론이라는 패러다임에 매몰 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격변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 들은 동일과정론이 반성경적인(anti-biblical) 무신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과정론의 원천적인 뿌리는 항상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진화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고생물학 같은 경우는 지질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성을 지니고 있고 진화론이 그 기축을 이루는 이론이지만,

근본적으로 암석을 연구하고, 지층을 연구하고, 지구의 화학적 조성과 물리적 성질을 규명하는 지질학의 근원이

생명 현상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진화론이라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실상 18세기에 지질학 태동기를 살았던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노아의 홍수에 따른 단일 대격변을 가지고 화석의 형성을 설명하려 했으나

전혀 맞지를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던일은 과학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이 태동하기 전의 일이었다.

다윈이 진화론의 서막을 알리는 『종의 기원』을 출간한 때는 19세기 중반인 1859년이었다.

 

창조과학회는 동일과정론이 그들의 성경 해석과 다른 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이론이라 간주하고 동일과정론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격변론은 오래된 지구가 아닌 6천 년 수명의 젊은 지구를 지지하는 이론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격변론은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이론이 결코 아니다.

 

과거 19세기에 격변론을 주장했던 프랑스의 G. 퀴비에와 그의 제자 J. L. R. 아가시 같은 지질학자들조차도 지구의 나이를 아주 오래된 것으로 파악했었다.

왜냐하면 지구가 아주 급격한 속도로 산맥을 융기시키고 평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지구의 변화는 순간순간에 걸친 격변을 통해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지질학계의 논문을 살펴보면 동일과정적인 해석이 줄어들고 격변적인 해석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젊은 지구론이 맞다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격변적인 해석이 젊은 지구를 논증하는 것도 아니고,

또 격변적인 해석을 하는 논문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질학적 연구가 지구 지층과 지질에 대해서 통시적인 조망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 굉장히 정밀한 단계에까지 접어들 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동일과정론을 공격하면서 마치 사찰 입구에 떡하니 세워놓은 사천왕처럼 격변론을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는 수호신 취급을 하는 것은 그 준거부터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동일과정과 격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인류가 발딛고 서 있는 지표 및 지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한다.

 

하지만 창조과학회에서 제공하는 해석들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들을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서 왜곡한 것들이다.

바로 이런 점이 현대 지질학계에서 창조과학의 주장을 거부하는 첫째 이유다.

아니, 이는 비단 현대 지질학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학 분야에서 공히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해당할 것이다.

 

화석의 형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창조과학회에서는 화석이 출토 되는 순서가 노아 홍수 때에 생물들이 매몰된 순서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먼저 매몰된 생물은 아래 지층에서, 나중에 매몰된 생물은 위 지층 에서 발굴된다. 

따라서 아래 지층에 매몰될 생물들은 낮은 곳에서 서식하고, 홍수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피할 수 없으며, 죽은 후 사체가 물에 잘 뜨지 않고 가라앉는 종류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생물은 과연 어떤 종류일까?

아마도 조개류일 것이다.

조개류 는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서식하고, 홍수가 나서 토사가 덮칠 때 결코 도망칠 수가 없으며, 또 딱딱한 껍질 때문에 사체가 절대로 물에 뜰 수 없기때문이다. 

노아 홍수의 단일 격변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의 설명대로라면 조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층 중 가장 아래쪽에만 존재해야 한다.

 

조개의 화석은 5억 년 전 까마득한 옛날, 저 아래쪽에 깔려 있는 캄브리아기 지층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창조과학회의 해석이 옳다면 그 위의 지층에서는 조개의 화석이 더 이상 나타나서는 안 된다.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조개의 화석은 그 이후로도 계속 나타나며 최근에 생성된 지층에서도 조개의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조개류가 멸종되지 않고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수한 홍합탕과 시원한 재첩국 등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현대로부터 먼 과거에 생성된 아래 지층일수록 그 속에서 발 견되는 조개의 모습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개의 모습과 전혀 다른 생소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에 생성된 위 지층일수록 그 속에서 발견되는 조개의 화석은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조개의 모습과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다.

 

창조과학회의 해석이 맞는다면 최근에 생성된 위 지층에서 발견되는 조개 화석은 도대체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창조과학의 해석대로라면 위 지층은 홍수가 일어나자마자 생성된 지층이 아니다.

그것은 발이 있어서 높은 곳으로 도망쳐 탁류를 피할 수 있는 동물들이 마지막에 파묻힌, 홍수 시기 후기에 생성된 지층인 것이다.

