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천로역정 1 (天路歷程 1 )

말씀을 뛰어넘는 믿음

w.j.lee 2024. 8. 30. 10:37

말씀을 뛰어넘는 믿음


꿈속에서 둘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신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허풍선' 이라는 사내가 길 한쪽에 붙어 걷는 걸 보았다.

언젠가부터 여럿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날 수 있을 만큼 길이 넓어져 있었다.

허풍선은 가까이서보다 조금 거리를 두고 볼 때 훨씬 훤칠하고 잘나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신실은 허풍선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거룩한 나라로 가시나요?"

 

"예, 말씀하신 데까지 갑니다." 

허풍선이 대답했다.

 

"잘됐군요.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신실이 초대했다.

 

"길동무로 받아주신다면 저야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허풍선은 반색을 했다.

 

"그럼 됐네요. 이리 오셔서 선한 일에 관한 이야기 나누면서 시간을 보냅시다."

 

허풍선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선한 일에 관해 대화하는 게 얼마나 유익한지 알고 계신 분들과 만나게 돼서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여행을 하면서 선한 일을 화제로 삼아 의견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려 하겠습니까?

그저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기 일쑤죠.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상해 못 견디겠습니다."

 

신실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죠.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혀와 입을 보람 있게 쓸 수 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과 함께 걷다니, 벌써부터 신이 납니다."

허풍선은 따듯하게 대꾸했다.

 

“선생의 말씀에는 확신이 넘치는군요.

굳이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일을 두고 대화할 때만큼 유익하고 유쾌한 게 없습니다.

아울러 역사나 사물의 신비, 기적, 표적과 경이로운 사건들을 알고 싶으면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만큼 멋진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다시없을 테니까요."

 

신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요. 하나님의 역사를 더듬는 데 신경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눠서 대화를 통해 유익을 얻으려는 소망을 품어야겠지요."

 

허풍선도 무릎을 치며 거들었다. 

"동감입니다. 이득으로 치자면 그런 대화가 단연 으뜸이죠.

세상일은 다 헛되며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게 유익하다는 따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거든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든지, 인간의 행위로는 충분치 않다든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필요가 있다든지 하는 지식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믿고, 기도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도 대화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복음에 엄청난 언약과 위안이 담겨 있음을 알고 거기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릇된 견해를 반박하고, 진리를 지키며,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속이 다 후련합니 다." 

신실이 말했다.

 

허풍선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들을 자주 나누지 않으니까 믿음이 대단히 중요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심령 가운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그토록 드문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율법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아는 지식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거나 거기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신실이 덧붙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허풍선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니까요. 

결국 모든 게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성경말씀을 찾자면 적어도 백 개는 될 겁니다."

 

"음, 그러면 이제 무슨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까요?"

신실이 물었다.

 

"뭐든지 내키는 주제를 골라보세요." 

허풍선은 흔쾌히 말했다.

 

"하늘나라의 일이든 세상일이든, 도덕적이든 복음적이든, 거룩하든 불경스럽든, 과거든 미래든, 국내의 일이든 외국의 문제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유익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난 상관없 습니다."

 

허풍선의 말에 깊이 매료되기 시작한 신실은 몇 걸음 따로 떨어져 걷고 있는 크리스천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길벗을 만난 듯합니다. 대단한 순례자가 될 것 같지 않습 니까?"

 

얘기를 듣고 난 크리스천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형제님이 깜빡 넘어간 저 친구 정도라면 노련하게 혀를 놀려서 속모르는 이들 스무 명쯤은 넉넉히 구슬릴 수 있을 겁니다." 

 

"저이를 아세요?" 

신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느냐고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어쩌면 저 양반 자신보다 더 잘 알걸요?"

 

"어서 얘기해보세요. 저 양반은 어떤 인물입니까?" 

신실이 재촉했다.

 

크리스천은 설명을 시작했다. 

"허풍선이라는 친굽니다. 

우리랑 같은 지역 출신인데 저 양반을 처음 본다니 놀랍군요.

하긴, 우리가 살던 도시가 좀 커야 말이죠."

 

"어느 댁 자제지요? 구체적으로 어느 동네에 살았어요?" 

신실은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허달변 이란 자의 아들이고 주저리가에 살고 있어요.

거기 가서 허풍선을 찾으면 삼척동자도 다 알아요.

말은 그럴싸하지만 됨됨이는 형편없는 인간이죠."

