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천로역정 1 (天路歷程 1 )

복음을 위해 시험을 받다

w.j.lee 2024. 8. 30. 14:01

복음을 위해 시험을 받다


광야를 거의 다 지났을 무렵, 신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 열심히 쫓아오는 걸 보았다.

크리스천과 신실을 알아보고 따라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신실이 영적인 형제에게 말했다.

"저기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크리스천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 전도자로군요. 나랑 아주 가까운 친구예요.'

 

"그렇군요. 나와 절친한 벗이기도 하죠." 

신실은 반색을 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준 사람이 바로 저분이거든요." 

 

전도자는 두 순례자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와주셨던 모든 분들도 평안하시길 빕니다.”

 

"어서 오세요, 전도자님!"

크리스천은 큰 소리로 인사했다.

"다시 뵙게 되니, 지난날 친절을 베푸시고 영원한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성실하게 애써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신실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처럼 가련한 순례자들에게는 전도자님 같은 길벗과 동행하는 게 얼마나 신나고 매력적인 일인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전도자는 둘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번에 헤어진 뒤로 무슨 일들을 겪으셨나요. 

어떤 상황과 맞닥트리고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합니다.”

 

크리스천과 신실은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무슨 일들이 있었으며 그때까지 어떤 어려움들을 헤쳐 나왔는지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참으로 행복하군요."

전도자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시험을 당해서가 아닙니다.

그걸 이겨내고 승리자가 되었으며 수많은 약점을 가졌고 허다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건 두 분뿐만 아니라 내게도 정말 기쁜 일입니다.

나는 씨를 뿌렸고 여러분은 열매를 거뒀습니다.

뿌린 이와 거둔 이가 함께 기뻐하는 날이 올 겁니다.

두 분이 끝까지 견디고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것입니다.' (요 4:36: 갈 6:9)

영원히 변치 않는 면류관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힘껏 달리 십시오. (고전 9:24-27)

 

면류관을 차지하러 떠나서 제법 멀리까지 갔다가 뒤따라온 경쟁자들에게 승리를 뺏기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계 3:11)

여러분은 아직 마귀의 사정권 안에 있습니다.

죄와 싸우면서 죽기까지 저항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굳게 믿으십시오.

무엇이 됐든지 영원한 생명에 맞서는 것들이 여러분의 중심에 스며들지 않게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마음을 살펴서 틈틈이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정욕을 물리치십시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 (렘 17:9)이기 때문 입니다.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십시오.

하늘과 땅의 권세가 모두 여러분들 쪽에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권면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전도자가 선지자임을 깨달은 두 순례자는 더 많은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앞으로 여행을 계속해나가면서 부닥치게 될 시험들에 맞서고 또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전도자는 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들이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수많은 고난을 당해야 하며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 결박과 시련이 기다린다는 복음서의 말씀을 들어봤을 겁니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아무런 고통 없이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낸 터라 잘 아시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고난과 마주할게 확실합니다.

 

이제 광야를 거의 벗어났으니 조만간 길 끄트머리에 다음에 들어갈 마을이 나타날 겁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원수들이 죽일 작정을 하고 덤벼들 테고 결국 뜻을 이룰지도 모릅니다. 

두 분, 적어도 어느 한쪽은 믿음을 피로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면 하늘나라의 임금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겁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거기서 죽는 편이 남는 쪽 보다 훨씬 낫습니다. 

살아남은 이처럼 남은 길을 가면서 끔찍한 일들을 겪지 않고 곧장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간 뒤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거든 여태 말씀드린 일들을 기억하십시오. 

사나이답게 당당하게 처신하십시오.

힘겹게 씨름하며 올바른 일을 하는 내내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께 영혼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을 지으신 신실하신 창조주를 잊지 마십시오."

 

꿈에서 보니 두 순례자는 광야의 끝자락, 도시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 

'허망' 이란 동네였는데 1년 내내 '허망시장' 이란 큰 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허망이란 이름이 붙은 건 장이 서는 마을 전체가 그저 쓸데없고 헛된 물건에 만 관심을 쏟는 탓이었다. 

장터에서 사고파는 물건도 죄다 아무 짝에도 못쓸 무가치한 상품들이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장: 2:11; 17장: 11:8; 사 40:17) 라는 옛말 그대로였다.

허망시장은 요즘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옛날 고릿적에 세워져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 고 있었다.