 

그럼 이런 지층에서 어떻게 조개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일까?

물속을 헤엄치는 조개였을까?

아니면 그 조개들은 자기 몸에 달려 있는 부족을 가지고 마치 육상 선수가 달리듯이 홍수의 격랑을 피해서 높은 곳으로 달음질할 수 있었던 녀석들이었을까?

 

석유 산업은 지구 지각과 지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해 제공되는 지질학 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석유 자체가 화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석을 이용해 지층의 연대를 연구하는 생물 층서학(Biostratigraphy) 이야말로 현대 석유 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생물 층서학의 이론을 바탕으로 석유 탐사와 시추 방법이 얼마나 정교하게 개발되었 는지를 보여주는, 젊은 지구론 입장을 가진 창조과학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00년대 초에 안식교도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acready Price)는

노아 홍수에 의해 전 지구의 모든 지층이 단번에 형성됐다는 홍수지질학(Flood Geology)을 처음으로 제창한다.

그는 정식으로 지질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안식교의 창시자인 앨렌 화이트(Ellen G. White)에게 영향받아

전 지구적인 노아 홍수에 의해 현재 지구상의 모든 지층과 화석이 형성됐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겠다는 열의에 넘쳐 있었다.

프라이스의 추종자이자 그의 학생이었던 해롤드 클락(Harold W. Clark)은 1938년 오클라호마 주와 북부 텍사스에 있는 유전 지대를 자세히 견학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지금껏 홍수 지질학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당시 클락이 받았던 충격을 프라이스에게 서신으로 보냈던 내용을 여기 인용 한다.

 

암석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확고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 습니다. 

「새로운 지질학」(New Geology)에서 제창한 이론들은 실제의 현장 조건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중서부 전역에 걸쳐서 수백 마일을 넘는 거대한 지판 위에 정연한 순서로 암석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수천 개의 유정(油井) 코어(core)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텍사스 동부만 해도 2 만5천 개의 깊은 유정이 있습니다. 

중서부에 있는 10만 개 이상의 유정들은 유기적인 연관 관계가 밝혀진 연구 결과에 따른 데이터들을 제공하고 있습 니다. 

석유 회사의 지질학자들의 고생물학적인 탐사에 의해서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서 유정이 시추되고 있고, 

과학은 정확한 예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층 상의 미생물의 화석이 묻힌 순서는 놀랄만큼 균일합니다...

미국, 유럽 혹은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어디든지 동일한 순서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석유지질학은 우리가 20여 년 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방법으로 지구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위의 편지 글은 지질학이 제공하는 지층과 그 속에 매장된 화석 연료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며, 에 반해 창조과학회에서 제공하는 해석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지질학을 포함한 모든 정상 과학 분야에서 창조과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일화가 나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께 묻는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사실 이 상황은 치밀하게 짜인 아주 교활하고 정교한 덫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한가운데로 끌려온 여인은 어떤 상태였을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마치 개가 끌려오듯이 질질 끌려온 여인은

이곳저곳 살이 긁히고 또 찢겨서 피를 흘리고 있었을 테고

머리는 풀어졌고 얼굴은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눈물범벅이었을 것이며,

아마 돌에 맞아 죽을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의 공포로 인해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저 여인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과 똑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저 여인처럼 매섭게 정죄당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건만 예수님의 은혜와 구속으로 인해서 정죄함을 벗어날 수 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곤 한다.

 

여인의 가련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간음하다 붙 잡혀온 여인이니 돌로 사정없이 치면 된다." 

그들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기등등해 있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곤경에 빠진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동정심이란게 있기 마련이다.

아마 이 사태의 주모자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빼고는

예수의 주변에 모인 대다수 사람이 그 여인에 대해 일말의 연민과 동정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까? 

아마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실망하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또 만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부에 고소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사법적인 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로마 정부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에 반해 만일 예수께서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비난과 함께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수겸장의 진퇴양난 상황에서 예수가 하셨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을 버리고 하나둘씩 떠나갔다.

 

기독교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기독교를 비난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요한복음 87을 가지고 예수를 비난하고 기독교도 공격한다.

 

예수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다.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하고 불쌍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다.

보라! 요한복음 8장에 "돌로 치라"고 분명히 써있다.

