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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 03. 인공지능시대에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w.j.lee 2024. 5. 31. 10:04

제4부 인공지능과 한국교회

 

03. 인공지능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인공지능과 창조신앙

 

인공지능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견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의 창조 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보다 우월한 인공지능의 출현이 창조 신앙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떤 도전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이 인공지능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인간성의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전과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창조신앙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 2장을 읽을 때 우리가 문자주의적 해석에 집착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과학과 상충되는 매우 곤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교회를 착실하게 다니던 많은 중고등부 학생들이 성장단계에 따라 사고력이 발달하면서 점차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서 말씀에 회의를 느끼고 마침내 교회를 떠나도록 만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문자주의적 해석은 성서 구절의 지엽적인 표현에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과학과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안 바버의 지적은 타당하다.

창세기에 기록된 천지창조 이야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악한 마성을 지닌 영적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하고 질서정연하며, 일관되고, 지성으로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둘째, 자연세계는 그 스스로 완전하거나 자족적으로 존재해온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유로우며 초월적인 분이고, 당신의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세계의 특성에 관한 신학적 해석은 창세기의 말씀이 과학을 모르던 시대의 낡은 기록이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세계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해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론적 해석을 통해 성서의 말씀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으로써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창조 신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및 그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한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신앙이 생명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과학이론인 진화론과 반드시 적대적이거나 상충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또한 창조 신앙은 구약성서가 기록된 오래 전 과거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 및 생태계 파괴와 같은 자연세계의 의미성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

일찍이 신학자 린 화이트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구절이 곧 서양의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를 낳았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류문명의 지속적 발전을 위협하는 생태위기의 뿌리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 영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늑대와춤을>이란 제목의 영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들이 정착지를 확대하던 시절에 아메리카 토착민(인디언)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백인들과 토착민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 그려진다.

토착민들은 버팔로 사냥에 앞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의 허락을 받아 꼭 필요한 숫자의 버팔로를 사냥하여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과 달리, 백인들은 버팔로를 마구 죽이고 가죽만 벗겨 가져간다.

가죽이 벗겨진 채 넓은 벌판에 널려진 수많은 버팔로의 사체들을 보여주는 끔찍스런 장면은, 하나님을 믿는 백인들이 자연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침묵 가운데 고발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열대우림의 파괴, 희귀 동식물의 남획, 대기오염과 미세먼지 방출, 과도한 비료와 농약사용으로 인한 토양 및 수자원 오염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행위들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오늘날 창세기의 말씀, 즉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도전이 되는 것은 진화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동산과 거기에 사는 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다.

 

창조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이 기록한 히브리 성서에 창조 이야기가 기록될 당시의 종교문화적·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담긴 문학적 형식과 소재가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지배적이었던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계와 인간이 하늘에서 벌어진 신들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기록한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와 달리 구약성서의 창세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한 본성과 의지로 세계와 인간을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창조신앙의 핵심은 이 세계가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고 질서정연한 장소이며, 결코 물리적 세계가 스스로 신성이나 마성(魔性)을 지닌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인류의 고대종교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뿌리 깊은 자연숭배나 동물숭배로 인한 인신희생 제사 등과 같은 인간을 억압해온 악습과의 단절 내지는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히브리 성서에 기록된 창조신앙의 본뜻은 한 마디로 자연 세계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출현은 신학적 인간학,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창조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말씀으로 지어 내시고 그 전능한 창조사역의 최종적인 작품으로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신학적 인간학은 "신 앞에 선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칼뱅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설파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두 가지 지식이 합해져야 완전한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때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의존성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땅'이라는 단어'아다마'adamah 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사람이 곧 흙에서 왔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처럼 성서가 묘사하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이 독립적 혹은 완성적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에 대한 의존성이 곧 인간의 가장 근본적 인 본성임을 지시하고 있다.
인간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다른 피조물들과 동질하게 '죽음의 운명'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피조물이 지닌 필멸의 운명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표출하였다. 창조 이 후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인데, 이는 바로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 3:4-6).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흔히 "뱀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처벌로 인간에게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 주어지고, 죽음의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고 해석된다. 

