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천로역정 1 (天路歷程 1 )

이 책에 대한 변명

w.j.lee 2024. 9. 24. 12:20

이 책에 대한 변명

글을 쓰려고 처음 펜을 잡았을 때만 해도
이처럼 변변찮은 책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실은, 다른 작품에 착수해서 거의 다 마쳐갈 무렵 

어찌어찌해서 집필을 시작하게 됐다.

 

형편이 그러하다 보니,
요즘과 같은 복음 시대에
성도들이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록하려던 글이
돌연히 그들의 여정, 곧 영광을 향해 가는 노정에 관한 우화로 변했으며 

애초에 스무 편이 넘는 글을 마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많은 글들이 더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다시 가지를 치기 시작하면서 

마치 숯불에서 튀어오른 불티처럼 어지러이 흩날렸다. 

뿐만 아니라, 그처럼 빠르게 불어나는 걸 마냥 내버려뒀다가는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기왕에 써두었던 글들까지 다 잡아먹고 말 것만 같았다.

 

자, 그렇게 해서 글을 완성하긴 했지만,
펜을 들어 써내려간 이 작품을
이런 식으로 온 세상에 내보일 작정은 아니었다. 

몰랐던 점을 알아보려는 뜻이었을 뿐
이웃에게 즐거움을 준다든지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마음은 전혀, 전혀 없었다.

 

잡꾼이나 긁적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메우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죄를 짓게 만드는 악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에서 

이 일을 벌였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기분으로 종이에 펜을 올려놓자마자

금방 생각이 명료해졌다.

어떻게 목표를 이룰지 결정한 뒤로는

그 길을 좋았으며 이끌리는 대로 써내려갔고,

결국 지금 보고 있는 길이와 넓이, 규모의 책을 완성했다.

 

매듭을 짓고 난 뒤, 나는 이 책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나무라는지, 아니면 잘했다고 인정해주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어떤 이들은 살리라고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죽이라고 했다.

더러는 존, 어서 책으로 펴내게 라고 했고, 더러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별로라는 축도 있었다.

 

곤란했다.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의견이 이토록 엇갈린다면 일단 책을 내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어떤 이들은 출간하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래선 안 된다고 하니,

어느 편이 가장 좋은 충고를 해주고 있는지 알아보자면 

책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출판하라는 이들을 외면하고 반대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면, 

책을 바라는 이들이 얻을 큰 기쁨을 가로막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기분 상하게 할 뜻은 없지만, 다른 형제들이 원하고 있으니

판단을 보류하고 좀 더 지켜보자고.

 

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두시라.

살코기를 선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갈비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나로서는 달래고 설득할 수밖에 없다.

런 스타일의 글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일까?

목표를 잃지만 않는다면, 어떤 식이든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러니 말아야 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흰구름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먹구름이 소나기를 쏟아붓는다.

흰구름이든 먹구름이든 은빛 찬란한 물방울을 떨어트리면

대지는 곡식을 맺어 두 구름을 모두 기릴 뿐, 어느 쪽도 책망하지 않으며, 

양쪽이 어울려 빚어낸 결실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처럼 두 구름이 열매 가운데 한데 섞여 있으므로, 

따로 떼어 구별할 수 없다.

굶주린 대지는 어느 구름이든 달게 받아들이지만, 

배가 부르면 이쪽저쪽 가리지 않고 다 토해내는 바람에 

구름이 베푸는 축복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낚시꾼이 물고기 잡는 걸 지켜보라!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가? 얼마나 기발한 방법을 쓰는지 보라! 

미끼와 낚싯줄, 낚싯대, 바늘에 그물까지 동원하지만

물고기를 잡아주는 건 바늘도, 줄도, 미끼도, 그물도, 낚싯대도 아니다. 

더듬어 찾고 단단히 움켜쥐지 않으면,

제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

 

들새 사냥꾼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서 사냥감을 노리는 걸 보라! 

총, 그물, 끈끈이를 바른 나뭇가지, 등불, 방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방법을 쓴다.
엎드려 기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누구라서 그 자세를 일일이 설명할 수 있으랴?

 

하지만 별의 별 수법을 다 쓴다 해도

탐나는 목표물을 반드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들새를 잡으려면 피리나 휘파람을 불어야 하지만,

자칫하면 단번에 날려보낼 수도 있다.

 

진주는 두꺼비 머릿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굴 껍데기 안에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형편없어 보이는 것들에 황금보다 귀한 것들이 담겨 있다면,

혹시 특별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이들을 어떻게 경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사로잡을 장식이 없는 내 보잘것없는 책에도

겉모습은 화사하지만 속에는 공허한 관념뿐인 서적들을

능가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샅샅이 읽어보았지만 댁의 책이 전하려는 내용에 

아직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겠소" 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 무엇이 문제인가?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다 꾸며낸 얘기잖소?"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어떤 이들은 내 책처럼 스스로 지어낸 분명치 않는 글을 통해서

진리가 반짝이게 하며 그 광채가 환하게 빛나게 만든다.

아예 노골적으로 그런 글들은 충실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 글들은 연약한 이들을 실족시키기 십상이지.
비유들이 눈을 가린다는 말이요."
직설적인 쪽이 거룩한 일을 인간에게 전달하기에 적합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유를 쓴다고 해서 반드시 명확성이 떨어지란 법이 있을까? 

예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나 복음서도 상징과 암시, 비유가 아니던가?

 

그렇치만 정산이 엄청한 사람치고 그걸 흠 잡으려는 이가 과연 있겠는가?

가상 고상한 지혜를 공격하려 들겠는가?

그런 리가 없다.