 

"그렇군요. 아주 점잖은 양반인 줄 알았는데..."

신실은 입맛을 다셨다.

 

크리스천은 쐐기를 박았다. 

"실체를 모르는 이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죠. 

멀리 떨어진 동네에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처신하지만 집 근처에선 그런 망나니가 없어요. 

형제님이 저 친구한테 깊이 감동을 받고 썩 괜찮은 인물로 생각하는 걸 보니까 멀리서 보면 아주 매력적인데 가까이 다가서면 조잡하기 짝이 없었던 어느 화가의 그림이 떠오르는군요."

 

"웃음기가 입가에 가득하시네요. 괜히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신실이 물었다.

 

크리스천은 펄쩍 뛰며 대답했다. 

"미소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누굴 헐뜯는 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근거 없이 욕하는 게 아닙니다. 

저 친구의 진짜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얘길 하나 더 들려드리죠. 

허풍선은 누구와도 동행이 되고 무슨 얘기 든 다 할 수 있는 작자입니다. 

지금 형제님에게 했던 말을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똑같이 하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들이켜면 들이켤수록 더 말이 많아지겠죠.

마음에도, 집에도, 대화 속에도 신앙이 깃들 여지는 없습니다.

모든 게 그저 말뿐입 니다.

신앙도 쉴 새 없이 주절거릴 때나 입에 올릴 겁니다."

 

"맙소사! 그렇다면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갔던 셈이군요."

신실이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형제님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철석같이 믿었을 겁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마 23:3)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고전 4:20) 있습니다.

기도와 회개, 믿음과 거듭남에 대해 온갖 얘기를 늘어놓지만 저 친구가 아는 건 그럴듯하게 말하는 법뿐입니다.

오랫동안 그 집 식구들과 왕래하며 지냈고 허풍선이 집 안팎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꾸준히 지켜봐왔기에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 친구의 집에 가봐도 진정한 신앙이라곤 전혀 없어요. 

마치 계란 흰자 같아서 무덤덤하기 짝이 없지요. 

기도도 없고 죄를 회개한 흔적도 없어요.

차라리 들판에 놓아기르는 황소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길 거예요.

참다운 신앙을 가리는 얼룩이고, 오점이고, 수치인 셈이죠.

속내를 아는 이들 가운데는 저 작자를 칭찬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롬 2:24-25)

 

실상을 본 사람들은 '밖에서는 천사지만 집에서는 악마' 라고 입을 모으죠.

불쌍한 식구들은 허풍선이 얼마나 난폭한지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례한지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고함을 지르며 날뛴답니다.

집 안에서 부리는 일꾼들에게도 공연히 제 몫을 못한다느니,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느니 드잡이를 하기 일쑤라더군요.

다만 얼마라도 돈거래를 해본 이들은 사기꾼과 동업을 하는 편이 낫다고 혀를 찹니다.

살살 꼬드겨서 재물을 빼내는 재주라면 허풍선이 협잡꾼보다 더 악독하고 흉악범보다 훨씬 뛰어나답니다.

 

더 끔찍한 점은 이 작자가 자식들을 자기랑 똑같이 키우고 있 다는 거예요. 

아들딸 가운데 누구라도 따듯한 마음을 품으려는 기색이 보이면 멍청이, 돌대가리라고 부르고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주곤 하죠. 

내가 보기엔 남들에게 딴죽을 걸고 넘어트리는 데 사악한 삶 전체를 바친 게 아닌가 싶어요."

 

"말씀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신실이 말했다. 

"형제님 이 저 친구를 알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형제님이 나쁜 마음을 품고 중상모략을 하거나 험담을 늘어놓을 리가 없으니 내게 주신 경고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요."

 

크리스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허풍선을 처음 만났더라면 나라도 호감을 가졌을 거예요.

참다운 신앙을 헐뜯는 무리가 저 친구에 관해 구린내 나는 얘기를 했다면 괜히 헐뜯는 소리쯤으로 치부했겠죠.

사악한 인간들이 신앙을 가진 이들을 핍박하는 일이야 워낙 흔하니까요.

하지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데다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한테서까지 저자와 얽힌 수치스러운 소문을 들은 터라 이처럼 한 점 망설임 없이 못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말과 행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거군요." 

신실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말과 행동의 차이를 더 주의 깊게 살펴야겠어요."

 

"다르다마다요." 

크리스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영혼과 몸이 제각각인 거나 마찬가지죠. 