역사와 기원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대략 5천 년 전쯤, 크리스천과 신실처럼 새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허망시를 지나간다는 걸 알게 된 바알세붑과 아볼루온, 군대마귀는 졸개들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고 1년 365일 쉬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상품을 사고파는 장을 열었다.

 

집, 땅, 직업, 위치, 명예, 계급, 직함, 마을, 왕국, 정욕, 쾌락은 물론이고 매춘부, 외설적인 놀이, 아내, 남편, 아이들, 주인, 종, 생명, 피, 몸, 영혼, 은, 금, 진주, 귀중한 보석 류 따위의 눈길을 끄는 상품들을 빠짐없이 내놓았다.

이뿐 아니라 장터에 가면 사시장철 저글링, 야바위, 게임, 놀이, 꼭두각시놀음, 원숭이놀음, 도박, 사기 따위를 볼 수 있었다.

또 도둑, 살인범, 바람둥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사형언도를 받게 하는 거짓증인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규모가 작은 시장에도 구획을 나누어 적절한 상품을 취급하는 것처럼, 허망시장 역시 판매되는 물품을 기준으로 구역과 상가, 거리(나라와 왕국들)를 잘 구분해놓고 있었다. 

영국거리, 프랑스거리, 이탈리아거리, 스페인거리, 독일거리에서 갖가지 헛것들 을 팔고 있었다. 

어느 시장에나 주력상품이 있는 법인데 허망시장도 그랬다.

여기서는 로마에서 만든 상품들을 내세우고 각광을 받았으며 영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만 거기서 만든 제품들을 탐탁잖게 여겼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시끌벅 적하게 장이 열리고 있는 이 도시를 지나가야 했다. 

거기를 피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순례자들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고전 5:10) 했다.

왕의 왕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 이 동네를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주님을 붙들고 무가치한 잡동사니를 사라고 권했던 인물은 시장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바알세붑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작자는 그분에게 시장을 두루 보여주고 나서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기만 하면 주인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다. (마4:8; 눅 4:5-7)

은총을 입으신 주님을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며 순식간에 세상 모든 왕국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분은 지극히 고결하시므로 어떻게든 유혹해서 그 영광을 더럽히고 헛 된 상품들을 팔아먹을 속셈이었다.

하지만 왕의 왕께서는 쓸모 없는 잡동사니들에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으며 단 한 푼 도 낭비하지 않고 그 마을을 떠나셨다.

 

허망시장은 크고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역사 깊은 시장이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크리스천과 신실은 이 장터를 지나가야 했다.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거리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

시장에 나왔던 이들의 관심이 일제히 두 순례자에게 쏠렸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둘은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과 차림새가 전혀 달랐다.

시장에 나왔던 이들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크리스천 과 신실을 쳐다보았다.

더러는 멍청이들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정신병자라거나 외지인들이라며 소곤대는 이들도 있었다.(고전 2:6-8)


둘째로, 둘의 차림새도 낯설었지만 그곳 주민들에게는 말투가 훨씬 더 거슬렸다. 

크리스천과 신실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세상 말이 아니라 언약의 왕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두 나그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시장 사람들은 너나없이 둘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셋째로, 두 순례자가 시장에 깔린 상품에 눈곱만큼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장사꾼들을 가장 짜증스럽고 헷갈리게 만들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건 물론 이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내보이며 사가라고 소리쳐 부르자 아예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시 119:37: 빌 3:19-20)

그러곤 얻고 싶은 건 저위에 있다는 듯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순례자들의 낯선 행동거지를 지켜보던 상인 하나가 비웃음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뭘 사려고 그러시나?"

 

크리스천과 신실은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진리를 사고 싶습니다."(잠 23:23)

 

그러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장사치들은 한층 노골적으로 순 례자들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놀리고, 비아냥거리고, 비난했으며 두들겨 패주자고 부추기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순례자들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져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질서가 무너졌다.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웠으므로 소식이 금방 시장 책임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저잣거리의 우두머리는 곧바로 현장에 출동하는 한편,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을 보내서 두 순례자를 잡아다 심문하게 했다.

 

부하들은 크리스천과 신실을 체포하고 취조했다. 

