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성경 내용 요약

15. 죽음 그 이후

w.j.lee 2014. 6. 20. 14:51

 

 

15. 죽음 그 이후

 

 

사람의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썩어서 없어진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에는 죽었던 모든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이다.

성경에는 나사로, 유두고, 회장당의 딸,

수넴 여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등에서 보는 것처럼,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무덤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부활은 그들의 부활과 다르다.

그 때에는 일부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죽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장차 어떠한 몸으로 부활을 할 것인가,

또 그 때에 있을 최후 심판의 상황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죽은 자의 부활

 

1) 부활의 증거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미 분해되어 없어져 버린 몸이 어떻게 다시 결합되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분명하게 말씀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도

능히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히 11:19).

이러한 믿음은 선지자들의 믿음이기도 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했다(사 26:19).

또 에스겔 선지자는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기록했다(겔 37:13).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여러 차례 말씀했다.

예수님께서는 믿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하셨다.

그리고 곧 이어서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했다"(요 5:29).

또 오빠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던 마르다에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받게 하셨다(요 11:25).

 

사도 바울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증거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잘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전체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부활장(復活章)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사도 바울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는 것도 거짓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헛것일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실인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역시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도 바울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땅에 뿌려지는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죽는다.

그러나 그 씨앗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사람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께서 제시하신 것과 비슷한 예를

다른 경우들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곤충은 얼핏 보면 죽는 것 같아 보이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명체로 탈바꿈하여 살아간다.

겨울에 보는 나무나 풀은 아주 죽은 것 같으나, 새 봄에는 다시 새싹을 틔운다.

믐이 되어 없어졌던 달은 또다시 보름달로 차 오른다.

 

그러므로 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분명한 사실로 믿는다.

리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라고 고백을 한다.

 

2) 부활체

 

우리는 부활한 이후의 몸을 흔히 부활체라고 부른다.

그러면 부활체는 어떠한 상태일까. 지금의 몸 그대로일까,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일까,

성경은 부활체에 이 두 가지의 특성이 다 있을 것을 가르친다.

 

(1) 부활체는 지금의 몸과 동일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을 한다고 하여,

그 부활한 몸까지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도록

모두가 똑같은 상태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활체는 붕어빵 기계에서 똑같은 빵을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몸은 부활을 한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았을 때와 동일한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구별이 충분히 가능하다.

죽은 나사로와 아브라함에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구분이 있었음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대할 때마다 이별의 슬픔을 경험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부활을 한 이후에,

각기 다른 특성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그

들을 다시 만나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부활을 기대한다.

그러기에 성도는 죽음의 이별 앞에서도, 마르다처럼 소망 중에 위로를 받는다.

 

(2) 부활체는 지금의 몸과 다르다

부활체의 인격의 주체는 죽기 이전의 주체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그 상태는 지금의 몸과 다르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어지기 때문이다(고전 15:44).

부활체가 지금의 몸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부활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부활체는 질병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썩어지거나 죽지도 않는다.

또 부활체는 이 땅에서와 같은 방식의 사회생활을 계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는다. 혈연 관계에 구애를 받지도 않는다.

우리는 부활한 이후에도, 이 땅에서의 부모나 자녀,

주인이나 종 또는 친구나 이웃들을 분명하게 알아 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서의 인간관계는 더 이상 지속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부활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부활체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운명 전의 몸과 동일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예수님은 운명하기 이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을 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몸으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시고, 음식을 잡수셨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그들의 눈과 손으로 분명하게 확인했다.

사람들도 이처럼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부활체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긴 문을 통과하셨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기도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토록 변화된 모습 때문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기까지 했다.

 

3) 부활의 대상

 

죽은 자의 부활에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다.

죽은 모든 사람들은 선악간의 예외가 없이 다 부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을 하게 되는 목적과 그 이후 상태는 구별이 있다.

의인은 부활을 한 이후에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악인은 영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각각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라는 다른 명칭으로 구별하여 부르셨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 29).

 

사람들 중에는 부활에 이르지 않는 예외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몸의 부활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살아 있는 그대로 주의 재림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주님의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를 하게 된다.

그래서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의 부활체와 똑같은 상태가 된다.

 

2. 최후의 심판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하기를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다(히 9:27).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한번 죽는다는 것이 정하여진 것처럼,

심판도 정해져 있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한편,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는 사람들도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이 사실은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 4:5)고 하신 사도 베드로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은 누가 하는 것이며,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1)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분

 

(1) 성부 하나님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롬 14:10).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심판주 하나님을 예수님과 구별하여 말하기를,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존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라고 했다(히 14:23, 24).

그러므로 만민의 심판자로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분은

성자와 구별된 성부 하나님이시다.

 

(2)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불려지기도 했다(고후 5:10).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세상 끝 날에 친히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마 7:23, 25:31-33).

그렇다면 성자와 구별된 성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한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분은 분명히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시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심판을 하신다(롬 2:16).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셨다(요 5:22).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왜 친히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권세를 성자에게 맡겨서, 그로 말미암아 심판을 하시는가.