영혼이 없는 몸은 생명이 없는 살덩이나 매한가지잖아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도 똑같아요.

신앙의 핵심은 실천에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 (약 1:27. 22-26)이라는 말씀을 몸소 실행에 옮기는 거죠.

허풍선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어요.

잘 듣고 입으로 능란하게 설명할 줄 알면 훌륭한 크리스천이 된다고 믿은 거예요.

자기 영혼을 기만한 셈이라고 할까요?

잘 들어야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마음밭에 떨어지는 건 맞아요.

하지만 말만 가지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걸로는 그 씨앗이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긴 힘들답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누구 나 열매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마 13장: 25장)

너나없이 '네가 믿느냐?'가 아니라 '행했느냐, 아니면 그저 말만 했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는 뜻이죠.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내려지겠죠.

마지막 때를 흔히 추수와 비교 하잖습니까?

알다시피 추수철의 관심사는 열매뿐입니다.

결실이 있으면 가짜도 진짜로 봐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마지막 심판 날에는 허풍선의 고백이 얼마나 시덥지 않은지 낱낱이 드러날 거란 말입니다."

 

"형제님 말씀을 들으니 정결한 짐승에 관해 모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레 11장: 신 14장)

신실이 말했다.

"발굽이 갈라지거나 되새김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두 조건에 모두 맞아야 정결하다고 했잖아요.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만 발굽이 갈라져 있지 않으니 부정하죠.

허풍선도 비슷해요.

지식을 좇아서 말씀을 되새김질하지만 발굽이 갈라져 있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죄인의 길에서 갈라서지 않았다는 얘기죠.

토끼가 그런 것 처럼 저 양반도 개나 곰과 같은 발을 가졌으니 당연히 부정할 수밖에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만, 복음서의 본문을 제대로 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천이 단언했다. 

"덧붙이자면, 바울은 말만 잘하는 이들을 일컬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와 다 름없다고 했어요.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뿐이라고 지적한 적도 있어요. (고전 13:1-3 , 14:7) 방언이나 천사의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어요.

참다운 믿음도, 복음의 은혜도 없는 거죠.

결국 이런 이들은 생명의 자녀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에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처음 말을 섞을 땐 몰랐는데 지금은 아주 넌덜머리가 납니다.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요?"

신실은 몸서리를 쳤다.

 

"내가 일러드리는 대로 해보세요. 하나님이 저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서 바꿔주시지 않는 한, 저편에서도 형제님과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될 거예요."

크리스천이 제안했다.

 

“어떻게 할지 말씀해주세요." 

신실이 부탁했다.

 

"가서 신앙의 능력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하세요. 

백이면 백, 허풍선은 맞장구를 치고 나설 겁니다. 

그럼 마음에서, 가정에서, 행동에서 그 능력이 진정으로 역사하고 있는지 단도직입 적으로 물어보세요."

 

신실은 반대쪽으로 건너가서 다시 말을 걸었다. 

"좀 어떠세요?" 

 

"아주 좋아요. 고맙습니다." 

허풍선이 대답했다. 

 

"이제 정말 멋진 얘기들을 나눠볼까요?"

신실이 제안했다. 

"괜찮으시면 대화를 계속하죠.

아까 말을 맺으면서 나더러 마음껏 화제를 정해보라고 하셨죠?

평소에 궁금해 하던 문제가 있었어요.

누군가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밖으로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허풍선이 나섰다.

"능력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말씀이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거기에 답을 드릴 수 있어서 참 기쁘군요.

간단히 핵심만 얘기하겠습니 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죄와 격렬히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둘째로.."

 

신실은 말을 막고 나섰다. 

"잠깐만요. 선생의 말씀을 한 번 더 짚어봅시다. 

내 생각에는 '심령이 죄를 극도로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표현하는 게 타당할 것 같군요."

 

"죄와 충돌하든 끔찍이 싫어하든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만.” 

허풍선이 토를 달았다.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죄를 혐오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는 죄와 충돌하면서 진저리 치도록 혐오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강대상에서는 침을 튀겨가며 죄를 성토하지만 마음과 집, 생활방식에서는 좀처럼 떨쳐내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디발의 아내만 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인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요셉에게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함을 쳤던 것과는 달리 요셉을 유혹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았습니까? (창 39:15)

딸아이에게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 못 된 계집애라고 부르며 잡도리하던 엄마가 금방 태도를 바꿔서 아이를 껴안고 뽀뽀를 해대는 짝입니다."

