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생각 한다는 것

들어가면서

w.j.lee 2024. 9. 27. 07:24

사람답게 살기 위해 생각하기를 시작할 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교육을 받은 사람 이면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의 존재, 세계의 존재, 타인의 존재, 심지어 나의 존재조차 의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하고 있는 '나' 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 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나의 생각이 나의 존재의 원인이 될 것이고 나의 존재는 생각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내 앞에 있는 책상이나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것들은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이고 따라서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산, 나무, 사람, 심지어는 신과 나조차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허구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의심하는 나는 지금 의심하는 행위를 통해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나는 적어도 지금, 여기서,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이 활동을 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존재한다.

이 사실만은 확실하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나에게 가능한 참된 지식을 순서를 따라 차근히 찾아 나설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일단 확보한 다음,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 물질세계의 존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탐구를 진행합니다.

확실성을 얻어 보고자 했던 데카르트에게 '내가 생각한다'는 활동은 모든 다른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흔히들 데카르트의 이 사상이 중세와 구별되는 근대를 열었다고 이야기하지요.

근대 사상과 문화, 근대 사회의 핵심이 '생각하는 주체'에 있다고 보고 주체 사상의 문을 연 사람 이 데카르트라 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시각과 함께 생각한 다는 것, 묻고 따지고,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앎을 얻게 되는 것은 믿음과는 대립된다는 생각이 어느새 자리 잡게 되었습 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아예 생각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마치 믿음을 배반하는 것처럼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 현상도 우리 주변에 생겨났습니다.

 

시작을 너무 무겁게 한 것이 아닌가요?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이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이 말이 자주 오해되기 때문에 좀 길게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만일 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 는다고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먹을지, 오늘 무 슨 일을 할지, 주어지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습니다.

 

생각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일 걷는다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만일 무슨 책을 읽는다면 내가 무엇에 관해서 읽고 있는지, 그 속에 담긴 내 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생각 하지 않고서는 내가 무엇을 읽는지, 읽고 있는 내용이 무엇 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삶과 생각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면 생각은 삶을 이루는 모든 계기와 행동, 동작, 조건에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 자체가 곧 나 자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 없이 나 자신의 존재, 나 자신의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나와 함께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타인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생각 없이는 인간사회도, 인간의 조직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식, 기억, 회상, 욕구, 욕망, 기대, 소원, 반응, 이 모든 것은 타인과 함께 살아갈 때 생각이 가동되고 표출되는 모습 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생존의 수단이기만 할까요? 

가장 낮은 단계에서, 아마 거의 초보적인 '반응'(reflex)의 단계에서부터 사회 속에서 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계에 이르기 까지 생각은 생존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인 것은 틀 림이 없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을 취하는 데는 생각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전략을 고안하고 전술을 만들 때도 생각이 개입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골똘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단순한 생존이나 성공이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부름 받은 자로, 보냄 받은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 이 세상을 생각하면서 사는 목적 은 이 정체성에 따라 반응하고, 책임지는(responsible)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희생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품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그리스도인 에게는 창의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창의적 사고는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떤 패착(敗着)의 상황에 처했을 때 방향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합니다.

예컨대 부부 사이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친구와 바둑을 둘 때에, 그 친구가 바둑을 이김으로 인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설사 내가 이길 수 있을 지라도 몰래 져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친구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비우는 것은 항복처럼 보입니다.

비록 져 주었다 하더라도 진 것이기 때문에 항복은 항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복은 살기 위해서, 힘이 없어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한 항복과는 다른 종류의 항복입니다. 

저의 선생님인 반 퍼슨(C. A. van Peursen) 교수는 이런 종류의 항복을 일컬어 “창조적 항복" (creative capitulation)이라 부릅니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와 새로움을 가져오는 항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창조적 항복"에까지 나아간다면,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반드시 생존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존재하고 제대로 사는 데는 생각이 빠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자연을 대하고, 환경을 대하고, 우리 자신을 대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사리를 따져서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새로운 것을 궁리할 뿐 아니라, 내 주변과 환경과 타인의 삶과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쳐다보고 물어보고 마음을 쓰게 됩니다.

돌봄과 보살핌, 관심과 배려가 곧 생각함의 다른 이름입니다.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 보면 내 삶이 나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 몸을 지탱해 주는 음식 들을 보십시오. 

이 가운데 내가 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혹시 내가 농부라 하더라도 내가 먹는 것들이 모두 나의 소산은 아닐 것입니다. 

남들이 애써 땀 흘려 가꾼 것들을 우리는 시장이라는 유통망을 통해 사 먹습니다.

 

누군가 말할 것 입니다.

"내 돈 내고 내가 사 먹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내 돈이라는 게 사실 내 돈인가요?

제가 교수로서 학교로부터 임금을 받을 때 학생들의 등록금이나 국가의 지원 없이 가능할까요?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일해서 받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일을 하고 임금을 받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일했다고 그만큼 받을 만한가요? 언제나 그것보다 더 많은 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고 저는 묻겠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누워 자는 집, 이것 들을 이루고 있는 벽돌과 흙과 돌,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타인의 땀과 노력, 심지어는 우리가 즐겨 읽는 책, 즐겨 듣는 음악,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에 비해 훨씬 크게, 훨씬 많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이 모두가 우리의 노력과 땀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우리가 투여한 것보다는 훨씬 많게, 훨씬 풍성하게 주어진 것이 아닐 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덤이고 선물임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이렇게 생각을 밀어붙여 보면 나 자신은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내 삶의 중심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삶의 기본 마음이 되면 모든 일에 우리는 "아쁘레 부"(Après vous, "먼저 가십시오", "먼저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이 말에 자신의 철학 전체가 담겨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환대하는 일이 내가 살아갈 때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라 본 것이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무엇을 소중히 여길지, 누구를 어떻게 배려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의식하고 깨닫고 길을 더듬어 찾아 걸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활동입 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생각을 생각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같이 해 보면 훨씬 수월할 수 있습니다.

밥은 각각 스스로 떠먹어야 하지만 혼자 먹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을 때 훨씬 즐겁고 맛있듯이, 생각도 함께 해 보면 훨씬 쉽고 재미있게 해낼 수 있습니다.

이제 함께 생각의 길을 걸어가 보지요.


출처 : 생각 한다는 것 ( 강영안 지음.  두란노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