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과 여인들
보화각 寶華閣(간송미술관 옛 이름) 설립 70주년 기념전에 신윤복의 '미인도' 가 전시되었을 때 찾아드는 관람객으로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인도를 전시했던 간송미술관은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은 『혜원전신첩』을 비롯한 국보급 미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귀한 예술품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기에 자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러나 사립박물관으로 1년에 봄·가을 두 차례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때문에 접하기가 쉽지는 않다.
또한 입장료도 무료이다 보니 전시를 자주 해주기를 건의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1, 2층으로 된 전시장엔 관람객이 많다보니 안에서도 줄을 서고, 특히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주요 작품 주위에서는 관람객 서로 간에 어깨를 겹겹이 하여,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동시에 관람해야 한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늘 여인이 등 장하는데 '연당야유도'는 연못가 에서 세 남자가 기녀들과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당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은 부럽기까지 하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준다.
'주유청강'은 맑은 물에서 뱃놀이를 한다는 뜻의 제목이다.
그림에서 보여주 는 것처럼 돈 많고 힘 있는 귀족들의 뱃놀이이다.
아무래도 사내들끼리는 재미가 있겠는가, 짝을 맞추어 즐기고 있는데, 어찌 보면 앞의 그림인 연당에서 즐기던 그 멤버 들이 그대로 자리를 옮긴 듯도 하다.
두 그림이 공통적으로 남녀가 세 명씩으로, 여인을 끌어 안고 있는 사람과 여인에 관심이 없는 듯 그저 무심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흥을 돋우기 위해 피리(대)부는 아이 하나를 태우고, 유유자적이다.
시원한 물에 손을 담가보는 기생을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내와, 어깨를 감싸 안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사내와 기생들의 농염한 자태, 그 뒤에서 짐짓 모른 체하며 뒷짐을 지고 강바람을 맞으며 시상 詩想에 잠겨 있는 사람, 그렇거나 말거나 열심히 노를 젓는 사공, 이들의 조합이 혜원의 화폭에 그윽이 담겨있는 것이다.
좌측 그림이 저 유명한 혜원의 미인도이다.
간송미술관에만 머물러 있던 미인이 2014년에 첫외출을 했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2층 전시실에 몇 달간 전시되어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여염집 규수는 외간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으니,
이 여인은 필시 풍류세계에 몸담고 있는 기생일 것이다.
정성껏 틀어 올린 탐스런 얹은머리에, 팔뚝에 딱 붙어 팔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좁은 소매통, 기장은 짧아 손만 위로 들어도 금세 젖가슴이 들어날 것 같은 저고리, 매지 않고 일부러 풀어헤친 진자주 고름, 두 손으로 묵직한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고혹적인 모습,
아직 다 익지도 않은 앳된 둥근 얼굴에 물 오른 듯 앵두 같은, 다소곳이 다문 입술이 뭇 사내들을 뇌쇄 惱殺 시키기에 충분하다.
쪽빛 치마 밑에 살짝 드러난 하얀 외씨버선발은 비너스像을 비롯한 고대 서양 조각상에 표현되는 '콘트라포스토(Contra posto)' 형태다.
한쪽 발에 무 게중심을 두고 다른 쪽 발의 무릎은 자연스럽게 약간 구부려서 전체적으로 완만한 S자 모양의 자세가 되는데, 이렇게 하면 허리는 더욱 잘록해지고 엉덩이는 풍만하게 보여 여인의 맵시가 더욱 유혹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여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포즈라는 저 자세는, 미인이 직접 연출한 것인지 아니면 화가가 요구한 포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월하정인·월야밀회·기방유사 등 그림 속 대부분의 신윤복 미인들의 자태가 저런 모습인 것을 보면, 신윤복이라는 화가가 좋아하는 몸짓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초상화를 그릴 때 중요한 것은 생긴대로의 겉만 그리는 것이 아니고 내재된 마음속이 표현되어야 하듯, 신윤복은 이미인의 내밀한 속마음을 세세히 읽어 내어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림에는 '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 박흉중만화춘 필단능언물전신 : 화가의 마음속에 만 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 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 내준다'라고 제화를 적어 두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미인도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얼마나 황량했을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 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라고 노래한 문열공 이조년의 시 봄밤과,
오늘 이 미인을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서있어야 했던 기다림과,
미인도를 직접 만난 후의 가슴 벅참이 마냥 뒤엉켜 차마 잠 못 들고, 나의 가을밤은 이슥해져 만 간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