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신학자의 과학 산책

제3부 : 05. 유신론적 진화론

w.j.lee 2024. 5. 31. 10:05

제3부 진화론과 창조신앙

 

05. 우신론적 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은 생명의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진화론의 관점에 비추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입장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때 기독교 진영이 모두 적대적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다윈이 베일에 쌓여 있던 생명의 역사에 작용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침내 밝혀냈다고 환영하였다.

그들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재 해석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후대에 화이트헤드가 말한 "종교의 원리는 영원한 것이지만 그러한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과학의 새로운 빛에 비추어 계속적인 수정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는 교훈의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립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더불어 신학자들은 '계속된 창조' 교리를 인정해왔기 때문에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하나님의 계속된 창조와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89년 찰스 고어는 "자연의 진화 과정이 인류의 출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면, 인류의 역사는 성육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적 로고스의 성육신을 생명과 인류의 진화론적 맥락에서 파악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로이드 모건은 진화에 나타나는 창발적이고 유기적인 특성에 주목하여 이를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창조력으로 보고자 하였다.

 

그는 진화 과정의 각 단계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생성되어 작용함으로써 진화가 가능 하다고 보고 이러한 창발성이 기존 이신론의 틀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기력한 모습을 제거한다고 기뻐하였다.

이신론의 신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에 최초의 법칙은 부여하지만 그 이후 전개 되는 사태는 그야말로 부여된 자연법칙에 따라 인과율적으로 발생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신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였고 또한 고생물학자로서 북경원인 발굴 탐사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는 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해왔으며,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선형으로 발전해나가는 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적으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 때문에 그는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차츰 20세기 유신론적 진화론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사상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에까지 영향을 끼쳐 과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의 대화에 큰 공헌을 세웠다.

 

이외에도 저명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를 열거하자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영문학자이자 성공회 평신도로서 현대에 설득력 있는 기독교 변증을 펼친 C.S. 루이스, 도킨스와 같은 옥스퍼드 대학교 분자생물학 박사 출신으로서 신학 전공으로 전향하여 도킨스의 유전자 환원주의에 맞서 유신론을 변증한 알리스터 맥그라스,

러시아 정교회 배경을 갖고 있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의 생물학자로서 현대 진화생물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테어도시어스 도브잔스키,

조지타운 대학교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호트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주도한 프랜시스 콜린스를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아서 피코크를 비롯하여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성찰을 존중한다.

 

진화론이 창조론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신앙과 진화론이 조화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진화론은 하나의 과학 이론이지만, 창조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 이론이 아니라 창조에 관한 신앙고백이다.

물론 진화론이 함축하는 내용이 아무런 도전이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방향이 우연 한 것이며 목적이 없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함의는 진화론 자체의 내용이라기보다는 함의라는 단어 그대로 진화론에 포함된 철학적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 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생명이 변이를 낳고 환경 속에서 선택되고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과 기제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지,

그 것에 담긴 형이상학적 의미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두고, 신앙적 입장에서 과학의 영역에 뛰어들어 성서에 어긋나는 과학은 잘못된 과학이라며 싸움을 벌이는 성서 문자주의의 입장이나, 반대로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추려서 신학의 영역에 뛰어들어 너희가 말하는 신의 창조 따위는 폐기해야 한다고 조롱하는 입장 모두 무리한 시도인 것이다.

 

대개 형이상학적 논쟁은 그 성격상 끝장을 볼 수 있는 논쟁이 아니다.

이는 신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에 관한 문제, 즉 과학 이론은 그 내용을 제대로 공부해서 배 우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의미와 신념에 관한 문제, 즉 철학과 신학은 진지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진화론이 생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화론 자체를 거부할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류는 아직 우주와 생명과 인간정신의 기원 및 발전 과정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의 사명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을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과 신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고,신학은 이들의 지적 성취에 대해 경청할 필요가 있다.

 

진화론을 수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과학 공동체에 대한 신뢰때문이다.

물론 과학사를 살펴볼 때에 토마스 쿤이 제시한 대로 기존의 정상과학이 패러다임이라는 방법론적 특성 때문에 새로운 이론을 억압하는 요소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항상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으므로 진리가 기존의 권위에 의해 정당한 대접을 못 받는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가능한 현상이다.

 

새로운 과학의 개척도 과학자 들의 몫이지 신학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아니다.

진화론이 설득력이 약간 부족하다고 해서 이를 무작정 창조론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구절이 신의 솜씨 혹은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뜻하는 것이지, 반드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진화의 과정조차도 포용하여 역사를 섭리하시는 신을 믿는다면 진화론이 신앙을 흔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출처 : 신학자의 과학 산책 (저자 김기석, 출판 새물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