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천로역정 2 (天路歷程 2 )

읽는 이들에게 부치는 글

w.j.lee 2024. 8. 19. 10:37

 

 

읽는 이들에게 부치는 글

존경하고 사랑하는 길벗들에게

순례자 크리스천과 그이가 새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던 위험천만한 여정에 관해서는 이전에 이미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게는 썩 즐거운 일이었고 그대들에게도 유익했으리라 믿는다.

아울러 순례자의 아내와 자식들을 지켜봤던 얘기도 했었다.

순례길에 함께 오르길 워낙 싫어했던 터라 크리스천으로서는 식구들을 다 버려두고 혼자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멸망의 도시에 남아 있다간 슬금슬금 닥쳐오는 파멸과 맞닥뜨릴 게 뻔 한데, 그는 도무지 그런 위험을 무릅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들에게 이미 설명했듯이, 그런 까닭에 크리스천은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홀로 순례길에 들어섰다.

 

그동안 일이 워낙 분주하고 정신이 없어서 마실 다니듯 늘 들 르던 동네, 

다시 말해 순례자가 출발했던 곳에 좀처럼 가보지 못 하고 지냈다. 

그래서 여태껏 크리스천이 남겨둔 식솔들을 수소 문해서 뒷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볼일이 생겨서 다시 그리로 내려가게 되었다. 

순례자와 헤어진 자리에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내가 누워 쉬고 있는 쪽으로 나이 지긋한 어른이 다가 왔다. 

마침 그 어르신이 내가 향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라기에 얼른 일어나서 동행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우린 길동무가 됐다.

여느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온 갖 이야기를 다 털어놓게 되었으며, 그 끝에 크리스천과 그의 여 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노인에게 던진 질문이 실마리가 됐 다.

“어르신, 저 아래 보이는게 무슨 마을이죠? 저기, 우리가 가는 길 왼편에 있는 저 동네 말입니다."

 

그러자 총명(이게 노인의 이름이었다) 선생이 대답했다. 

"멸망의 도시 일세. 많은 이들이 부대껴 사는 대도시이지만 성질이 사납고 게으른 부류가 득실거리지."

 

옳다구나 싶어서 얼른 뒤이어 말했다. 

"저도 언젠가 저기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어르신 말씀대로더군요."

 

총명 선생 

"어김없는 사실이고말고! 웬만하면 저기 사는 이들에 대해 좋은 얘길 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려'

 

"그렇습니다. 

어르신은 참 선량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일을 듣고 이야기하는 걸 즐겨하는 분 같아요. 

그런데 혹시 이 고을에 살던 크리스천이라는 양반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들어 보지 못하셨나요? 

고귀한 세상을 향해 순례여행을 떠났다든지 하는..."

 

총명 선생 

"듣다마다!

그이가 여정에서 맞닥뜨리고 부닥쳤던 온갖 괴롭힘과 어려움, 전쟁과 포로생활, 울부짖음과 신음, 놀라고 두려웠던 일들까지 낱낱이 모두 다 들었다오.

그런데 말이오,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구려.

온나라 구석구석까 지 크리스천의 이야기는 두루 퍼졌지만,

그이의 됨됨이와 행실을 듣고 그 뒤를 따른다든지 순례길이 어떠했는지 자취를 찾아본 집안은 아예 없다시피 했소.

적잖은 이들이 순례 자의 위험천만한 여정에 성원을 보냈던 건 사실이오.

그래, 그렇다고 볼 수 있어.

여기 살 적에는 다들 입을 모아 그를 멍텅구리라고 놀려댔지만, 순례길을 떠나고 나서부터는 뭇 사람들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다오. 

그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산다니까 더 그러겠지.

순례자가 따랐 던 위태로운 나그넷길을 따라 밟을 엄두조차 못 내면서, 그 이가 받은 상급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작자들은 수두룩하단 말씀이야."

 

"그렇다면 그 양반들이 보기는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례자가 지금 머무는 데서 더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생명 샘에 살고 있거든요.

수고와 슬픔이 한 점도 깃들지 않은 삶을 누리고 있죠. 거기엔 괴로움 따위가 섞여들 여지가 전혀 없으니까요.

선생님도 들으셨죠?

사람 들이 뭐라고들 하는지......"

 

총명 선생 

"말? 많고말고. 흰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느니, 목에 금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느니, 머리에 진주가 박힌 금면류관을 썼다느니 크리스천을 둘러싸고 별별 희한한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니지.