심문관들은 두 순례자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이고, 어째서 그렇게 기괴한 차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크리스천과 신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은 순례자며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들인데 본향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히 11:13-16)

아울러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고 구금돼서 순례여정을 계속하지 못할 만큼 주민들이나 장사꾼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공격을 받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물건을 팔려고 잡아끄는 상인들에게 사고 싶은 건 진리뿐이라고 대답한 게 전부라고 했다.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은 심문관들은 크리스천과 신실을 취조 하고 나서 둘 다 정신이 이상한 방랑자나 불량배로서 일부러 시장에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곤 두 순례자를 끌어다가 매질하고 땅바닥에 쓰러트려 흙 투성이로 만든 다음, 우리 안에 가둬서 오가는 이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장터에 들렀던 이들은 너나없이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거나, 내키는 대로 분풀이를 해댔다.

시장의 우두머리는 두 순례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 보며 연신 잔인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크리스천과 신실은 차분하게 견뎌냈다. 

고래고래 상스러운 욕설이나 막말을 내뱉어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대꾸했다.

누가 와서 저주를 쏟아내면 도리어 복을 빌어주었다.

악한 말에는 선한 말로, 상처를 주는 얘기에는 친절한 언사로 응대했다.

비교적 사려가 깊고 속이 뒤틀리지 않은 이들은 두 순례자를 끊임없이 핍박하는 난폭한 무리들을 비판하고 꾸짖었다.

하지만 군중들은 도리어 극렬한 증오심을 보이면서 누구든 역성을 드는 자는 철창에 갇힌 죄인들과 결탁한 배신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례자들을 감싸는 이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형벌을 내 려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성적인 주민들은 자기들이 보기엔 순례자들이 그저 조용하고 정신이 말짱해서 누구한테든 해를 끼칠 만한 사람들이 아니 라고 주장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장사꾼들 중에도 두 나그네 대신 철창에 갇혀야 마땅한 이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가시 돋친 말들이 양쪽 진영을 오가더니 급기야 몸싸움까지 벌어져 여럿이 다치고 깨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두 순례자는 품위 있고 지혜롭게 처신했다.

 

하지만 혼란이 가라앉자 심문관들은 크리스천과 신실을 다시 끌어내서 폭력사태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관리들은 둘을 형틀에 묶어놓고 인정사정 두지 않고 매질한 뒤에, 족쇄를 채 우고 쇠사슬로 꽁꽁 묶어 온 시장에 조리돌렸다.

순례자를 동정 하거나 변호한다든지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이들에게 겁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이런 상황이 진행되는 내내 크리스천과 신실은 지혜롭게 행동 했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모와 비난을 인내하며 온유하게 받 아들였다. 

더러는 그런 모습을 보고 끝까지 순례자의 편을 들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반대파들은 더 화가 나서 철창에 가두고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장사람들을 모욕하고 기만했다는 죄목을 붙여서 사형시키기로 한 것이다. 

크리스천과 신실은 다시 족쇄를 찬 채 철창에 갇혀 집행 날짜가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박해를 받으면서 두 순례자는 줄곧 믿음직스러운 친구 전도자가 이만저만한 고난을 당하고 어찌어찌 될 거라고 일러주었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기운이 나고 온갖 학대를 견디며 상황이 마무리되기를 참고 기다릴 힘이 생겼다.

둘 다든, 어느 한쪽이든 목숨을 잃기까지 고난을 당하는 게 가장 유익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서로 위로했다.

저마다 자신에게 그런 운명이 닥쳤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세상만사를 다 스리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에 맡기고 눈앞의 상황에 만족하며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해주시길 기다리기로 했다.

 

정해진 날이 되자 순례자들은 다시 끌려나와 재판을 받았다. 

심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목적은 단 하나, 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뿐이었다.

크리스천과 신실은 정식으로 고발장을 낸 적들 앞에 섰다.

재판장은 귀족인 '혐선 대감' 이었다.

 

고발장은 형식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똑같았다.

"피고들은 거래를 방해하는 적대세력으로서, 시내에서 난동을 피우고 주민들 사이에 분열을 꾀하였으며, 이곳 임금님이 정한 규정을 짓밟고 몹시 위험스러운 사상을 퍼트려 패거리를 형성하였음."

 

먼저 심문을 받게 된 신실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과 맞섰을 따름이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소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 다. 

한편에 섰던 이들 역시 진실하고 결백한 모습을 보고 더 나은 쪽을 선택했을 따름입니다.

이곳을 다스리는 왕, 바알세붑과 그 졸개들은 주님의 적이므로 나로서는 당연히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장은 허망시를 다스리는 임금의 편에 서서 피고인들을 고발한 이들 가운데 누구든 나와서 증거를 제시해도 좋다고 선언 했다.

