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성경 내용 요약

28. 잘 좀 믿어보려는데 왜 고난이 닥치나

w.j.lee 2014. 7. 10. 16:38

 

 

28. 잘 좀 믿어보려는데 왜 고난이 닥치나

 


야곱은 자기가 살아온 120년을 돌이켜 보면서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말했다.

이 땅에서는 야곱이 말한 것처럼, 의인이나 악인할 것 없는 모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험악한 일들을 겪고 산다.

우리는 악인이라면 몰라도,

의인은 고난을 받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의인들도 예외 없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한다.

때로는 억울하게 여겨질 정도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을 당하거나,

동일한 조건에서 악인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에는 다음 다섯 가지의 유형이 있다.

이제 그 내용을 통해 고난이란 무엇이며,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형벌로서의 고난

 

사람에게는 본래 고난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고난이 없는 지극히 복된 상태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죄는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단절이 되게 하고,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비롯한 각종 질병과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

사람의 죄는 자연계에까지도 악한 영향을 끼쳐서 무질서와 재난을 생겨나게 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사람의 죄가 가중되면서

고난과 재난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반드시 그 대가를 찾으신다.

그것은 죽은 이후에 영원한 지옥의 고통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상당한 죄 값을 치르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육체적 고난이다.

정신적인 고난과 육체적인 고난은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고,

각각 따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만족하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는 편안하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무런 고난을 당하지 않는 형벌도 있다.

고난 없이 죄 가운데 내버려짐으로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전혀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고난을 통해 자극을 받아 죄에서부터 돌이켜 회개하지 못한다면,

고난의 기회가 없는 것 그 자체가 큰 형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바다를 항해해야 할 범선이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날에는

배가 항해할 동력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는 그 순간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믿는 사람은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요 5:24).

믿는 사람의 죄와 그 죄에 대한 대가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다(히 9:28).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야 한다.

죄의 대가인 고난도 당하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보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고난과 상관조차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들이 여전히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다.

 

2. 징계로서의 고난

 

의인이라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은

아직 육체의 연약함과 인간의 한계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실족을 하는 일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그 사람에게 그가 범한 죄를 깨닫게 하거나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의 허물을 볼 때,

징계를 아끼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

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5~7)라고 가르치셨다.

 

자신의 허물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점에서만 보면,

형벌과 징계는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당사자의 신분이나

고난이 주어지는 목적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다.

형벌적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심판주의 신분,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죄인의 신분인 반면,

징계적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버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녀의 신분이다.

형벌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는 반면,

징계는 사람의 잘못을 교정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징계가 없으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생아에 불과한지를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히 12:8).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내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허물을 발견하여 회개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고난은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유익으로 바뀐다.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참고 인내하면 마침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된다(히 12: 11).

 

3. 연단으로서의 고난

 

성도에게는 자신에게 허물이 있어 당하는 징계로서의 고난과는 달리,

아무런 허물도 없음에도 당하는 고난도 있다.

불순물이 섞인 광석 속에서 정금을 얻으려면 강한 불로 제련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의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무런 허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연단으로서의 고난이라고 한다.

징계로서의 고난은 허물을 교정하려는 것이 목적이지만,

연단으로서의 고난은 훈련을 통한 성장에 그 목적이 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을

“믿음의 시련”(벧전 1:7) 또는 “불 시험”(벧전 4:12)이라 부르면서,

그 목적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에 있다고 말씀했다(벧전 1:7).

욥이 까닭 없이 당했던 고난, 요셉이 애굽에서 당했던 고난,

다윗이 사울에 쫓겨 다니면서 당했던 고난 등은 바로 이러한 고난이었다.

 

성도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징계에 해당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는 성도는

자신의 고난을 연단으로서의 고난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도는 그 고난을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함으로 맞아야 한다(벧전 4:12,13). 그리고 인내해야 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5:4).

성도에게는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도 없이 큰 영광이 준비되어 있다(롬 8:18).

 

4. 자원하는 고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수고와 고난이 수반된다.

이러한 고난은 성도가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마 5:11),

또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벧전 4:14). 사

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고난의 유형으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등을

열거하셨지만(롬 8:35) 그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자원적 고난의 절정은 순교이다.

스데반과 제자들의 순교,

순교를 각오한 다니엘 선지자의 풀무불과 사자 굴속에서의 고난,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던 것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지에서 당한 고난은 모두 주의 이름을 위해

자원하여 당했던 고난이었다.

 

성도가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고난에 대해 하늘에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원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복된 자라고 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마 5:11~12).

 

5. 하나님 섭리의 수단으로서의 고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의사나 조건과 관계없이

자신의 섭리 수단으로 고난을 동원하시는 경우도 있다.

바울 사도께서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가시던 도중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두 주간 동안이나 거의 죽도록 고생을 하셨다(행 27장).

그 고난은 사도 바울의 의사에 따른 것도 아니고,

징계나 연단을 위한 고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까지 머리카락 다치지 않고 살아남으로서,

모두가 사도 바울께서 로마에서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사람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직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을 그 가리게 역할로 삼으신다.

불신자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의인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서

신자들을 조롱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과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 중 어느 누가 폭풍 속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선하고 깊으신 섭리의 뜻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사도 바울의 설명을 들은 이후에라야

그들이 당했던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축복을 고난으로 포장하여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고난을 단순히 고난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고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찾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육체적, 영적 고난에서 해방을 받지 못한다.

허물이 있을 때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 허물을 깨닫고 바르게 하기 위해 주시는 징계의 고난이 따른다.

허물이 없어도, 훈련을 통해 더욱 정금같이 단련되어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의 고난을 당한다.

때로는 주의 이름 때문에 성도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고난에 뛰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수단으로 사용되는 고난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어떤 경우이든 유익한 결과를 위한 선한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끝까지 인내하게 되면,

반드시 그 고난 이후에 준비되어 있는 적절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