 

자, 과연 그가 이렇게 주장하고 돌아다닌다면 그 주장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예수가 하신 말씀 중에서 "너희 중에 죄없 는 자가 먼저"는 싹둑 잘라낸 다음 "돌로 치라"는 부분만 쏙 뽑아내어 예수를 가리켜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유의 행위가 창조과학회 내부에 만연하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을 설파하는 책 가운데 「노아 홍수 콘서트』」라는 책이 있다.

한번은 내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 책에 등장하는 참고 자료들을 조사해본 적이 있다.

과학 정론지와 유명한 과학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참고 자료들을 조사했다. 

참고 자료의 원래 출전을 살펴보니 예상했던 대로 전부 다 원저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왜곡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일례로 『노아 홍수 콘서트』 277쪽과 278쪽에는 데이비드 라우프 (David Raup) 교수의 글을 인용해서 방사성 연대 측정을 공격하고 있다. 『노아 홍수 콘서트』에 적힌 표현을 다음과 같이 직접 인용한다.

 

시카고 대학교의 고생물학자인 라우프는 일관성 없는 방사성 동위 원소 연대측정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질학적 연대 측정에서 방사성 동위 원소의 사용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 방법은 부정확하고 많은 근본적 오차를 내포한다....한 암석에 대한 일련의 측정 연대들이 아주 다른 결과를 보여 준다."

 

『노아 홍수 콘서트』에서 언급되었듯이 데이비드 라우프 교수는 시카고 대학교의 저명한 고생물학자였고 2015년에 타계했다. 

그런 학자가 방사성 연대 측정법을 거부한다?

도무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원서를 찾아보니 저명한 과학자들의 글을 모아 1983년도에 출판한 Scientists Confront Creationism이라는 제목의 책에 문제의 글이 수록되어 있었다.

우리 말로 책 제목을 번역한다면 과학자들, 창조과학에 직면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노아 홍수 콘서트』에 나오는 참고 자료 소개에는 이 책 제목은 없었고 라우프 교수가 썼던 장의 제목인 "창조과학에 대한 지질학적·고생물학적 논증"(The Geological and Paleontological Arguments of Creationism)만 소개되어 있었다.

노아 홍수 콘서트』의 저자는 자신이 인용한 참고 도서조차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그 책의 저자가 실제로 책을 읽었다면 책 이름조차 소개를 안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마도 미국창조과학 단체인 ICR나 AIG에서 돌아다니는 자료를 가져다가 편집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무튼 라우프 교수의 원글은 다음과 같다.

 

지질학적 연대 측정에서 방사성 동위 원소의 사용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 방법은 부정확하고 많은 근본적 오차를 내포한다.

한 암석에 대한 일련의 측정 연대들이 아주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

왜냐하면 누출이나 오염, 혹은 다른 동위 원소가 다른 사건들을 측정하려는 암석에 기록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위 원소 연대 측정법 중에 탄소 연대 측정법의 신뢰도가 가장 낮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최근의 지질학적 역사를 알려 줄 수 있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난제에도 불구하고 방사성 동위 원소 측정법은 통계적으로 잘 작동한다.

암석의 연대를 정확히 측정한 사례들은 넘쳐난다.

 

굵은 글씨로 표현한 문장은 쏙 뺀 상태에서 글의 극히 일부만 인용해 사람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는 것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는 빼버리고 "돌로 치라"만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과 뭐가 다를 까?

둘 다 기만적 행위임이 분명하다.

 

ICR 같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온 문헌을 인용하면 됐지,

굳이 왜 세계적인 석학의 문헌을 왜곡하여 인용해서 제 손으로 문제를 만드는 걸까?

창조과학회 측은 툭하면 세계적인 석학들마저 진화론적 패러다임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먼 사람들이라고 교회 내에서는 그토록 공격하면서도,

비록 악의적인 왜곡이자 속임수이긴 하지만 이런 대가들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한 것일까?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들의 본심 을 알 수가 없다.

 

"단편적인 한 가지 사례를 가지고 창조과학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고 질책하실 창조과학 추종자들께 한 말씀 더 드리겠다. 

창조과학 지지자들은 권위 있는 과학자의 저서나 유명 과학 저널에서 인용된 노아 홍수 콘 서트』의 참고 자료들이 모두 이런 식의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만일 이 모든 사례를 모아서 편집한다면 별도의 도서 한 권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이처럼 기만으로 가득한 책이 학문적인 가치가 있을까, 아니면 신앙적으로 가치가 있을까?

