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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아론의 송아지를 해체하며

w.j.lee 2024. 4. 18. 13:13

 

 

에필로그 : 아론의 송아지를 해체하며

 

혹시 독자들은 평판지구학회(Flat Earth Society)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평판지구학회는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대로 지구가 솥뚜껑처럼 편평 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다.

이 단체는 편평하게 생긴 지구의 솥뚜껑 꼭지점에 해당하는 중심에 북극이 있고 그 북극을 중심으로 오대양 육대주가 방사상(放射狀)형태로 부채살처럼 펼쳐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2014년 7월 기준으로 회원 수가 약 500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던 식의 지구의 생김새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21 세기에도 500명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해되는가?

이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현대 과학의 증거들을 아무리 많이 보여주어도 전혀 받아들이질 않는다.

오히려 그 증거가 분명히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틀릴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성경에 분명히 지구가 편평하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성경의 표현과는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현대 과학이 명백하게 틀렸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달한다면 틀림없이 지구가 편평하다는 증거를 찾아낼 것이며,

그때가 되면 사람 들이 지금 현대 과학이 주장하는 지구가 둥글다는 설명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평판지구학회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끼시거나 혹은 조소를 보낼지 모르는 창조과학, 특히 젊은 지구 지지자들에게 한 말씀 올리겠다.

"평판지구학회의 주장이나 젊은 지구를 추종하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똑같이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하는 근본주의적 신념에 경도된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다."

만약 평판지구학회 회원 중 어떤 사람이 지구가 둥글지 않고 편평하다는 주장을 지질학회나 천문학회에 안건으로 제출한다면 학회가 그 주장을 진지하게 상대해줄까?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애당초 학회 안건으로 올라올 수조차 없을 것이다.

지구가 편평한가, 아니면 둥그스름한 구형인가는 이미 수 세기 전에 밝혀진 과학적 사실이므로 더 이상 과학계의 논쟁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이라는 것도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80년 가까이 혹독 한 검증 과정을 거쳐 확증된 과학적 사실이다.

만약에 우주의 나이와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과학계 내에서 열띤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그 생각을 버릴 것을 권하는 바다.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에 불과한가, 아니면 아주 오래되었느냐를 논하는 것은 마치 지구가 편평한가 둥그런 공 모양인가를 논하는 것과 똑같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 펼쳐진 생명 현상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히 심정적인 거부감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진화론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로 지금까지 150 여 년간 이런 심정적인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 과학자 집단의 혹독한 검증을 거쳐 증명된 과학 이론이다. 

물론 어떻게 최초의 생명이 지구 상에 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과 관련해 모든 퍼즐 조각이 다 맞춰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최초의 생명체에서 현재 지구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생명군들이 나오게 됐다는 설명은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더욱 소상한 부분까지 계속 검증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적으로 이미 확고히 결론이 난 사안에 대해서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에 집착해 가타부타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교부 시 대의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성경 해석의 전통은 문자적인 표현에 일방적으로 천착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전통은 상징이나 비유 같은 문학적인 요소, 역사적 정황이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 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해왔다.

 

창조과학 유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은 얼핏 보기엔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성경의 절대성이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정량적 사실성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성경의 권위를 인간의 이성을 통해 전개되는 과학적 활동에 종속시키는 일이다.

물속에 담겨 있는 물체를 물 밖에서 바라보면 굴절에 의해 왜곡되어 나타난다.

 

40 여 명의 다양한 저자들이 1,6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각자의 삶의 정황과 시간대를 통해서 만났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그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 성경이다.

우리가 이 성경을 현대라는 단편적인 시간 단면과 그 위에 덧대어진 현대 과학이라는 굴곡진 렌즈에 투과된 일그러 진상으로 바라본다면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료를 고증하고, 역사적 정황이나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며, 성경 사본과 관련한 고문헌을 분석하고, 상징이나 비유 등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경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제한된 인간의 언어와 문자는 하나님의 장엄한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 낼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런 행위 안에 담겨 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받아서 기록한 인간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것은 마치 당신이 고급 만년필로 쓴 글은 알아보고 몽당연필로 쓴 글은 알아볼 수 없다는 것과 똑같지 않소?"

이렇게 나에게 조소를 보낼 창조과학 추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하겠다.

 

진짜 문제는 만년필과 몽당연필 같은 필기도구가 아니다.

그 필구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람"이 문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저자들을 그분이 부르시는 대로 일방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 적기만 하는 필기도구 취급을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성경 저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자신들을 만나주시고, 또 자신들과 동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기록했다.

