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조금씩 알아갈 뿐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그 겪음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찢어지게 벅찬 힘”에 압도당하지만 두렵지는 않습니다.
질식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유가 시작됩니다.
시인은 벅차서 떨었지만 떨다가 생각하니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세계가 자기에서 개시됨을 느낀 것입니다.
심화된 하나님 체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말랑말랑하게 다가오시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 새로운 인식의 문이 되기도 합니다.
시련과 고통까지도 자기 삶으로 품어 안을 때
삶이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전체 강의 주제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입니다.
하나님 체험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압도적인 타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압도적인 타자는 낯설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들의 최초의 감정이 당혹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혹감으로부터 사람들이 달아나지 않는 것은 그 속에 매혹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하나님 첫 번째 연에 우리가 잠시 머물러 있습니다.
"몰랐네/뭐 모른지도 모른/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계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없지 않고 있다는 것.
‘무엇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뭔가가 내 가슴을 흔들었다.
지난 시간에는 그 마주침이 일으키는 삶의 동요, 다양한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실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범신론, 다신론, 범재신론, 이신론, 유일신론 등이 그것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된 시대에는 다신론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유일신론은 다신론적 세계관과의 대립을 통해 발전한 개념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은 암암리에 '다른 신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고 있던 세계관이 바로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그 다른 신들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기존의 제도나 질서를 신적인 권위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왕은 왕의 운명이 있고, 귀족은 귀족의 운명이 있고, 노예는 노예의 운명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종의 숙명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직업에 따라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의 계급으로 구별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도 숙명론적 세계관이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도 바깥에 있는 이들도 있습 니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으로 여겨지는 달리트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더럽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정말 끔찍한 차별입니다.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는 오래전에 철폐되 었지만 관습이 뿌리 깊어 오늘날 인도 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숙명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는 혁명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숙명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타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숙명론적 세계 관은 순환적입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역사가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출처 : 고백의 언어들(저자 '김기석', 출판 '복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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