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나의 뿌리

廣州李氏로 불린내력

w.j.lee 2015. 1. 20. 19:56

 

우리 李가가 역사상 최초로 광주이씨로 불린 내력

 

 

우리 廣州李氏를  회안의 李가라고 했는데

공식으로 역사상 최초로 "廣州李씨"" 廣이"로 불려지게 된것은 조선조 태종때의 일이다.

석탄공 일화때 처음으로 조선 제 3대 임금-태종이 이야기함

 

아래의 역사이야기를 참고하기를

우리 이씨는 별칭 칠원 이씨, 회안 이씨라고 했는데,

공식 광주이씨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회안이란,
회안의 명칭 유래부터 살펴본다
淮安은 고조선 準王이 서만주 요서 일대에서 창흥한
조선계(쥬신계,부여계)의 군장 위만에 밀려서 남하
기원 전 수세기에 회안 지역에에 회안국淮安國이란 나라를 세우고
칭 韓왕이라 하며 이 일대를 다스렸으니
최초 회안이란 지명이 사서에 등장하고,부르기 시작했다

이 회안의 일대는 百濟가 마한역 域을 통일하는 근원이 된 곳이다.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백제와의 충돌이 된 곳이며
삼국의 국력이 상호 충돌하는 강역域이 된 곳이다
향후 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국가 발전과정의 중심이 된 곳이다 .
회안국에서 연유된 회안의 이름은 수세기 동안 불리어 왔다.
비류의 위례성 온조가 13년 도읍하니, 南漢山城 일대이고
근초고왕 26年 이도移都하니 南평양성, 즉 오늘 한강 이북域이다
신라에 이르러 한산주, 한주 등으로 별칭 되다가
고려 태조 23년 광주로 개칭된 곳이다,
속郡의 이름은, 남한산, 한산주, 한주, 회안, 봉국郡이라 했다,
이 회안의 호명=불려진 이름은, 그 지방 사람들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준왕이후, 이천년 동안 불리워져 왔엇다는 것이다.
즉 고려초 우리 李족이 이주한 뒤에도 계속 일대를 
내내 회안이라  불렀다. 사서에 조선 초기,
太宗이 석암탄 공에 다가가 삼고 초려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치 유비가 제갈양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 했던 것처럼,


태종은 여러번 석탄공 이양중(李養中)을 찾아서

 "조선의 신하" 되기를 청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즉, 석탄공 이양중(李養中)은 고려말 판관으로 당시 이 방원과 친구지간이고 가까웠다.

그런데 이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이조의 태종"으로 등극하자

"도덕과 예의를 모르는 무식한 놈이고 사귈놈이 못된다" 하고 혼자 고덕동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이 찾아와 조정에 들어와 도와줄 것을 청하나, 한사코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석탄공에게 딱지를 맞은 이방원은 "에이 에이" 하면서 승지를 데리고 돌아갔다.

태종은 왕명을 거절한 석탄공을 괘씸하게 생각하면서 말을 타고 오면서 승지에게 이야기했다.
요새말로 "지독한 李가者, 廣李者이라고 했다..의역을 하면 그렇다"
즉, 조신들 사이에 석탄공의 수절을 이야기하면서 비로서
광릉의 이가...광주 이가라고 조야에서 부른 것이다...이야기가..

역사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즉 廣李家라고

우리 광이는 석암탄공파든 둔촌공파든 십운공파든 율정공파든 

이조 500년간 순수 혈통의 양반의 가문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고집이 세고 원칙이외에는

타협이 없는 성깔"들이 대부분이지요

태종 이방원과 석탄공 이양중(李養中)은  여말시절부터 서로 친구지간입니다.

서로 잘알죠, 석탄공의 고집에 이방원은  혼자 말을 타고 돌아오면서

 "저놈 지독한 놈..광주이가놈..에효에효~~..하며...이라고 승지에게 중얼중얼하고...............

조정에 돌아와서 어전에서도 석탄공을 지명하면서

지독한 광주 이가者이라고

했던  것을 훗날 야사로 내려온 이야기입니다

 


그 후 석탄공 이양중 선조는 수리골(지금의 하남시 덕풍2동)에 은둔하고, 

형제 이양몽(암탄공) 어르신은 광주 원적산 아래(실촌면 이선리)에 은둔하고

일체 벼슬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부도덕한 조선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일 이양중, 양몽의 자손들은 그후 벼슬을 기피하고 생업에만 열중하였다. 석암탄 공파 손이다.

지금 강동구의 "고덕동이란 지명 유래"는  

이 두형제의 높은 덕에 기인 당시 선비들이 붙인 이름이다. 

미금시의 "왕숙천도" 태종 이방원과 이양중이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은 지금도 전해오는 유명한 얘기이다.


초월면 신월리와 용수리 그리고 실촌면에 거주하는 광주이씨의 석탄자손들은

조선 태종때 수리골, 이선리에서부터 분리되어 분포된 것이다.

 

석탄의 묘는 원래 하남시 덕풍2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에 따라 종손 이창희가 초월면 신월리로 이장을 하였고

암탄의 묘는 원적산 아래 실촌면 이선리에 그대로 자리한다.
광주에는 독립 운동가인 이종훈(3.1운동 33인중 1인),

이병승(실촌면 만세운동의 주동자)이 유명하다.