인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는 필기도구나 타자기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교회는 종말에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동시에 지금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시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막중한 책임 중 하나가 바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는 현대 과학을 어떻게 올바로 사용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창조과학 유와 같은 퇴행적 활동을 끊어내고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정립해야 한다.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과학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통해서 제공되는 혜택과 편익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진화론이야말로 무신론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이론이라고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독자들은 2002년도에 중국에서 최초의 발병 환자가 발생했고 2003년도에는 중국을 넘어 동남아 국가들과 미국 및 캐나다까지 전파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사스(SARS;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를 기억할 것이다.

2003년 3월, 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 된 환자의 조직을 처음 건네받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샌디에이고 캠퍼스 연구팀은 가장 먼저 DNA 미세 배열(DNA Microarray) 기법을 통해서 이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의 진화적 계통을 연구했다.

사스가 기존의 바이러스와 어떤 진화적인 분기점을 통과해 다른 계통으로 진화되어왔는 가에 대한 연구가 이 바이러스의 격퇴를 위한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진화를 짧은 말로 정의하면 변이를 동반한 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변이를 통해 세대를 거치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한다.

이러한 생태계의 유전적 다양성의 증가 때문에 인류가 가장 곤혹스러움을 겪는 분야는 단연코 병리학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항원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진화적 메커니즘에 대응해서 항체를 개발하는 일은 앞으로 인류의 생존과 직결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 병원균에 대한 진화적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미래의 병리학 연구와 제약 산업의 핵심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미래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진화론을

"사탄의 이론", "무신론 적인 신념"으로 치부하는 오해의 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과학 문명의 이기를 바탕으로 운행되는 이 시대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소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현대 과학이 함의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는 소양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가 어떠한 영성과 소명감을 가지고 과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며,

현대 과학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몇 가지 나누고 싶다.

 

첫째는 "생태학적인 영성"을 갖추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뉴턴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 혁명 이후 자연을 기계로 인식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나타났다.

기계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고 인간은 자연을 부와 재화를 획득하는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 교회는 생태학적 영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여길뿐더러,

자연과 상생하는 일에 현대 과학이 사용될 수 있도록 청지기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나는 극단적인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한 창조과학회 웹사이트에서 "식물은 생물이 아니다"라는 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는 레위기 17장의 말씀에 근거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피가 없는 식물은 생물이 아니며, 단지 우리의 먹거리에 불과한 녹색 것들(green things)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식물은 생명이 없고 단지 인간의 먹거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단언컨대 18세기의 뉴턴 학설 신봉자(Newtonian) 시대 이후로 형성된

그 어떤 기계적인 세계관보다도 더 극단적이고 왜곡된 자연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피에 있다는 생각은 고대의 히브리적 사고방식이다.

레위기에서 피에 생명이 있고, 또 동물을 잡아서 먹거리로 취할 때는 피를 빼고 흙으 로 덮으라고 기록한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쳐주기 위함 이지,

결코 생물 분류학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 집착하면 그릇된 세계관에 빠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자연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자연과의 공존과 상생의 선순환을 만들어나가는 데 현대 과학을 사용할 줄 아는 영성을 갖춰야 할 것이다.

 

둘째는 사회 윤리적인 영성이다. 

과학의 진보는 인류에게 새로운 윤리적 과제와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의 양상은 윤리적인 판단을 선뜻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복잡하고 미묘해지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벽돌을 쌓을 때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벽돌을 쌓을 때는 항상 다음 그림과 같이 이음새를 지그재그로 배치한다.

 

결코 이음새를 나란히 맞춰가며 벽돌을 쌓는 법은 없다. 

만일 이음새를 나란히 맞춰서 벽돌을 쌓는다면 다음과 같은 모습의 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벽돌을 쌓는다면 구조물의 취약 부위가 일치한다. 

그렇게 되면 마치 동그랗게 파인 절취 구멍을 따라서 우표를 한 장 한 장 찢어 내듯이 벽돌의 이음새를 따라서 구조물의 파괴가 손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렇듯 이음새를 나란히 배열한 구조물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의 강도가 이음새를 얼기설기 배치한 구조물에 사용된 벽돌보다 훨씬 강하다고 할 지라도 구조적으로는 훨씬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서술하는 사례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보자.

2005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따라 인간 세포에 있는 30억 쌍의 염기 서열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 30억 쌍의 염기 서열의 유전적 메커니 즘이 완벽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가까운 미래에 30억 쌍의 인간 염기 하나하나가 어떤 형질을 발현시키는지, 인류의 모든 유전적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규명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가까운 미래에 세계에서 벌어질 일이다. 

아기를 임신한 젊은 부부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

태어날 아기의 유전자를 전부 검사한 산부인과 의사는 젊은 부부에게 다음과 같이 소견을 말해준다.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아드님을 얻으시게 되셨군요."