이야기 전개상으로는 그렇게 읽히지만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담긴 속 뜻은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노동과 출산의 고통 그리고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에덴동산 이야기는 인생에 필연적으로 깃든 고통과 죽음에 대해 깊이 영탄하는 절규의 목소리다.

 

그런데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유전자 공학 및 나노 공학과 결합하여 기능뿐 아니라 소재까지도 인간과 유사한 생체조직에 기반한 컴퓨터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에게 기계로 만든 인공팔이나 다리를 연결하고 오직 뇌의 명령, 즉 생각만으로 작동하게 하는 사이보그 기술은 성공적으로 개발 되어 수년 내에 보급될 단계에 이르렀다.

 

미래에 인간의 지능과 구분할 수 없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생체 로봇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 것을 더 이상 기계, 컴퓨터, 혹은 로봇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이보그 기술로 신체를 강화하고 컴퓨터 칩을 뇌에 넣어 뉴런과 인터넷을 연결한다면 본질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종류의 인류가 출현 하는데, 하나는 현재와 같이 탄소를 몸으로 삼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를 몸으로 삼는 인간이다.

전자는 사람의 몸을 유지하면서 유전자공학과 나노기술을 이용해 신체를 재생하고 인지 기능은 컴퓨터와 연결하여 증강시키는 반면, 후자는 기계를 몸으로 삼되 인간의 뇌를 전사하여 인지적으로는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과 기계의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사람은 컴퓨터와 연결되고, 인공지능은 전자·광자적 기반 위에서 필요에 따라 몸을 구성하거나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이 단계에 앞서 '나노디지털 노마드족'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호모 사피언스를 초월하는 '트랜스휴먼'이 출현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도미니크 바뱅은 "디지털 노마드족을 뛰어넘어 생명과학과 첨단과학의 파워를 이용해 영생에 도전하는 신인류, 즉 초월형 인간을 뜻하는 트랜스휴먼이 등장한다"고 예상한다.

미래학자와 첨단과학 분야의 전문가들도 과연 가까운 미래에 기술의 특이점 및 트랜스휴먼이 실현될지, 아니면 이것이 단지 공상과학에 불과한 이야기인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미래학자들은 마침내 호모 사피언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인간을 뜻하는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성질과 능력을 개선하려는 지적·문화적 운동이다.

이것은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한계를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인간의 한계들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트랜스휴머니즘 사상가들은 인류가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 자신들을 변형 시킬 것이라고 예언한다. 현재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전망은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에서는 "인류의 대담하고 용감하고 기발한 이상적 열망이 담긴 운동"이라고 환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도"라고 반박한다.

 

만일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꿈꿔왔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의 운명을 지닌 의존적 존재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트랜스휴먼의 출현은 곧 현생인류의 종말이기도 하다.

한편 트랜스휴먼에 관한 전망은 신학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요청한다.

즉 의존성을 벗어버린 신인류의 출현을 경축해야 할지, 아니면 인류의 종말이라고 슬퍼해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죽음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6년 1월 한국에서도 존엄사를 허용하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존엄사 법의 상정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70대 이상 노인의 90퍼 센트 이상이 이 법의 취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복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노인의 상태와 달리 트랜스휴먼은 이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전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무한정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섭리 안에서 피조물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인간이 지닌 의존성, 즉 죽음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런데 창조주에 대하여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마침내 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창조해내었다.

인간이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출현시킨 것이다.

물론 거시적으로 보면 인공지능을 개발한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공 지능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강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인간의 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인간학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즉 인간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서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지만, 인공지능은 기계이기 때문에 죽음을 넘어선 존재다.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의존성을 탈피할 수 있는 독립가능한 존재를 창조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을 창조한 인간이 어쩌면 자신의 피조물인 인공지능에게 의존해야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도 래한 것이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