또 마치 세상에서 이웃끼리 가까이 지내듯, 순례자가 거기서 그들과 아주 친하게 어울린다고도 얘기하는 친구들도 있다네.

순례길에 드문드문 나타났던 그 환하게 빛 나는 이들과 말일세.

 

어디 그뿐이겠나? 

순례자가 사는 나라 임금님이 대궐에다 호사스럽고 쾌적한 거처를 내려주신 덕에 날마다 나라님 이랑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며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장담하는 이들도 있어.

모든 일을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께서 미소와 은혜를 듬뿍 베풀어주신다는 거지.(슥 3:7; 눅 14:14-15)

게다가 더러는 그 나라의 주인이신 왕자님이 곧 세상에 오셔서, 크리스천이 순례에 나서려는 걸 알게 된 이웃들이 그이를 그토록 멸시하고 한없이 조롱했던 까닭 부터 파악하시리라고 여긴다네.

그자들이 뭐든 그럴듯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유 1:14-15)

 

이야기인즉슨, 왕자님은 이제 크리스천을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하신단 걸세. 

그러니까 순례자가 길을 나설 때 쏟아졌던 모욕에 깊은 관심을 두시는 나머지, 마치 스스로 수치를 당한 것처럼 여기시리란 뜻이지.(눅 10:16)

놀랄 일도 아니야. 크리스천이 그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썼던 것도 결국은 왕자님을 향한 사랑 때문일 테니."

 

다시 내가 나섰다. 

“다행이군요. 그 가엾은 양반을 생각하면 더 없이 반가운 소식이죠. 

고된 수고를 벗고 이제 쉼을 누리게 됐고, 눈물의 씨앗을 뿌려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됐고, 적의 총알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렀으며, 그이를 미워하는 이들의 손아귀를 벗어났으니 참 반가운 일입니다.(계 14:13; 시 126:5-6)

이런 일들과 관련 된 소문이 온 나라에 두루 퍼진 것 역시 반가울 따름입니다. 

뒤에 남은 이들에게 그런 풍문이 선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 문득 생각이 나 서 그러는데, 혹시 크리스천의 아내와 자식들 얘길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딱한 양반들 같으니라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못내 궁금하군요."

 

총명 선생 

"누구라고? 크리스티아나와 아이들이라 했소? 

순례자가 했던 그대로 따라했다오.

물론, 처음엔 어리석게들 굴었지.

크리스천이 눈물바람을 하며 매달려도 꿈쩍도 하지 않 았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완전히 마음을 달리 먹고는 온 식구가 보따리를 꾸려서 이내 순례자를 좇아 길을 떠났다네."

 

“잘됐네요, 너무 잘됐어요! 와, 대단하네요. 아내와 아이들까지 한꺼번에 순례에 나서다니!"

 

총명 선생 

"어김없는 사실일세.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네. 마침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터라 앞뒤 사정을 낱 낱이 알고 있으니까."

 

"그럼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이곳저곳 다니며 그 소식을 전 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총명 선생 

"걱정 말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게나. 선량한 아낙과 아들 넷이 다 순례길을 떠났으니 말일세.

우린 한동안 같은 길을 갈 성싶으니 자네에게 앞뒤 사정을 죄다 이야기해주지.

남편이 강을 건너 가버린 뒤로 더 이상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게 되자 크리스티아나(아이들을 데리고 순례자의 삶에 들어선 날부터 이게 그이의 이름이 됐지)는 생각이 많아졌다네.

무엇보 다 남편을 잃었구나 싶었지.

둘 사이를 이어주었던 애정 가득한 관계의 끈이 결국 끊어져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던 걸세.

자네도 알겠지만, 예전에 크리스천이 했던 말마따나,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기억에 빠져 있을 때는 무거운 상념들을 짊어지고 살게 마련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 여인도 남편을 떠올리며 눈물을 펑펑 쏟곤 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네. 

혹시 자신의 온당치 않은 처신이 남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만든, 다시 말해 남편이 자신을 떠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거든.

그러다 마침내 더없이 가까운 친구에게 온갖 매정하고, 부자연스러우며, 불경건한 짓을 해댔던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득실거리기에 이르렀네.

양심에 부대끼고, 죄의식에 짓눌렸지.