그것은 성자를 지극히 높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중보가 되시기 위해서 지극히 낮아지셨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비우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낮아지심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다.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6~11).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음에 대한 상급으로,

그에게 모든 자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맡겨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후의 심판을 하신다.

그러기에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천사들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대에는 천사들이 참여를 한다.

그러나 천사들은 심판을 하는 위치가 아니라,

심판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수종을 드는 협조자로 참여를 하다.

이 때 천사들은 "택하신 자들을 거두어 내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고"(마 24:31),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는" 등의 일을 한다(마 13:41, 42).

그러므로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천사들을 경배해서는 안된다.

천사들은 큰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수종을 드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 할 대상은 천사가 아니라,

그 천사를 부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악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악행도 역시 하나님의 허용하심 안에서만 이루어진다(욥 2:6).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악령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서 악령을 따르는 것을 가장 미워하신다.

 

(4) 성도들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대에는 성도들도 심판자의 자격으로 참여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받게 된다(롬 8:17).

 

성도에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가 있다(마 16:18).

그래서 성도는 시험과 핍박이 많은 이 땅에서도,

당당한 자세로 기쁘고 영광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가 받는 최대의 영광은 최후의 심판에서 나타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심판에 동참하는 권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계 20:4).

성도는 이 권세로 세상을 심판한다. 천사도 심판한다(고전 6:2, 3).

참으로 통쾌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가 심판할 대상인

세상이나 천사에게 심판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질질 끌려다니거나, 짓눌려 있어서도 안 된다.

 

2) 최후 심판의 대상

 

최후의 심판은 도덕적인 활동이 가능한 모든 피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의 대상은 모든 천사들과 사람들이다.

 

사탄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은 모두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심판은 영원한 형벌을 위한 심판이다.

어떻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하신 피조물을

영원히 벌하실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의 벌을 내리신 후,

마침내는 다 용서를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악한 천사들이 용서를 받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공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행한 대로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최후의 심판이라고 볼 때,

선한 천사들 역시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성경은 선한 천사들이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선한 천사들이

최후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단정을 지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지 않는 악한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낱낱히 기록된 책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계 20:12).

모든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도 심판을 받는다. 성도들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신 말씀 때문에 이런 생각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는

악인들이 받는 영원한 정죄의 심판이 없을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성도들이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했다.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다"(고후 5:10).

여기에서의 우리는 성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성도의 심판은 형벌을 위한 심판이 아니다.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어떻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는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등을 살펴서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셨으나,

성도의 부활을 가리켜서는 생명의 부활이라고 다르게 표현하셨다.

 

한편, 최후의 심판은 도덕적인 존재들 각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성격, 생각, 말, 행동, 상태 등 즉 겉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 두었던 것들까지도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는 농담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 얼핏 스쳐지나갔던 생각이나.

한순간 품었다가 곧 떨쳐버린 유혹들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심판주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살피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3) 최후의 심판 기준

 

심판의 기준은 심판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따라서 그 기준은 심판의 대상들이 갖는 여하한 상황에도 결코 달라지는 일이 없다.

주님께서는 그 기준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되는

자신의 뜻을 이미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법은 자연계나 사람의 양심에 잘 계시되어 있다.

자연의 법칙과 도덕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 현상들을 대할 때나, 또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성경 속에서 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계시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해서 심판의 기준들을 살피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심판의 기준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찾은 그대로 정확하게 실천도 해야 한다.

최후의 심판대에서는 미쳐 알지 못했다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실천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4) 최후 심판의 결과

 

모든 심판의 대상들은 각자가 행한 바에 따라서, 형벌 또는 상급을 받는다.

악한 천사들과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정죄와 저주가 가해진다.

그들은 영원한 불못, 또는 무저갱이라고 불려지는 지옥에 던져진다.

그곳에는 오직 극심한 고통만 있다.

예수님께는 그 모습을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으로 표현하셨다(마 25:30).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사망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심판의 결과로 의인이라는 선언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믿는 그 순간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선언 받는다.

이는 마치 대통령 당선자와, 선서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을 한 대통령의 관계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의인으로 선언을 받은 성도들은 천국에서의 완전한 축복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그들의 선행에 대한 상급도 받는다.

성도의 선행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선행도 상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선행에 대한 상급을 주신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최후의 심판의 결과는 오직 형벌 아니면 상급 둘 뿐이다. 중간은 없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 이외의 중간적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형벌과 상급에는 각각 차등이 있다. 많이 맞을 자가 있는가 하면,

적게 맞을 자가 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자가 있는가 하면,

크다 일컬음을 받을 자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급의 차이가 인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천국에는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일 뿐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를 한결같이 믿고 고백을 해왔다.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을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죄인들에게는 그 날이 참으로 두려움의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음란, 호색, 분쟁, 시기를 버려야 한다(롬 13:12~13).

범죄한 일이 있으면 , 솔직히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그러면 그 날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신원하여 주시는

기쁨의 날이 되어질 것이다(계 18:20).

그러기에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오히려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마치 신부가 설레임과 기대 속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날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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