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3부 : 06. 창조 신앙의 현대적 해석

w.j.lee 2024. 5. 31. 10:04

제3부 진화론과 창조 신앙

 

06. 창조 신앙의 현대적 해석

 

현대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및 역사에 대해 비록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진리에 근사한' 신빙성 있는 설명을 제공 하고 있다.

또한 21세기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및 생태계 파괴, 자원고갈, 핵 위기 등으로 인류문명의 존속이 근본적으로 위협 받고 있는 시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신학자들은 기독교 공동체가 창조 신앙을 현대과학과 충돌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계도해야 할 뿐 아니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위기와 관련해서도 유의미한 해석을 제시해야 할 임무를 부여 받고 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읽는다면 필연적으로 현대과학의 여러 분야와 충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집착하게 되면 과학과의 전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 파괴의 시대에 요구되는 생태영성적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신학적 책무도 놓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안 바버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는 우리가 만일 창세기를 시대를 초월하는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으로 간주한다면, 창조 이야기에 담 겨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인간적 경험과 신학적 깨달음을 모두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이 세계와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고백에 담겨 있는 인간적 경험이란

세계의 의존성, 유한성과 우연성의 지각,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뢰,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감사와 긍정의 표현, 이 세계에 깃든 상호의존성, 질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등이다.

 

고대 자연종교의 세계관과 구분되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고백은 20세기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느끼는 경이로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주 비행사들을 수십 명 만나 그들이 우주여행 중에 느낀 체험들을 생생하게 기록
하였는데, 제임스 어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 였다.

 

지구가 암흑 속에서 보였다. 아름답고 온기를 가진 듯 살아있는 물체로 보였다.

... (중략) ... 처음에는 그 아름다움, 생명감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연약함을 느끼게 되었다. 감동했다.

우주의 암흑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 그것이 지구였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그곳, 그곳에만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리라.

내가 바로 그곳에서 살아왔다.

저 멀리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

다른 곳에는 어디에도 생명이 없다.

자신의 생명과 지구의 생명이 가느다란 한 가닥 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 끊어져버릴지 모른다.

둘 다 약하디 약한 존재이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사막에 홀로 떠 있는 생명의 오아시스임을 우주 비행사들은 실감한다.

아폴로 13호의 선장이었던 제임스 라벨은 지구로 돌아온 후 첫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서 얻은 새로운 비전, 새로운 세계 인식을 전 인류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우주에서 본 지구의 이미지,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우주선인 지구호의 진정한 모습을 전하고, 인간 정신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지구호를 조종하는 데 실 패함으로써 인류는 멸망해갈 것이라고 어원은 강조하였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체험에 기반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생태위기에 처한 전 인류가 함께 공유하는 영적 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천지창조 이야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 하자면 

첫째,

세계가 본질적으로 선하고 질서정연하며 일관되고 지성으로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는 것,

둘째,

세계는 하나님께 의존적이 라는 것,

셋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유로우시며 초월적인 분이고, 당신의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세계의 특성에 관한 신학적 주장은 그저 지난 과거의 한 순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유효한 진술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 주장들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바버는 강조 한다.

 

창조 신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그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한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신앙은 생명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과학이론인 진화론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적대적이거나 상충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고 전제한다.

또 한 창조 신앙은 구약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오래 전 과거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 및 생태계 파괴와 같은 자연세계의 의미성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

 

창조 신앙은 이스라엘의 히브리 성서에 창조 이야기가 기록될 당시의 종교 문화적·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 

히브리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 담긴 문학적 형식과 소재가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지배적이었던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계와 생명과 인류가 신들의 전쟁 혹은 우발적 사건들로 인해 생겨났다고 말하는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창조주가 선한 본성과 의지로 세계와 생명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신앙의 핵심은 이 세계가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고 질서정연한 장소이며,

결코 물리적 세계가 스스로 신성이나 마성을 지닌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인류의 고대 종교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뿌리 깊은 자연숭배나 동물숭배로 인한 인신희생 제사 등과 같은 인간을 억압해 온 악습과의 단절 내지는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히브리 성서에 기록된 창조 신앙의 본뜻은 한 마디로 자연 세계로부터 인간의 해방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과학적 시간으로 따져 언제 일어났는지, 며칠에 걸쳐 어떤 순서대로 무엇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은 이것이 마치 창조 신앙의 중심인 양 특정 성서 구절을 붙잡고 과학과 싸우고 있는것이다. 

 

오늘날 창조론자들은 가치와 신념체계인 신앙으로 과학을 판단하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 반면, 

도킨스와 같은 다윈주의 무신론자들은 사실 규명과 설명이 주된 목적인 과학으로 신학을 심판하는 과학 제국주의적인 교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교리를 과학에 적용하려는 시도나, 반대로 과학적 설명을 가지고 종교적 진리를 판단하려는 시도 모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심과 개발로 수많은 생명이 멸종되고 있는 오늘날,

창조신앙의 가치는 이러한 무리한 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인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데서 드러날 것이며,

과학은 생명의 세계가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것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양자가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는 길을 모색하도록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지속적인 발전과 미래를 위해 열린 과학과 손잡을 수 있는 창조 신앙의 재 해석이 필요한 이유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