 

'시기심'과 '미신', '아첨' 이 증인으로 나섰다.

재판장은 순례자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 왕의 입장에서 피고인들의 유죄를 입증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시기심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상당히 오랫동안 저 사람을 알고 지냈습니다.

존엄한 이 법정에 맹세컨대 저자는 ....."

 

"잠깐!"

재판장이 끼어들었다. 

"먼저 증인선서부터 시키시오!"

 

시기심의 증언이 다시 이어졌다. 

"재판장님, 비록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피고는 흉악무도한 인간입니다.

임금님이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법과 관습을 일절 무시한 채, 자칭 '믿음과 경건의 원리'라는 반역적인 사상을 주위에 퍼트리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허망시의 관습은 백팔십도 달라서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단언하는 걸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곳 시민들과 우리가 하는 고상한 일들을 싸잡아 비난한 겁니다.”

 

재판장은 증인에게 물었다. 

"이상입니까?"

 

시기심은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장님,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재판이 지루하게 늘어질까 싶어서 이만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사분들의 증언을 듣다가 저 피고인들을 심판 하는 데 혹시 미진한 부분이 있다 싶으면 그때 다시 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재판장은 시기심을 대기시켜놓은 채, 미신을 불러서 피고들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러곤 크리스천과 신실에 맞서 허망시의 임금을 위해 증언할 게 있는지 물었다. 

 

미신은 증인선서를 마치고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개인적으로는 피고인들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대화를 나눠본 경험에 비추어 둘 다 대단히 위험스러운 인물이라고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신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으며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곳 시민들이 예배를 드린답시고 헛심을 빼고 있으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결국 저주를 받고 말 거란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증언대에 서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재판장은 마지막 증인에게도 선서를 마치고 피고들의 범죄행위를 증언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첨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신사 분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 친구를 잘 압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고요.

피고는 더할 나위 없이 거친 표현들을 써가며 우리의 지엄한 임금이신 바알세붑을 매도하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옛사람 대감', '음란 대감', '사치 대감' '허영 대감',  '호색 대감', '탐욕 대감' 을 비롯한 임금님의 영예로운 친구들과 귀족 여러분들을 경멸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아울러 뜻을 모아서 그처럼 고귀한 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시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재판관으로 지명되어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을 감히 경건치 못한 불한당이라고 지칭해가며 욕해댔습니다.

그 밖에도 허망시의 여러 명망가들을 헐뜯어서 그 명예에 먹칠을 했습니다.”

 

아첨이 말을 마치자 재판장은 피고석에 앉은 순례자들에게 소리쳤다.

"배신과 반역을 저지른 이단자야, 네 죄를 고발하는 정직한 신사분들의 증언을 들었느냐?"

 

"몇 마디 반론을 얘기해도 괜찮겠습니까?" 

신실이 물었다.

 

재판장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저, 저 말하는 것 좀 보게! 넌 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죄인이다. 

당장 처형해야 마땅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너그러운지 뭇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차원에서 특별히 발언을 허락한다."

 

신실이 변론을 시작했다. 

"우선, 시기심 씨의 말씀에 답변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규칙이나 법률, 관습, 사람이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면 기독교의 진리에 백팔십도 위배된다고 말했을 따름입니다.

여기에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여러분 앞에서 기꺼이 취소할 용의가 있습니다.

 

다음은 미신 씨가 지적하고 고발한 내용에 대해 변론하겠습니다.

내가 했던 말을 정확히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거룩한 믿음이 필요한데, 그런 믿음은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거룩한 계시가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서 무엇이든 거룩한 계시와 어울리지 않는 일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건 단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인간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첨 씨가 고소한 문제에 관해서도 차분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허망시를 다스리는 임금과 신하들, 짐승 같은 무리들, 그리고 아첨 씨가 일일이 열거한 이들은 이 나라 이 도시가 아니라 지옥에 더 어울릴 겁니다.

주께서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빕니다!"

 

재판장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소송과정에서 오가는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시내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던 피고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점잖은 신사 분들의 증언도 경청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한 저자의 답변과 고백도 들으셨습니다.

이제 피고를 교수형에 처할지, 아니면 석방할지 결정해주십시오.

하지만 판결을 내리기 전에 허망시의 법률에 관해 잠시 설명해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임금님의 종이었던 바로 대왕 시절에 제정된 법령이 있습니다.