 

남편이 초조하게 신음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던 기억부터, 함께 떠나자고 자신과 아들들에게 애원하고 사랑으로 설득할 때 얼마나 매정하게 대했는지까지 갖가지 기억이 다 떠오르는 바람에 더욱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네.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크리스천이 들려준 말이나 눈앞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 는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특히 '어떡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부르짖던

남편의 처절한 외침이 더없이 애절하게 여인의 귓가를 맴돌았다네.

 

그러다 아들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했지. '우린 이제 다 망했다.

엄마가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아빠가 떠나버렸구나.

그 양반은 우리들을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난 내키지 않았단다.

그게 결국 너희들이 생명에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그러자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따라가자고 매달리며 울부짖었어.

 

크리스티아나는 말했다네. 

'너희 아버지를 따라갔더라면 운명이 달라졌을 텐데! 

그랬더라면 만사가 다 잘 풀렸을 거야. 지금 이런 꼴로 있지는 않았겠지.

처음에는 어리석게도 너희 아버지가 겪고 있는 문제가 터무니없는 공상에서 비롯 됐거나 우울한 기질에 눌려서라고 판단했단다.

하지만 다른데 원인이 있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 

구체적으 로 말하자면,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줄 생명의 빛이 임했던 거야.(약 1:23-25; 요 8:12; 잠 14:27)

내 생각에는 그래.'

다시 한 번 울음이 터졌다네.

다들 부르짖었지.

'아, 저주스러운 그날 이여!'

 

이튿날 밤, 

크리스티아나는 꿈을 꿨소. 

놀랍기도 하지, 널찍한 양피지가 눈앞에 좍 펼쳐지는게 아니겠소?

거기엔 그 이가 살아온 이력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소.

제 눈에도 더없이 사악해 보이는 죄악들까지 말이오.

여인은 잠든 채로 냅다 소리를 질렀소.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눅 18:13)

자던 아이들도 그 소릴 다 들었다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크리스티아나는 꺼림칙하게 생긴 인물 둘이 곁에 서 있는 걸 알아챘다네.

그자들끼리 말하 더래.

이 여인을 어찌할까?

자나깨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으니 난감하네.

시종일관 이렇게 괴로워 하게 뒀다가는 그 남편처럼 영영 놓치고 말겠어.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차 어찌 될지 궁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겠지?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이 일어나 말려도 기어코 순례자가 되어버릴 게야.'

 

크리스티아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났네. 

온몸이 와들 와들 떨렸지. 

하지만 이내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엔 크리스천,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이 은총의 땅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이들 틈에 함께 있는 장면이 보이는 것 같더래. 

손에 하 프를 들고 서서 머리에 무지개를 두르고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지, 아마? 

 

그뿐만 아니라 왕자님 발등 위에 얼굴이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고 고백하더래. 

'저 를 여기에 불러주신 나의 주인, 나의 임금님께 감사를 드립 니다!' 

그러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벗들이 한목소리로 무어라 외치고 또 하프를 타는데,

살아 있는 인간 가운데 그 누구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말이었다는군.

알아듣는 이는 오로지 크리스천과 그 벗들뿐이었던 걸세.

 

아침이 밝자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들들을 불러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

크리스티아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라면 어서 들어오세요!'

 

손님은 '아멘'으로 화답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왔네. 

그러곤 여인에게 허리를 숙이며 '이 댁에 평안이 가득하길 빕니다'라고 인사하고 나서 물었지.

'크리스티아나 님, 제가 온 까닭을 아시겠습니까?'

순간, 피가 얼굴로 몰리고 몸이 떨렸지.

그이가 어디서, 그리고 무슨 심부름으로 찾아왔는지 어서 알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더래.

이윽고 손님이 입을 열었다네.

 

'내 이름은 '비결secret'이올시다. 

저 높은 데 있는 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지요.

내 사는 데서 듣자 하니, 당신께서도 그쪽으로 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군요.

게다가 예전에 남편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는 얘기도 있고요.

남편이 가는 길을 냉정하게 막아서고 아이들한테는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았죠.

 

크리스티아나, 자비로우신 주님은 날 보내 당신에게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분은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며 죄를 사해주시는 걸 곱절은 더 기뻐하신다고요.

또 당신을 주님의 임재에, 다시 말해 그 식탁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알리라고 하셨어요.

그분의 집에 가득한 맛있는 음식으로 먹이고 당신의 조상, 야곱의 유산을 물려받게 하시겠다고요.