도리어 겸손히 엎드려 성막의 말뚝과 고리, 송아지와 양, 암소와 어린양. 

새와 풀, 그리고 어린양의 피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내려 애쓰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 담긴 빛과 은혜를 깨닫는 이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글이 충실하지 못하며 저속하다고

지나치게 서둘러 결론짓지 마라.

언뜻 분명해 보인다고 해서 정말 분명한 건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해로운 것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심령에 유익한 것들을 죄다 놓쳐버리지 않으려면, 

비유를 사용한 글을 무조건 경멸해서는 안 된다.

 

비록 구체적이거나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내 글은 

깊숙한 데 금을 간직하고 있는 장롱처럼 진리를 담고 있다. 

선지자들은 시시때때로 비유를 써서 진리를 전하곤 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꼼꼼히 살펴본 이들은

진리가 그런 껍질을 쓰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표현양식에서부터 어구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온갖 지혜를 담고 있는 성경 또한 

곳곳에 모호한 인물들과 비유들이 들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그 책에서 광채와 빛의 광선이 나와서 

칠흑 같은 어둠마저 대낮처럼 환하게 바꾸지 않던가?

 

자, 트집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여, 스스로 삶을 돌아보라.

내 책에서 찾아낸 것보다 한결 불투명한 자리가 있지 않은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글에도 최악의 문장이 섞여 있는 법이다.

 

공정한 이들 앞에 선다면 어떨까?
형편없는 글 한 편을 내놓으라. 나는 과감히 열 편을 내놓으리.
겉만 번지르르한 글에 담긴 거짓말보다 내 문장에 담긴 의미를 선택할 것이다.
비록 남루한 보자기에 싸였다 하더라도, 진리는 판단력을 주고 정신을 맑게 한다. 

깨달음을 기뻐하며, 의지를 꺾어 순종하게 한다.

기억에는 즐거운 상상들이 가득해진다.

괴로움을 달래주는 것 역시 진리다.

 

디모데가 건실한 말을 쓰고

나이 든 부인네들의 경박한 소리를 피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근엄했던 바울도 어디서든 비유를 쓰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거기에도 금이나 진주처럼 소중한 보화가 숨어 있어서

지극히 조심스럽게 파고 들어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더 하겠다.

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마음이 불편한가?

글에 다른 옷을 입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하는가?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이는 게 필요했는가?

그렇다면 세 가지 변명을 하겠다.

그리고 더 나은 분들의 판단을 들어본 뒤에 합당하다면 기꺼이 순종하겠다.

 

첫째로, 내 방식대로 글을 쓰는 게 잘못됐다고 판단할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어휘라든지 내용, 또는 독자들을 함부로 다룬 적이 없으며 

인물이나 상징을 끌어다 쓰면서 조악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이미 말한 바처럼, 비평가들에게 거부당한 이런저런 방식으로 

진리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애썼을 따름이다.

(그런 표현양식으로 지금 살아 있는 어떤 이들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이들의 본보기도 수두룩하다.)

 

둘째로, 여러분들만큼이나 고상한 이들도 대화체를 즐겨 썼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표현했다고 해서 그들을 천박하게 보는 눈길은 전혀 없었다.

진리를 욕보였다면 그 작가는 물론,

그런 뜻으로 사용한 기술 역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진리를 자유롭게 해서 여러분과 내게 전달하는 기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이다.

인간에게 쟁기질을 처음 가르쳐주신 분보다 더 능숙하게 

마음과 펜을 인도해주실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은 비천한 것들을 이끌어서 거룩하게 하신다.

 

셋째로, 성경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내세워 다른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기법을 쓴다 하더라도 찬란한 빛줄기가 퇴색하기는커녕,

광선이 더 뻗어나가 한낮의 햇빛처럼 밝아진다.

 

이제, 펜을 내려놓기 전에 이 책의 유익한 점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그러고 나서, 강한 자를 끌어내리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여러분과 이 책 모두를 맡길 작정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영원한 상급을 쫓는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얼 하지 않고, 무얼 하는지, 어떻게 달리고 또 달려서 영광의 문에 이르게 됐는지 보여준다. 

또한 마치 금방이라도 영원한 면류관을 얻을 것처럼 

서둘러 인생길을 달려간 이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애쓴 보람도 없이 그들이 어리석게 죽어가는 까닭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여러분을 불러내서 나그네로 만든다.

여기에 실린 조언에 따르면 곧바로 거룩한 땅을 향하게 될 것이다.
어데로 가는지 방향을 제대로 가늠한다면.
게으른 이는 부지런해지고, 눈 먼 이들도 즐거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진귀하고 유익한 걸 원하는가?

우화 속에서 진리를 보고 싶은가?

건망증이 심한편인가?

그런데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그믐까지 절대 잊지 않을 이야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 기발한 이야기를 읽어보라.

마치 도꼬마리처럼 단단히 달라붙어 의지가지없는 이들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대화체로 되어 있어서 무심한 이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진기한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건전하고 진실한 복음의 특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가? 

유치하지 않으면서 유쾌해지고 싶은가? 

수수께끼를 읽으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 싶은가? 

아니면 깊은 묵상에 빠져보고 싶은가?

살코기 한 점 뜯는게 좋은가?

아니면 구름을 탄 이를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은가?

잠들지 않은 채 꿈을 꾸고 싶은가?

환하게 웃으면서 동시에 눈물 흘리며 울고 싶은가?

넋을 잃었다가 악한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고 싶은가?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한 장 한 장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자신을 살피며 과연 축복을 받은 백성인지 알아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서 오라, 이 책의 세계로.-

존 버니언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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