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은혜의 말씀

돌아온 탕자

w.j.lee 2016. 2. 26. 00:15


돌아온 탕자


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탕자란 무엇에 대한 탕자인가?

아버지를 떠난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을 말하는가?


자식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야 하고,

재산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이 아들은 어찌하여 탕자라는 이름을 얻었는가?

그가 방탕했으므로 재산을 탕진한 것인가,

만일 재산을 더 많이 모았다면 탕자가 아닌가?

사람이 아무리 방탕해도 재산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쓸모없는 땅이 갑자기 수천배로 오를 수도 있고,

방탕하다 만난 배우자가 천하의 갑부로써 

재산을 남기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재산도 말씀에 대한 것이요, 관계도 말씀,

즉 진리에 대한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러므로 재산을 탕진했다는 말은 말씀을 버렸다는 것이요,

진리에 관심을 저버리고 세상의 법을 따라갔다는 말이다.

진리인 아버지를 떠나면 진리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고,

진리에서 멀어지면

삶의 의미가 없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면 흉년이 들수 밖에 없고,

돼지 같은 생활과(재물이 있던 없던) 

쥐엄 열매로 죽지 못해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의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삶으로 경험될 때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인데,

큰아들과 같이 그러한 경험이 없이

아버지 곁에 있는 줄 알고 있는 관념으로의 삶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착각이라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큰아들은 당시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역시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아는

가련한 종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는가?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비록 아버지의 명이 어떠하다 해도 그 명령의 중심을 아는 것이 아들이다.

입술로 싫습니다, 라고 할 수 있으며

돌아와서 다시금 아버지의 명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버지를 참으로 아는 아들이지

입술로는 예, 예 하면서 도무지 실천하지 아니하는,

실천할 능력이 없는 아들은 이미 아들이 아닌데도 

그 입술로 예, 예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는 줄로

믿고 있는 것이 바로 큰 아들이란 말이다.

이것이 신앙이라는 관념이다. 속지 말라!


탕자는 언제부터 탕자인가?

그가 "주려 죽는구나"라고 깨닫는 시점부터

그는 탕자이지 잘 나갈 때에는 전혀 탕자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부를 누리며 호사를 누려도

주려 죽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바로 탕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은 신앙이 있던 없던,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큰아들을 지나 작은아들로 그리고 탕자를 지나 아버지 집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대가 큰아들일 때나 작은 아들일 때나 탕자일 때나 돌아온 때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들에게서는 각각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큰아들은 작은 아들의 잔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한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명을 어긴 적이 없거늘

나를 위하여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으시더니..." 

그래서 돌아온 동생의 잔치에 아버지를 원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게 먹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하기야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아버지를 알까보냐?


아버지의 재산, 그것이 아버지로 보이지 아니하고 재산으로 보이는 한

그는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을지는 몰라도 결코 아버지를 누리지 못한다.

아버지의 재산은 창기와 함게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아버지는 "애야, 너는 나와 같이 늘 있어서

내것이 다 네 것인데 무얼 그러느냐?"라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입장에서의 일뿐이다.


큰아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아버지의 맛을 더욱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이 큰아들 역시 탕자와 같이 돼지 우리에 있는 것이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 주려 죽을 지경인 것은 큰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고 탕자는 떠나있다.


바로 탕자의 구분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있는가?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으면서

아버지의 집에서 명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된 신앙이다.

탕자인가, 큰아들인가?

탕자이면 그 쥐엄 열매로는 돚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말이다.


쥐엄 열매는 돌이 떡이 된 것이다.

예수의 첫 시험이 이것이다.

주려 죽을 지경에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명을 쫓아 살 것이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냐의 선택이다.


탕자란 바로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여

아버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 사람이라는 말이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죽일 죄인 역시 한 사람도 없다.

다만 큰아들은 의인인 줄로 알고 있는 그것이 죄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이요,

돼지우리에서 열심히 쥐엄 열매를 긁어모으느라 세상 모르게 살았던 것이다.


탕자는 자신을 알고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향하여

걸음을 옮길 수 있게 한 그것이 그의 의인 것이다.

 

 

 






렘브란트의<돌아온 탕자>,1669, 캠버스에 유채화, 262 X 206 cm,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등장 인물

 

우선 모든 시선들이 향해있는 두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도 자연히 머물게 됩니다. 시선이 모여진 그곳에는 한 노인네가 헐벗은 거지 모습의 청년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고 있는(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작은아들의 헤어진 옷과 신발에서 그 삶이 비참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른 쪽 끝에는 큰아들이 아버지와 동생의 상봉하는 모습을 우뚝 선 위치에서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 검은 모자의 콧수염의 사나이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두 여인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둥 뒤에서 내다보는 한 여인이 중앙 상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위쪽에 약간의

형체만을 드러내는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쉽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작은아들의 묵상

 

아버지에게 돌아온 작은아들은 누더기의 속옷을 걸치고 거의 몸만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었던지, 수용소에 있었던지, 이 모습은 개성을 박탈당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샌달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달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렸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작은아들의

머리는 엄마의 자궁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양이고 얼굴은 거의 아직 태아의 모습입니다. 램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인간의 모습을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큰아들의 묵상

 

그는 작은아들의 귀향에 대한 목격자입니다. 이 목격자는 아버지를 기쁨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판관 같은 자세로,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뻣뻣하게 서 있습니다. 그는 법적인 편협함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포옹을 원하지도 않으며, 뒤에서 이

광경을지켜보고 있는 하인들까지 포함하는 일가족으로부터도 한 걸음 물러서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분명 작은아들과 그를 안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큰아들은 이 그림 전체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리를 두고 서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훨씬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수염을 길렀고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 유사성이 둘 사이의 공감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다릅니까?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꼿꼿하게 서있고 긴 단장은 그의 자세를 더욱 강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묵상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안에 드러나는 신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염을 기른 반 실명 상태의 노인, 황금빛의 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돌아온 자식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대적인 자애와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용서와 같은 신성의 실재를 보게됩니다. 여기서 인성과 신성,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강인함, 늙음과 영원한 젊음이 함께 표현되고 있습니다. 거의 눈 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등을 육체적인 시력이 아니라 내적인 눈으로 보면서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자비와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아들

뿐 아니라 아버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반 장님인 노인이 흐느끼면서 아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상처받은 아들을 축복하는 모습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손에서부터 드러나는데 재미있게도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만지는 아버지의 왼손은 매우 강하고 근육질입니다.

손가락들이 펼쳐져 있고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싸고 있습니다. 일종의 누르는 힘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특별히 엄지손가락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른손은 얼마나 다릅니까? 이 손은 누르거나 잡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섬세합니다. 손가락들이 모아져 있고 아주 우아합니다. 이 손은 아들의 등 위에 부드럽게 얹혀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엄마의 손인 여성의 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