당신의 남편 크리스천도 거기에 있어요.

아주 많은 벗들과 함께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삶을 보살펴주시는 분의 낯을 늘 우러러보고 있답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저 높은 곳의 문턱을 넘는 소리를 들으면, 다들 한마음으로 기뻐할 거예요.'

 

그 얘기에 여인은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네. 

손님은 계속 말을 이어갔지.

 

'크리스티아나 님, 여기 편지도 있 답니다. 댁의 남편이 모시는 임금님께서 보내신 글이죠.'

 

서신을 받아 열자 더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네.(아 1:3)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금으로 적혀 있었지.

내용을 보면, 님은 여인이 남편 크리스천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르길 바란다고 되어 있었어. 

임금님의 성에 이르러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물며 영원히 기쁨을 만끽할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

편지를 죽 읽어 내려가던 이 착한 여인은 이내 감격에 겨워 손님에게 부르짖었네.

 

'선생님, 저와 이 아이들을 함께 데려가주시겠어요? 우리도 가서 임금님께 예배할 수 있을까요?

 

손님은 대답했지. '크리스티아나여,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앞서 갔던 이가 그랬듯 시련을 거쳐야 하죠.

그래서 남편 크리스천처럼 하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들판 너머에 있는 좁은 문으로 가세요. 당신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 거기서 시작되니까요.

힘닿는 데 까지 최대한 빨리 가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가길 권합니다.

여행하는 내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아이들에게도 들려주세요.

편지는 이 집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동안 그대들이 불러야 할 노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시 119:54)

마지막 문을 지날 때 내놓아야 할 징표이기도 하고요.'"

 

꿈속이었는데도 사연을 들려주는 내내 총명 선생이 사뭇 감격한 눈치임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침내, 크리스티아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지. 

'아들들아,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겠다만, 요즘 내가 너희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생각이 이만저만 많은게 아니었지.

그 이가 행복하게 지낼까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무척 잘살고 있다는 게 너무도 흡족해서야.

한편으론 내 처지와 너희들의 형편을 곱씹으며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우린 정말 밑바탕 부터 비참한 상황이니까.

너희 아빠가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내가 보였던 행동들도 짐이 되어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단다.

나만이 아니라 너희들까지 부추겨서 네 아버지에게 냉담하게 굴게 하고 끝내 순례길에 따라나서길 마다하게 만들었잖니.

 

지난밤에 꾼 꿈과 오늘 이 손님이 건넨 격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런 상념들에 눌려 죽었을지도 모르지. 

얘들아, 이제 짐을 꾸려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자꾸나. 

아버지를 만나서 그 양반의 벗들과 한데 어울려 그곳의 법을 따르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은 눈물을 흘렸다네.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기우는게 기뻤던 모양이오.

손님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고 식구들은 나그넷길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지.

그런데 막 집을 나서려는 참에 이웃에 사는 두 여인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어.

크리스티아나 는 아까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라면 들어오라고 했네.

손님들은 기겁을 했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 

크리스티아나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거지. 

어쨌든 두 여인은 안으로 들어왔네. 

그런데 맙소사, 마냥 착하기만 했던 안주인이 집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웃 여인들이 캐묻기 시작했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우? 

크리스티아나는 둘 중에 언니 격인 '소심댁rimorous'에게 먼 길 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지.

 

이 소심댁이란 여인은 지난날 크리스천이 '곤고재the Hill Difficulty 를 넘을 때 만났던 남자, 그러니까 사자들이 버티고 있다고 겁을 주며 돌아가라고 꼬드겼던 그자의 딸이었네.

 

소심댁 

'말씀 좀 해보세요, 길을 떠나다니, 무슨 길을 떠나요?' 

 

크리스티아나

'의로운 남편이 갔던 길을 따라가려고요.'

 

순간, 크리스티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

 

소심댁 

'착한 이웃 양반,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저 가엾 은 아이들을 봐서라도 그렇게 자신을 망치는 여성스럽지 못한 일을 벌이지 마세요.'

 

크리스티아나

 '그런 말씀 마세요. 아이들도 모두 함께 가기로 했어요. 

남고 싶어 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요.'

 

소심댁 

'도대체 뭐가, 아니면 누가 댁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줬는지 정말 궁금하구려'

 

크리스티아나

'제가 알고 있는 걸 이웃 아주머니들도 알게 되시면, 틀림없이 저랑 함께 떠나려 할 거예요.'