 

"대단찮은 일로 트집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허풍선은 미심 쩍은 얼굴로 물었다.

 

신실이 대꾸했다. 

"천만에요. 

그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뿐 입니다. 

은혜가 심령에 역사하시는 걸 알 수 있는 두 번째 방법 이 뭐라고 하셨죠?"

 

"복음의 신비를 꿰뚫는 풍성한 지식입니다." 

허풍선이 말했다. 

 

신실은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다들 지식을 첫 번째 표지로 여기죠. 

하지만 처음으로 보든 끝으로 보든 잘못된 생각이긴 매 한가지입니다. 

은혜의 역사에 영혼을 내맡기지 않고도 복음의 신비에 관한 지식은 엄청나게 긁어모을 수 있습니다. (고전 13장)

풍부한 지식을 쌓아도 아무 보람이 없다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3:17)

지식이 아 니라 실천에 축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겁니다.

행동으로 연결되 지 않은 앎은 무의미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않은 종' 이나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만큼이나 많이 알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선생의 주장은 진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앎은 말쟁이나 허풍쟁이들을 즐겁게 하지만 행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지식이 없어도 마음이 선해질 수 있다 는 뜻은 아닙니다.

지식이 없으면 심령이 공허해지니까요.

하지만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껏해야 사물의 이치를 어림짐작해보는 정도의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은혜와 더불어 찾아와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하나님 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지식입니다.

 

첫 번째 지식은 말쟁이들에게 안성맞춤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식이 성실한 실천으로 이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까지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겁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법을 살펴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지키겠습니다'(시 119:34) 라는 고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죠."

 

허풍선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교양 없게시리 또 생트집을 잡으시는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가 마음에 역사하시는 걸 알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보십니까?" 

신실 은 다그치듯 물었다.

 

"관둡시다. 말해봐야 또 트집이나 잡을 거면서..." 

 

"못하시겠다면 내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든가. 뭐든지 얘기해보시구려.” 

허풍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신실이 설명을 시작했다. 

"심령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는 그 은총을 품고 있는 이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대로 역사하면, 때 묻은 본성과 불신을 자각하게 되면서 스스로 죄인이라는 뼈아픈 의식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손에서 자비를 찾지 못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거죠. (요 16:8; 롬7:24; 요 16:9; 막 16:16)
마음속에 이처럼 새로운 깨달음이 자리 잡으면 곧 죄에 대한 아픔과 부끄러움이 밀려오지만 그게 끝은 아닙니다. 

곧이어 세상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분께 매달려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감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단단히 붙잡는 순간, 새로 깨어난 심령은 말씀에 약속된 그대로 구세주를 향해 점점 더 깊은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시 38:18: 렘 31:19: 갈 2:16: 행 4:12: 마 5:6; 계 21:6)

이제 구세주를 믿는 믿음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 주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 오로지 그분만을 섬기려는 마음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죄인들도 어렴풋이나마 은혜의 역사를 알아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 '아, 이게 바로 은총의 힘이구 나!'라고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품은 세상에 속해서 철저히 더러워졌고 이성 역시 한결같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받아 가진 이들에게도 건전한 판단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것이 은혜의 역사라고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역사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드러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롬 10:10; 빌 1:27; 마 5:19)

둘째로, 그 고백에 합당한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경건한 마음, 경건한 가정 (결혼해서 살림을 꾸렸다면), 세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말과 행실 따위를 통해 표현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죄, 그리고 그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집안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며 세상에 나가서도 거룩한 성품을 드러냅니다.

위선자나 말쟁이들처럼 입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믿음과 사랑 안에서 경건 한 삶을 실천해 보이는 겁니다. (요 14:15:시 1:2-3; 욥42:5-6; 겔 20:43)

 

은혜의 사역과 그 역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간략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 없다면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허풍선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몫은 토를 다는 게 아니라 잠자코 듣는 쪽인 것 같습니다. 자, 두 번째 질문을 해보 시죠."

 

신실은 말을 이었다.

"여태 말씀드린 일들을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선생이 알고 있는 진리가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나요?

아니면 마음에 품은 신앙을 몸으로 입증해 보이지 못하고 그저 말에 그치는 수준인가요?

 

대답하시려거든 부디 하나님께서도 '아멘!'이라고 말씀하실 만한 이야기를 하도록 신경을 써주십시오. 

양심에 거리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세요.

