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고백의 언어들

1-5. 인간 실존, 방황이 상수인 삶

w.j.lee 2024. 10. 8. 14:50

 

인간 실존, 방황이 상수인 삶

 

성 어거스틴 혹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아시나요?

그가 쓴 '고백록'은 수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인용하는 책입니다.

읽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이 젊은 시절에 방탕했던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성자처럼 변모한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기리기 위한 저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고 비록'은 수사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어거스틴 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이미 뛰어난 수사학자로 로마 제국에서 인정받던 사람입니다.

왕실학교의 수사학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밀나노에서 황제의 연설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유려합니다.

'고백록'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여정을 참으로 아름답고 적실하게 그려 보여줍니다.

이 책 전체의 방향을 알려 주는 구절이 제1권에 등장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오 주여, 나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을 불러 아뢰는 것이 먼저인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찬양함이 먼저인지, 혹은 당신을 아는 것이 먼저인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불러 아뢰는 것이 먼저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소서. 

 

여기서 "당신"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서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참 중요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당신을 향해서"라는 구절 은 라틴어로 '아드 테'입니다.

'te'는 '당신'이라는 뜻인데 문제는 'ad'입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 사람들은 이것을 'for'로 번역하기도 하고 'toward'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을 위하여'라 고 할 수도 있고 '당신을 향하도록'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신학 전문가인 선한용 박사는 "향해서 살도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을 향하는 존재,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는 존재'로 창조 하셨다는 게 어거스틴의 인간에 대한 본질 규정인 셈입니다.

그런 본질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여기서 따져 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실존은 어떠합니까? 

"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말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 합니다.

불안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간헐적으로 평화로운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불안 속에서 지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안식 없음', '고향 상실' 등의 단어가 떠오릅니다.

에덴 이후 시대의 인간은 늘 두려움 속에 살게 마련입니다.

성경은 가인이 동생을 죽인 뒤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에 정착했다고 말합니다(창 4:16).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입니다.

방황이 상수인 삶,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불안은 언제 그칠까요?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의 품에 닻을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107편 시인은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풍랑에 시달리다가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 고통 가운데서 그들을 구해내셨다고 노래합니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 107:30).

 

하나님을 떠남, 방황, 하나님께로 돌아감. 어쩌면 이것이 서양 문화의 기본적인 도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낙원'에서 '복낙원' 으로의 과정이 삶인 셈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도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에서 평안을 누리던 작은아들은 집을 떠납니다.

평안함이 권태로웠던 것일까요?

그는 자기 재산과 젊음을 탕진한 뒤에야 비로소 자기가 비참한 처지에 빠졌음을 절감합니다.

비로소 제정신이 든 그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눅 15:17)라고 탄식합니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 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벌어져서 고향을 떠나 트로이까지 갔던 그리스 연합군들, 그 가운데서도 오뒷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뒤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모험이 이 작품 속에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과정은 오뒷세우스가 잃어버렸던 자기 이름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귀향 이야기는 서양 문학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젊은 시절부터 사상적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지금까지 익숙했던 세계와는 상당히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했던 탓일까요? 

저는 동기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들에 의문부호를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화는 늘 어긋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의 전제를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질문들이 었습니다.

신학이 객관적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고 할 때, 고백의 언어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그런 전제들을 하나하나 헤쳐 보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은 지적 태만이라고 생각했 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신학자의 책을 읽다가 내게 구원 과도 같은 단어를 만났습니다.

'모호함'ambiguity 이 그것입니다.

그 신학자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충실히 파악하기도 전에 저는 그것을 제게 주어진 사유의 구원줄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호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호하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흐릿하다'는 뜻이므로 확신에 찬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개념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인간의 인식이라는 게 모호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유의 여백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여백이 생겼습니다.

이때 만났던 한 편의 시는 그런 확신과 태도를 더욱 강화해 주었습니다.

오규원의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라는 시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구절이 마치 저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밴쿠버에 와서 지내면서 공원을 걷는 것이 제게 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원 곳곳에 넘어진 나무들이 있더군요. 

큰 나무 가 맥없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기후 조건이 좋기 때문에 뿌리를 깊이 안 내려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쉽게 넘어진다지요?

흔들림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들림은 어쩌면 회복탄력 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척박한 땅에 있는 나무들은 뿌리를 깊이 내리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흔들림은 나쁜게 아니라 오히려 깊어지기 위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신념에 찬 사람보다 방황하는 젊은이를 보면 참 반가웠습니다.

신념이라는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리지 않고

온몸으로 세상과 맞선 사람들을 보면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확고하지 않습니다.


출처 : 고백의 언어들(저자 '김기석', 출판 '복있는 사람')

'쉼터 > 고백의 언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 나는 누구인가  (3) 2024.10.08
1-4. 인간이 다양한 학문을 통해 배우는 것  (0) 2024.10.08
1.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1) 2024.10.07
서문  (0) 2024.10.07
차례  (1) 202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