 

소심댁 

'이런, 제발! 댁이 알게 된 새 지식이 도대체 뭐기에 친구들 마저 저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게 만든답니까?'

 

그러자 크리스티아나가 대답했소. 

'남편이 떠난 뒤로, 특히 강을 건너가 버린 뒤로 몹시 괴로웠어요.

무엇보다 날 힘들게 만드는 건 그이가 한창 어려움을 겪을 때 보였던 제 막돼먹은 행동들 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그때 그이가 그랬던 것처럼 힘들어하고 있고요.

순례여행을 떠나는 것 말고는 무엇으로도 해결이 나지 않을 거예요.

 

어젯밤 꿈에서 남편을 봤어요. 

제 영혼이 그이와 같이 있었던 거죠. 

남편은 그 나라 임금님과 함께 살고 있더군요. 

한 상에 앉아서 밥을 먹더라고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이들과 벗이 되었죠.

지금은 왕이 내려준 집에 머물고 있는데 이 세상의 으뜸가는 궁전도 거기에 대면 거름더미나 다름없겠다 싶더군요. (고후 5:1-4)

궁궐 에 계신 왕자님이 편지도 보내주셨어요.

그분께 가면 잘 대접해 주겠노라 약속하는 서신이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신이 여기에 있었어요. 날 초대하는 편지를 품고 말이죠.'

 

그러곤 편지를 꺼내 읽어주고는 말했지. 

'이것까지 보여드렸는 데도 그런 말씀을 하시겠어요?'

 

소심댁 

'오, 댁과 댁의 남편은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씐 것 같네요. 

스스로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다니! 

댁도 들었죠?

좀 심하게 말해, 댁의 남편이 집을 나서 첫 발을 떼는 순간부터 무슨 일을 당했는지 난 똑똑히 알아요.

이웃에 사는 '옹고집 씨'라면 지금도 정확하게 증언해줄 수 있을 거예요.

'유 순한 씨'도 그렇고요.

두 분 다 댁의 남편과 한동안 동행 했지만 슬기로운 사람들답게 더 멀리 가기를 겁내고 조심스러워했거든요.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이 어떻게 사자와 '아볼 루온',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비롯해 온갖 어려움에 부닥쳤는지도 들었죠.

'허망시장'에서 만났던 위험은 댁도 잊지 않았을 겁니다.

사내도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판에, 댁처럼 힘없는 아낙이 뭘 어찌하시려는 거죠?

댁의 살과 뼈나 다름없는 귀여운 네 아이들도 생각하셔야죠.

제 한 몸이야 앞뒤 가리지 않고 내던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몸의 열매를 위해서는 집에 머물러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크리스티아나는 소심댁에게 대꾸했다네.

 

'이웃들께서는 헷갈리게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 저는 작은 값을 치르고 큰이득을 보려는 참이에요. 

지금 마음먹고 이 기회를 잡지 않는다 면, 세상에 그런 멍청이는 없을 겁니다. 

두 분은 이 길을 가면서 만날 수도 있는 온갖 어려움들을 말씀하셨지만, 그게 절 낙담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제 판단이 옳음을 보여주는 것 같군요.

태산을 넘어야 평지를 보는 법입니다.

힘들게 오른 길을 수월하게 내려가는 기분은 한결 달콤하게 마련이고요.

아까 분명 제가 물었 는데, 아무래도 두 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 집에 오신 게 아닌 것 같으니 그만 가주시겠어요?

더는 저를 불안하게 만들지 마시고요.'

 

그러자 소심댁은 막말을 해대며 함께 온 이웃, 자비 양을 부추겼지.

'우리의 조언이고 그동안 쌓아온 정이고 뭐고 다 퇴짜를 놓으니, 어서 그만 갑시다. 저 여자가 어찌하든 상관치 말고요!'

 

하지만 자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네.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하자고 대꾸할 수 없었던거야.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우선, 속마음은 크리스티아나에게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 이웃 양반이 정 떠나겠다면 다만 얼마라도 함께 가면서 도와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네.

 

둘째로, 마음속 가장 깊은 데 도사린 제 영혼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던 까닭이지.

그러기에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네.

'크리스티아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이분의 말에 진리와 생명이 담긴 게 보이면 온 마음을 다해 동행할 거야.' 마침내 자비는 소심댁에게 답했어.