이곳의 종교와 어울리지 않는 신앙이 성장하고 번창해서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걸 막기 위해 말썽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자들의 아들은 무조건 강물에 빠트려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출 1장)

 

우리 임금님의 또 다른 신하였던 느부갓네살 대왕 통치기간에 제정된 법에는 금 우상 앞에 엎드려 예배하지 않으면 누구든 맹렬하게 타오르는 풀무에 집어 던지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 3장)

 

다리오 왕 치세에 나온 법규에 따르면, 임금을 제외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지위를 가리지 않고 사자굴에 처넣게 되어 있습니다. (단 6장)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반역자는 생각뿐 만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도 이런 법규들을 모조리 어겼습니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차근차근 짚어보십시오. 

바로가 만든 법은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장차 저지를 수도 있는 잘못을 막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있는 피고의 죄는 명명백백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두 번째와 세 번째 법령을 기준으로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고인이 이곳의 신앙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 입으로 자백한 반역 죄만 가지고도 사형에 처하고도 남습니다."

 

재판장의 설명을 들은 배심원들은 옆방으로 가서 논의를 벌였다.

'맹목', '무 용', '악의', '호색', '허송', '성급', '자만', '증오', '거짓말쟁이', '잔인', 흑암', '완고'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의견을 밝힌 뒤에 그 뜻을 모아 만장일치로 신실에 대한 '유죄' 평결을 내렸다.

그러곤 다 같이 재판장 앞으로 갔다. 

가장 먼저 배심원 대표인 맹목이 나섰다. 

"피고는 이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어서 무용이 말했다. 

"이런 작자들은 세상에서 깨끗이 없애 버려야 합니다."

악의가 맞장구를 쳤다. 

"옳습니다. 아주 꼴도 보기 싫습니다."

다음은 호색이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군요."

"나도 싫어요." 

허송이 이어받았다. 

"보기만 하면 꾸짖어대곤 했어요."
"벌레만도 못한 놈!" 

자만이 내뱉었다.

"교수형에 처합시다! 목을 매달아버리자고요!" 

성급이 외쳤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군요." 

증오가 말했다.

"놈은 사기꾼이에요." 

거짓말쟁이가 손가락질했다.

"교수형도 아깝지!" 

잔인이 중얼거렸다.

"시간 끌 것 없이 빨리 해치웁시다." 

암이 선동했다.

마지막으로 완고가 말을 보탰다. 

"세상을 다 준대도 저런 자 와는 한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습니다. 

얼른 유죄판결을 내리고 집행합시다!"

 

배심원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결정사항을 실행에 옮겼다. 

신실은 사형언도를 받고 끌려 나가 다시없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군중들은 순례자를 채찍질하고, 죽도록 때리고, 온몸에 칼부림을 해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다시 돌로 치고 검으로 찔렀다.

그러곤 끌어다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태웠다.

신실은 이렇게 삶을 마감했다.

 

꿈에서 보니, 그처럼 야만적인 무리들 뒤편에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신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의 손에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마차는 순례자를 태우고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새 예루살렘 성문을 향하여 곧바로 날아갔다.

 

한편, 크리스천은 집행이 미뤄져서 전에 머물던 감옥에 다시 갇혔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원수들의 분노마저도 좌지 우지하시는 분의 권능에 힘입어 악한 무리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크리스천은 노래를 부르며 순례를 계속했다.

 

아름답구나, 신실이여.
주님을 충직하게 선포했으니
믿음 없는 이들이 헛된 쾌락을 좇다가
지옥에서 괴로워 부르짖을 때
그분의 축복을 누리리니.
노래하라, 신실이여 노래하라.
저들이 그대를 죽였을지라도 도리어 살았으니
그대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신실이 죽고, 허망시장에서 도망친 크리스천은 혼자가 아니었다.

'소망'(본래는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크리스천과 신실이 장터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보여준 언행에 감동해서 그렇게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이란 남자와 함께였다.

 

소망은 순례를 마칠 때까지 동행이 되기로 약속하고 형제의 언약을 맺은 뒤에 여행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죽음으로 진리를 선포하자 곧 다른 사람이 그 재에서 일어나 순례의 길을 가는 내내 크리 스천의 동반자가 되었다.

소망은 적절한 때가 되면 허망 시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뒤따라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게 될 것이라고 크리스천에게 속삭였다.


출처 :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포이에마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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