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비록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보다는 남이 더 많이 쓰고 부르는 것이 '이름'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그저 현상에 지나지 않던 어떤 것들이, 이름을 불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된다는 오묘한 표현이 한없이 아름다운 시 詩다.
모윤숙 시인 또한
"금실로 짠 목도리 없어도 임이 부르시면 달려가지요." 라는 시구 詩句로 무조건적 관계를 표현하면서 나를 부르는 '임'과 '나'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통장례 절차 중에 '고복 皐復'의식 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막 운명하였을때, 떠나가는 영혼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외쳐 부른다.
세 번을 목 놓아 불러도 소생하지 않으면 운명한 것으로 인정하여 영혼을 떠나보내는 의식인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로 시작되는 김소월의 시, 초혼
招魂 이 바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고복이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도 여전히 향기로울 텐데, 이름에 상관 말고 이름 대신 제 전부를 가져가세요..."
로미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줄리엣이 자신의 마음을 환히 열어 보이던 명대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대화의 내용을 쓴 섹스피어와 피천득의 생각은 달랐다.
피천득은 줄리엣이 말한 장미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추억과 정서와 애정이 깃들어 있기에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피천득의 이름 역시 당초에는 하늘에서 얻었다 하여 천득 天得이었는데 호적계 직원의 실수로 천天이 아닌 천千으로 바뀌게 되었단다.
혹자는 천天에서 한 획이 모자라 피천득이 가난하게 살았다고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름자의 한 획으로 운명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만큼이나 가지각색의 이름이 있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레 사용하기도 하고 본명을 숨기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누구나 이름이 있건만 이름 없는 사람도, 이름을 날리기도, 이름을 남기기도, 이름을 걸기도, 이름을 팔기도, 심지어 이름을 바꾸기까지도 한다.
이름도 시대에 따라 그 유행이 바뀌었으니,
평균수명이 짧았을 때는 남자이름에 오래살기를 바라는 '길 영永'자를 많이 써서 영수, 영호, 영식이가 많았고,
70년대에 는 ‘공 훈勳’과 ‘이룰 성成'이 많아 정훈, 성호가 많았고,
여자이름으로는 일본식 이름인 자子가 많이 쓰여 영자, 미자, 말자가 많더니, 미美와 은銀, 숙淑으로 바뀌게 된다.
80년대에는 순 한글 이름이 인기였고 근래에는 중성적 이름이 많아 서연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고 통계는 말하고 있다.
이름은 그 사물이나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이름과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텍사스골목, 이태리타월, 터키탕 등으로 실제 그 나라엔 존재하지 않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쓰이고 있는 명칭들이 있다.
특히 터키 탕이라는 이름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 이름이라 하여, 오죽하면 터키에서는 대사관을 통해 우리나라에 항의까지 했다니 웃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공자, 맹자, 순자, 노자는 ''돌림의 이름이 아니고 훌륭한 성인에게 붙여지는 성호이다.
윗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민망하여 편히 부를 수 있는 호號를 지어 부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호는 '원효' 대사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때론 별명을 지어 박대통령을 그저 '박통'으로, 다른 유명인들도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MB, YS. DJ 등으로 편히 부르기도 한다.
어려서는 창호(벽창호의 준말), 젊어서는 통(술통, 고집불통의 준말)이라는 예명으로 불리던 필자가 우연히 작명가를 찾아 갔을 때 '이름을 바꾸지 않으 면 삼대에 걸쳐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고 겁을 주었었는데,
맨날 술을 먹고 있어도 아직까지 알코올중독 처방을 받지 않은 걸 보면 이름이 팔자를 좌우 하는 건 딱히 아닌 듯싶다.
출처 : 잡설산책 (김연태 지음, 글샘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