젊은 부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계속되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그 미소는 사라지고 만다.

의사는 A, G, T, C의 네 가지 알파벳 대문자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유전자 염기 서열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대체적으로 아주 건강한 아기지만, 이 부분은 유전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드님이 성장해서 장년이 되었을 때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성인병이 발병할 확률이 0.1% 정도 됩니다.

아주 낮은 수치이니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우리 병원이 보유하고 있는 맞춤 유전자로 치환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태어나는 아기는 장년이 되어서도 성인병에 대한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지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출생을 앞둔 아기의 부모들은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아기의 건강을 위해 "유전자 치환술을 통해서 아기에게 맞춤 유전자를 끼워넣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우리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모두가 흡사한 유전자를 갖게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더 건강하고 우수한 형질을 지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획일화된 유전적 형질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앞서 언급한 "사스"는 기존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종으로 진화 하여 일으킨 질병이다. 

만약에 미래 세상에서 건강하고 명석한 아이들을 얻기 위해서 치환된 유전자를 공격하는 변종 병원균이 발생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인류가 유전적인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병원균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치환 기술 등에 의해 모두가 획일화된 유전자를 가진다면 인류는 자칫 멸망 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마치 벽돌이 한장한장의 강도는 강할지라도 이음새가 나란한 구조물로 축조되면 그 내구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노정하듯이,

비록 개개인으로서의 인류는 우수한 형질을 지닐지 몰라도, 개개인이 모인 개체군으로서의 인류는 공멸할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어떤 조언을 해야 할까?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이러한 유전자 치환술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인류의 공익에는 잠재적인 해로 작용할 수 있다.

유전학과 관련된 의료윤리 이외에도 과학 기술력의 독점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 문제,

나아가 첨단 과학을 인명살상 무기 개발에 사용하는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현대의 첨단 과학이 야기하는 사회 윤리적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식견과 영성을 가져야 한다.

앞서 지적했던 생태학적 영성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사회 윤리적 영성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종말론적인 영성이다.

창조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성이자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종말이다. 

종말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이다. 

종말을 성취하시는 분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종말을 실현해나갈 동역자로 우리들을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종말을 지 향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여전히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을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 라는 공간적인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공간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권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창조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샬롬을 누리는,

즉 이사야서 11장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종말론적인 통치를 이 땅에 널리 전파 할 수 있도록

현대 과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종말론적인 영성의 개발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지체들에게 시급히 요청 된다.

 

지금까지 제시했던 생태학적 영성, 사회 윤리적 영성, 종말론적 영성은 다분히 층위적 개념이다. 

생태학적 영성은 사회 윤리적 영성에 포함될 수 가 있고 사회 윤리적 영성은 결국 종말론적 영성으로 심화되어야만 한다. 

현대 과학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영성은 현재 대다수 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창조과학이라는 유사과학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 집착 하는 것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경험 속에 가두는 행위다.

 

이러한 예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출애굽 당시에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이자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을 만들라고 아론을 닥달한다.

아론은 금을 부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형상 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 다"하며 그 송아지 우상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어놀았다.

 

아론이 다른 형상 대신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이유는 그것이 애굽에서 접했던 익숙한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송아지는 애굽의 프타(Ptah) 신의 형상이다.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공백으로 인한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익숙한 대상을 형상화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려 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있는 무수한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시도는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시키는 행위로 귀결되었다.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과 출애굽 당시 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을 병치해서 비교해본다면

"어찌 저리도 똑같은 양태를 보 일수 있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송아지 형상 속에 가두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젊은 지구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창조과학도 인류의 모든 역사와 언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된 문자의 틀 속에 집어넣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대착오적인 문자적 해석의 정당성을 과학적 사실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문자의 틀속에 가둔 하나님의 계시를 더더욱 형해화(形骸化)시키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과학 혁명 이후 급속히 발달한 현대 과학은 현 시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체다.

과학과 맞서거나 혹은 과학을 둥지거나 외면하고서 교회가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서 문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대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된 인간의 문자 속에 가두는 문자주의적 해석의 오류가 시정되어 야 한다.

 

이 시대의 교회는 과거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금송아지를 불살라버렸듯이,

문자주의라는 금고리를 과학적 사실성이라는 용광로에 던져 만든 새로운 아론의 송아지를 해체해야 한다.

 

교회 안에 만연한 아론의 송아지의 현대적인 변형체가 해체될 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들이 인류 전체의 역사와 언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제대로 만날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에 기여할 수 있는 생태학적·사회윤리적·종말론적 영성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아론의 송아지(저자 임택규, 출판 새물결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