성경에도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주는 사람' (고후 10:18)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행실로 드러나는 모습과 이웃들의 평가는 전혀 딴판이지만, 어쨌든 난 이러저러하게 믿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건 구역질 나는 짓입니다.”

 

허풍선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낯빛을 재빨리 감추며 대꾸했다.

"이제는 경험과 양심, 하나님까지 들먹이는군요.

그분께 기대어 여태 했던 얘기를 합리화해볼 셈인가요? 

이건 내가 기대했 던 식의 대화가 아니에요. 

그따위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쪽이 교리교사 노릇을 집어치우지 않는 한, 거기에 답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무슨 선생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댁을 내 재판관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하지만 왜 나한테 그따위 질문들을 퍼붓는지는 궁금하네요."

 

신실은 한 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선생을 보면 말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 말을 뒷받침할 무언가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말이 전부인지 알고 싶어서요.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다 말씀드리자면, 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요.

말뿐인 신앙을 가졌으며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과 행동은 백팔십도 다르다고들 하더군요.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꼴이라는 말도 있었어요.

댁의 경건치 못한 행실 때문에 참다운 신앙인들까지 욕을 먹는다는 거죠.

선생의 그릇된 행실 탓에 이미 실족한 이들이 적지 않고 댁을 본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이들도 수두룩하다던걸요?

술집, 탐욕, 부정,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 거짓말, 나쁜 친구들을 비롯해서 갖가지 고약한 것들과 뒤범벅이 되어 지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물을 다 흐린다는 얘기가 헛말이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선생은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할게요!"

 

"남들이 지껄이는 그따위 말에 쉬 넘어가서 남을 함부로 판단 하는 걸 보니, 애당초 나쁜 뜻을 품고 있었거나 속이 배배꼬인 양반인 모양이구려. 

깜냥이 안 되는 상대와 말 섞을 필요가 없을 터, 이만 헤어집시다! 잘 가시오!"

허풍선은 불쾌한 듯 내뱉 었다.

 

다시 신실과 나란히 걷게 된 크리스천은 믿음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죠?

형제님의 말과 허풍선의 정욕은 절대로 어울릴 수가 없어요.

일찍이 말씀드린 그대로, 저 친구는 제 삶을 고치기보다 동행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그냥 가게 버려두세요.

그래봐야 저만 손해죠.

억지 로 떼어내는 수고를 덜어줬으니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 다.

계속 함께 걸었더라면 형제님과 나누는 교제를 망쳐놓았을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고 했을 거예요."


신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풍선과 잠시나마 대화를 나눠서 참 기뻐요. 

저 양반도 내 말을 한번쯤 곱씹어보겠지요. 

그토록 분명하게 일러주었으니 설령 멸망의 길로 들어간다 하더 라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크리스천이 거들었다. 

"대놓고 이야기한 건 참 잘한 일이에요. 요즘은 누군가를 그처럼 성실하게 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명명백백하게 도전하지 않으니까 신앙을 불쾌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입으로는 진리를 부르짖지만 행동은 방탕하고 허탄하기 짝이 없는 수다쟁이 멍청이들이 넘쳐나니까요.

허풍선 같은 친구들이 경건한 이들 틈에 끼어 한데 어울리게 되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어요.

교회도 신망을 잃게 되고 진실한 순례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지겠지요.

저런 부류를 만났을 때 다들 형제님처럼 대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럼 태도를 바꾸거나 성도들과 교제하는 걸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꽁무니를 뺄 테니까요."


신실은 흥겹게 노래했다.

 

애당초, 허풍선은 얼마나 깃털을 곤두세웠던가!

얼마나 당당하게 이야기했는가!

얼마나 건방지게 굴었는가, 닥치는 대로 깔보면서!

그러나 신실이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하자,

보름 넘긴 달이 이울듯, 한없이 작아졌네.

마음의 변화를 모르는 이들은 너나없이 그리 되리라.

 

크리스천과 신실은 그동안 보았던 온갖 일들을 이야기하며 꾸준히 걸었다.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길이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혼자 걸었더라면 절대로 누릴 수 없었을 즐거움이 었다.


출처 :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포이에마 출판  )

'쉼터 > 천로역정 1 (天路歷程 1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을 위해 시험을 받다  (2) 2024.08.30
'신실'이라는 이름의 길벗  (3) 2024.08.29
순례자의 커다란 괴로움  (0) 2024.08.21
이 책에 대한 변명  (0) 2024.08.19
천로역정 1 서문  (0) 2024.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