 

한국창조과학회 웹사이트에도 온통 이러한 사례들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타임즈」(Times)가 강력하게 비판한 진화론의 문제점들"이라는 검색어로 인터넷 창을 치면 한국창조과학회가 게시한 원글 및 창조과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원글을 퍼나른 개인블로그가 나 타난다.

글의 저자는 1993년 10월 11일 자, 1994년 3월 14일 자, 그리고 1995년 12월 4일 자, 세 번에 걸쳐 「타임즈」가 진화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 1994년 3월 14일자 「타임즈」 기사를 조사해보았다. 

「타임즈」는 "어떻게 인류는 기원했는가"(How man began)라는 제목으로 80쪽에서 87쪽에 걸쳐 총 8쪽을 할애한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나는 이 기사를 자세히 정독해보았지만 거기에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기사는 인류 진화사와 관련한 연구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및 향후 연구 방향 등을 소개했다.

 

하지만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타임즈'가 강력하게 비판한 진화론의 문제점들"이란 제목의 포스팅에는 "그 기사 중 가장 중심 부분인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면서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내용만 중점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타임즈」에 게재된 원 기사에서는 총 8쪽 중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부분은 2쪽도 채 되지 않는다.

문제의 글이 타임즈 기사의 가장 핵심 부분이 아닌데도 중심 부분이라고 우기는 것도 문제지만,

창조과학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은 거의 대부분이 「타임즈」에 전혀 나오지도 않은 진화론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들로만 채 워져 있다.

그리고 「타임즈」의 결론을 이렇게 번역해놓았다.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뒤이어 「타임즈」의 결론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서 술하면서 글을 맺는다.

 

이러한 결론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생업에도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과학이 아닌 상상 따위로 알려지면 더 이상 연구비, 교수 승진 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에도 그 이후 타임즈 독자란에 아무런 항의도 없는 것을 보면

이러한 모욕적인 기사에 대해 별달리 항의할 근거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여기에 타임즈 기사의 원글을 소개한다.

 

다음 번 발굴되는 화석은 아마 인류의 진화 계통도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가지를 끄집어내어 우리를 미궁 속에 빠뜨릴 수도 있고,

혹은 인류 진화의 다른 중간 경로를 차지하는 새로운 조상을 제시할 수도 있다.

데이터는 빈약하지만 상상력이 충만한 이 매혹이 넘쳐나는 분야에 대한 단 한가지 확실한 점은,

앞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놀라운 경이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나는 위의 문단을 어떻게 하면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기사의 논지를 엉터리로 왜곡, 번역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

그리고 "이러한 모욕적인 기사에 대해 별달리 항의할 근거도 없는 것 같다"라고 결론을 맺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니, 신앙 이전에 기본적인 양식이 있다면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 일이 아마도 ICR이나 AIG 같은 미국창조과학 단체의 자료를 「타임즈」의 원문과 대조해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옮겨다 웹사이트에 게재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싶다. 

물론 이렇게 좋게 생각한다고 해서 이 글을 쓴 사람의 잘못이 면피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글의 출처가 되는 문헌조차도 확인하지 않은 잘못, 그리고 그 일로 야기된 무수한 오해와 왜곡들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의 저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냈던 어느 생물학자에게 "자신은 이 분야에 대해서 갑론을박할 전문성이 없으므로 틀렸으면 무시하라"는 상상을 초월한 답신 메일이 돌아왔던 일화를 고려한다면,

그는 애당초 「타임즈」 원문을 확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현대 과학은 틀린 것이고

또한 반드시 틀려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창조과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 차제를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 맞춰 주관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런 유의 과학 활동을 우리는 "유사 과학"(pseudoscience)이라고 부른다.

"유사"라는 말은 진품이 아닌 가짜이며 짝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유사 과학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사이비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퇴행적 사이비 과학 활동이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교회를 통해서 계속 전파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는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도 거부하는 반이성적 집단으로 낙인찍혀

이 땅에서 더 이상 일말의 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나만의 기우 가 아닐 것이다.

 

창조과학회는 현대 지질학이 진화론적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격변적인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구의 역사를 동일과정론으로만 파악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을 왜곡한 주장이다.

동일과정은 결코 반격변(anti-catastrophy)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의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동일과정과 격변은

다같이 인류가 지구의 역사를 파악 하는 데 꼭 필요한 중요한 방법론이라는 것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 들이 깨닫는다면,

 

젊은 지구론에 기반한 창조과학회의 왜곡된 주장을 넘어서 지질학을 비롯한 현대 과학 전반이 함의하는 성과에 대한

이해의 폭을 심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