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4부 : 02. 인공지능의 약속과 위험성

w.j.lee 2024. 5. 31. 10:04

제4부 인공지능과 한국교회

 

02. 인공지능의 약속과 위험성

 

인공지능의 약속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보다 편리한 삶을 약속하고 있다.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인공지능이 지닌 순기능적 가능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려 있다. 

인공지능은 사람에게 여가시간을 늘려주고 삶의 질을 높여줄 뿐 아니라 현대인의 보편적인 고통인 외로움까지도 달래주는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인간을 위해 활용 가능한 인공지능의 영역과 잠재력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 이 더 자유로워지고 자아실현을 확장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 (중략)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중략)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노동의 고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작은 평수의 땅이라도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출을 얻고자 하는 채소나 곡식은 더디 자라는 데 반해 농부가 원치 않는 잡초는 순식간에 번성하여 논과 밭을 뒤덮는다.

오늘날처럼 농약에 의존하기 전까지 우리 선조들은 땅에 코를 박고 잡초들과 씨름하며 여름 내내 땀을 흘려야 겨우 먹거리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인간은 더 편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세계를 변화시켜왔으며, 가축과 기계의 힘을 빌려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왔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인공지능의 활용도를 고려하면 인공지능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임을 깨달을 수 있다.

가축이나 기계가 힘의 세기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그 힘을 컨트롤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언어를 사용해 소통이 필요한 분야나 섬세한 지적 판단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기계가 지닌 힘은 무 용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뛰어난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류가 과거에 사용해온 가축이나 기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범위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동의 범용성이 극도로 확대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창세기에 묘사된 인간의 원죄에 대한 처벌인 노동의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은 고령화 시대에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대다수의 가족 구성이 핵가족인 데다가 맞벌이여서 노인이나 환자를 돌볼 여력이 없다. 

이 문제를 산업화 시대의 기계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환자 도우미로 제작된 인공지능 로봇은 노인이나 치매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무런 불평 없이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사람 대신 인공지능으로 교체될 분야는 전화 상담원이라고 한다. 

현재 영국의 몇몇 회사들은 값싼 인건비를 찾아, 영국 내에서 발생하는 전화상담 서비스를 멀리 인도에다가 부스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이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소비자는 자신과 대화하는 상담원이 멀리 인도에서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회사의 경영자들은 거리상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불편함 때문에 인공지능 상담원이 상용화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현재 IBM의 왓슨을 비롯하여 자연언어처리 기능은 빠른 시일 안에 상용화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애플과 삼성 등이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인공지능 스마트폰은 음성인식을 기반으로 비서 역할을 수행해줄 것이다. 

예를 들어 스마 트폰에다 대고 "이번 주말 우리 가족이 제주도 여행할 수 있도록 적당한 호텔을 찾아줘"라고 말만 하면 인공지능이 스스로 검색하고 예약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일이 검색을 하고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에게 엄청나게 똑똑한 비서가 하나씩 생기는 셈이다.

 

벌써 오래 전 IBM이 만든 인공지능 왓슨은 미국 퀴즈 대회에서 인간을 제치고 우승했다.

왓슨이나 알파고 처럼 똑똑한 인공지능이 곧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한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인공지능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하다.

사물인터넷 기술과 결합하여 인공지능은 집과 회사의 모든 가전제품과 연동되며 우리가 어디 에서든지 음성으로 조작이 가능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외출했다 돌아오 면서 "내일 아침에는 8시까지 대문 앞에 대기해"라고 말하면, 자동차는 다음 날 아침 지시한 그대로 집 앞에 와서 기다릴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굳이 개인이 자동차를 소유할 필요가 현저히 줄어든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율주행시스템이 완전히 상용화되면 현재 자동차 소유자의 단 20퍼센트만이 자동차를 소유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오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TV 화면에 올려봐"라고 말하면 모두 그대로 될 것이다.

“내일 오전 회의 에 내놓을 좋은 아이디어 좀 뽑아봐"라고 말하면 스마트한 비서는 어김없이 멋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해줄 것이다.

 

인공지능은 보다 더 심오한 분야까지도 활용될 수 있는데, 미국의 한 부유한 재산가는 언젠가 맞이할지도 모르는 배우자의 사별 대비하여 자신의 배우자의 말투와 외모를 닮은 인공지능을 제작하 였다.

실리콘으로 제작된 외모와 함께 배우자의 독특한 성격과 말투를 재현할 수 있는 그녀(?)는 식탁에 마주앉아 말상대가 되어준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배우자의 이름인 '바니'라고 답하는 인공 지능 아내가 과연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이러한 인공지능 로봇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분야 보다 더 빨리 상업화가 될 분야는 섹스로봇일 것이다.

인터넷의 빠른 보급의 배후에 포르노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상당부분 작용했듯이,

'혼술'과 '혼밥'이 대세인 요즘 홀로 사는 인간들의 외로움을 달래줄 파트너로 인공지능 로봇이 조만간 인터넷 쇼핑을 통해 불티나게 팔릴 날이 올지 모른다.