 

'그래요, 오늘 아침에 댁과 나란히 크리스티아나 님을 만나러 온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보다시피 이분은 여길 영영 떠나려 하시는군요.

그래서 말씀인데, 이 화창한 아침에 잠시라도 같이 걸으며 힘을 보태드리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요.'

자비는 대답을 하면서도 두 번째 이유만큼은 꽁꽁 감춰두고 드러내지 않았네.

 

소심댁은 토라져서 말했지.

'알만하군요. 댁도 어리석은 짓을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네요.

하지만 때를 잘 살피세요. 슬기롭 게 구시고요.

위험과 떨어져 있으면 위험할 일이 없죠.

하지만 위험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만사가 다 위험할 테니까요.'

 

그렇게 소심댁은 집으로 가버렸고, 크리스티아나는 길을 떠났지.

그런데 소심댁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이웃들을 불러 모았다네.

'머뭇댁', '조급댁', '경박댁', '무지 부인' 같은 아낙들이지.

손님들이 다 모이자,

소심댁은 크리스티아나와 순례여행 이야기를 꺼내놓았네.

그이가 말문을 열었어.

 

'이웃 아주머니들, 내 말 좀 들어보시구려. 오늘 아침에는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크리스티아나 씨네 집으로 찾아갔었다우. 

가서 현관문을 똑똑 두드렸어요.

알다시피, 여기선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안에서 대꾸하더군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으면 들어오 라든가?

당연히 들어갔죠.

잘 지내겠거니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이 고장을 뜰 채비를 차리고 있지 뭐?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요.

제가 물었어요.

왜 이러느냐고요.

아니 글쎄, 순례여행을 떠 날 작정이라는 거예요.

그 댁 바깥양반처럼 말이죠.

간밤에 꿨다는 꿈 얘기도 합니다.

남편이 가 있는 그 나라의 임금님이 그쪽 으로 오라는 초대장을 보냈더래요.

 

그러자 무지 부인이 물었다네. 

'댁의 생각은 어때요? 

정말 갈 까요?'

 

소심댁 

'가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말 거예요. 

집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을 요량으로 온 힘을 다해 설득했거든요. 

길을 가다가 당하게 될 온갖 어려움 같은 얘기를 해준 거죠. 

그런데 그게 다 나그넷길에 들어서도록 북돋는 소리가 되고 말았어요.

별의별 말을 다 하더라고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죠, 아마?

음, 그리고 비탈이 가파를수록 내려가는 기분이 한결 달콤하게 마련이라고도 했어요.

그것만 봐도 각오가 얼마 나 단단한지 딱 알겠더라고요.'

 

머뭇댁 

'앞뒤 분간 못하는 멍청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남편이 죽을 고생을 한 걸 뻔히 알고도 깨달은 바가 전혀 없으니 장담 하지만, 남편이 다시 돌아온다면 사지가 멀쩡한 데에 만족하며 편히 쉴 거예요.

다시는 얻는 것 하나 없이 수없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겁니다.'

 

조급댁은 맞장구를 쳤다네. 

'그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바보들은 마을에서 사라져야 해요. 

제가 보기엔, 크리스티아나가 가버리는게 더 낫습니다.

그런 속마음을 품고 여기서 그대로 살아간다면, 누가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어요?

그런 여자라면 아둔하거나, 이웃과 어울릴 줄 모르거나, 지혜로운 이라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부류의 이야기만 하고 다니겠죠.

그러니 저로서는 그 여자가 떠난 게 조금도 유감스러워할 일이 아니네요.

갈 테면 가라고 하세요.

더 나은 인간을 그 집에 들이면 되죠.

그런 별종 바보들이 사는 탓에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 거라고요.'

 

경박댁도 거들었어. 

'자자 그따위 얘기는 이제 그만 집어치움시다.

저는 말입니다, 어제 '방탕 마담'한테 갔었어요.

너나없이 어린 계집애들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워했지요.

거기 누가 있었는지 아세요?

저랑 '육욕 부인' 말고도 서넛이 더 있었어요.

'호색 씨'랑 '외설댁'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있었고요.

다들 어울려 음악과 춤을 비롯해 기분이 한껏 좋아지는 온갖 일을 즐겼어요.

마담은 상당히 교양 있는 여성이더군요.

호색 씨는 참 잘생긴 신사였고요.'


천로역정 두번째 이야기(존 버니언 지음, 포이에마 출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