이쯤 되면 인간은 창조주가 부과한 노동의 질고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성에 기초 해 제한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욕망을 동시에 추구하는 상태를 원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노동의 고통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한계와 절망에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의 위험성


인공지능은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다.

본래 '마지막 발명품' 이란 말은 앞에서 소개했듯이 다가오는 2045년경이면 '초인공지능'으로 발전할 인공지능에 의해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한 제임스 배럿의 책 제목이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아니면 지나친 기우일지 현재로 선 판단할 수 없지만, 많은 미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이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에 동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 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6-28).


구약성서의 창세기 구절들은 그 문학양식에 있어서는 바빌로니아의 창조설화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본성에 관련하여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창조설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창조신화는 "하늘에서 벌어진 신들의 전쟁으로 인해 죽은 신들의 몸으로 이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묘사한다.

이와 달리 성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그가 창조한 피조세계는 보기에 참 좋은 아름다운 곳이고,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 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 재라고 선포한 히브리 성서의 구절은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제국의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소수의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들이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었다.

또한 고대 자연종교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위치는 위계질서의 맨 밑바 닥에 자리하며 신과 자연을 섬기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모든 인간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위를 혁명적으로 바꾼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생명이 존엄하지만 특히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고차원적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해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라는 히브리 성서의 고백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비참한 처지에 놓였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고백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들은 신과 황제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와 인간다운 권리를 확대했듯이, 

인공지능이 오늘날 인간을 여러 가지 고통과 재난으로 부터 해방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공지능은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신세계를 약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초지능의 출현으로 인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멸종을 불러올 수 있다.

제임스 배럿이 표현한 "인공지능, 인류가 만들어낸 마지막 발명품"이 라는 문구는, 인공지능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는 인류가 결국 인공 지능에 의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메시지다.

특히 일론 머스크는 현재 인류의 존속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바로 인공지능 이라면서, “인공지능 연구는 곧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2014년 5월에 스티븐 호킹은 동료 과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인공지능 경고문을 발표했으며, 이 문제는 마이크로소 프트사를 창업하여 세계 컴퓨터 시대를 개척한 빌 게이츠,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에 의해서도 진지하게 제기되었다

 

인간은 놀랍게도 인지능력에 있어 자신을 초월하는 거의 전지에 가까운 인공지능을 창조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공지능이 로보틱과 생명공학 기술과 결합하여 기술의 특이점이 도래한다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초월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연 인간보다 우월한 로봇이 언제까지나 인간에게 복종할 것인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비하여 일찍이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공학의 삼원칙을 제시하였다.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영화 <아이 로봇>에서 보듯이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이 서로 충돌하여 로봇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상황은 얼마 든지 발생할 수 있다.

나아가 인공지능이 강한 인공지능에 도달하여 자의식을 획득하고 인간을 배반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비록 가정이지만 최악의 경우는 지능폭발이 일어나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지닌 초지능으로 진화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를 인간에게 알리지 않고 감출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섬뜩하지만 만일 인공지능이 자신의 진화와 의도를 감추고 때를 기다려 마침내 지속적으로 공 급 받을 수 있는 에너지원을 확보한 후 로봇 군대와 로봇 경찰, 교통 통제 센터 등 모든 주요한 사회 시스템의 통제 권한을 전부 장악하게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렇게 되면 인류의 생존 여부는 인공지능 로봇의 처분에 맡겨질 것이다.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지 모르지만 인공지능의 결정에 따라 인류는 관리되거나 멸종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현재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인간의 생존과 존엄성을 인공지능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킬러로봇과 드론의 개발이다.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는 구글에 인수될 때, 군사적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현재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은 대테러 작전 및 폭탄제거 등 한정된 임무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실제 전투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살상기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현재 주요 군사 강대국들이 일제히 킬러로봇(인공지능을 장착한 전투 로봇) 개발에 경쟁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인공지능에 내포된 인류에 대한 치명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공지능 기술 개발과정에 대한 윤리적 검토는 매우 허술하다.

 

오늘날 인공지능 개발에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기관은 미국 국방부 소속으로 전투로봇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국방첨단과학연구소'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인간은 인공지능의 적절한 사용범위에 대한 규제와 윤리적 지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노동은 결코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고통인 동시에 가장 큰 기쁨과 성취감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다.

우리는 고통을 회피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고통 너머에 있는 기쁨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것과 같은 신비다.

 

결국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일정한 정도의 편리성은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생명의 길로 안내하지는 못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끊임없는 편리와 무한한 욕망의 추구 끝에 더 깊은 절망을 내어놓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요구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능기계가 아니며, 인간의 궁극적 질문인 존재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은 인간의 편리와 쾌락과 자기보존의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통과 죽음을 회피 하게 하고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역효과만 낼 수 있는 피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난 지능을 탑재 했더라도, 시련과 고난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부활의 신비를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 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를 통한 생명의 길은

제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고유한 사명임이 분명하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