"이양중(李養中)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죽은 뒤 광주(廣州)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회안이씨"" 별칭
정헌공 (휘 윤경)의 만시(생전의 고인의 덕업을 칭송하는 추모글

=상여가 나갈 때 앞에서 가는 만장 행열의 글)에서
조선 "판서 박계현"은

" 울창한 회안의 이씨는 대대로 현재가 있었다=鬱鬱 淮安李 賢才 代有人,"
찬성 오겸은 "빛나는 지엽은 회안의 이씨다"

이 회안의 이씨는 칠원이씨라고 했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廣州李가를 "회안이씨라 했고, 本是 칠원이씨"라고 했다.
회안의 지명을 내내 사용한 흔적이다.

그 後 광주로 개칭되어 조선조에 이르러 대대로 현재가 나오니
本을 廣州로 부르게 된 것인데
기실 칠원 호족이 고려말 회안으로 이주 당한 그 후예들이다 .


칠원[함안]과 광주의 유사성과 역사적 교류와 유동 --생략
상고 시대의 일부를 검토하면
우리 회안(광주지역,한강이남)의 문화권과
칠원 즉 함주,창원의 문화권은 상호 유사성이 있다 .

우선 함주와 광주에 전한 습속으로는
하나가,속상 검솔의 風과,구산 점상술 風이고
두 번째가 말을 조련하는 것 즉 유목적 습俗이고
셋이 상 기사 독서 吏의 上驥射習俗이다
이는 우리 광주 李가 사람들의 오래된 전래 습속이다

광주이가 사람들 치고
말타기과 활쏘기
독서
이 세 가지를 모르는 분이 없었다.
그리고 거북 점을 치는 풍습과 검소한 풍습이다
활을 잘 쏘았고, 말을 잘탔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다
속상 검술=청백리, 활 궁술, 독서,등
이 동류의 문화권은 고려 시대 원주와 충주로 확대 된다
....................................

광주이씨 <역대주요인물>

이 집(李 集) 1314(충숙왕10~1387(우왕13)
고려의 학자.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당(唐)의 아들. 충목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교유했다.
1368년(공민왕17) 신돈(辛旽)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피신, 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개경(開京)에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驪州川寧縣)에서 독서(讀書)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 문사들을 경탄케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그가 조선 왕조의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 된 것을 1611년(광해군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바로 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지강(李之剛) 1363(공민왕12)~1427(세종9)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중잠(仲潛), 시호는 문숙(文肅),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아들. 1382년(우왕8) 문과(文科)에 급제, 조선 개국 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사헌 장령(司憲掌令)을 지내고 1407년(태종7) 경승부 소윤(慶承府少尹)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내고 1411년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충청도․전라도에 파견되었으며 1414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416년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좌의정 유정현(柳廷顯)과 함께 노비쇄권색(奴婢刷卷色)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를 거쳐 형조․호조의 참판(參判)이 되었다.
1418년(태종18) 평안도 관찰사가 되고 이해 세종의 즉위 후, 호조 참판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호조 판서․예조 판서․의정부 참찬 겸 대사헌(議政府參贊大司憲)을 지낸 뒤 1425년(세종7)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사직했다.

이양중(李養中)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죽은 뒤 광주(廣州)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인손(李仁孫) 1395(태조4)~1463(세조9)
조선의 문신.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시호는 충희(忠僖), 참의(參議) 직(直)의 아들. 1411년(태종11)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4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박탈되고, 1434년(세종16)에 감찰(監察)을 거쳐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냈다.
이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53년(단종1)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정권을 쥐게 되자 호조 판서에 승진,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 이어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1459년(세조5) 우의정에 올라 곧 치사(致仕)했다.

이극배(李克培) 1422(세종5)~1495(연산군1).
조선의 문신.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매월당(梅月堂), 시호는 익평(翼平),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47년(세종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감찰(監察)․정언(正言)․병조 좌랑(兵曹佐郞)․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의 총애를 받다가 1455년 그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고, 1457년(세조3)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세조가 영남지방을 순행(巡幸)하게 되자 특히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병조와 예조의 참판(參判) 겸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野人)을 정벌할 때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출전하였고 돌아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세조8) 이조 판서에 승진했고, 형조와 예조의 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어 병조 판서, 펴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종 때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471년(성종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삼도 순찰사(三道巡察使)를 겸하고,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삼도 순찰사(三道巡察使)를 겸하고,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진, 1481년과 1482년의 대기근(大饑饉)을 구제하고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성종16)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고, 1493년 영의정에 올라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극감(李克堪) 1427(세종9)~1465(세조11).
조선의 문신. 자는 덕여(德輿), 시호는 문경(文景),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보직되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부수찬(府修撰)에 임명되어 다음해 강서원(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 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55년(세조1)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정권을 뺏아 즉위하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오르고, 이 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겸하여 맡았다.
1458년(세조4)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수교 간행(讎校刊行)했으며, 도승지(都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1461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撰進)했다.

이극증(李克增) 1431(세종13)~1494(성종25)
조선의 문신. 자는 경위(景撝), 시호는 공장(恭長),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1년(문종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종묘 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가 1456년(세조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을 거쳐 1461년 이조 정랑(吏曹正郞), 1463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겸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내고 사인(舍人)이 되었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470년(성종1) 이조 판서에 올라 국가 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으며, 호조 판서․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482년(성종13) 우참찬(右參贊)․형조 판서․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484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어 문묘(文廟)를 대대적으로 증수(增修), 1488년(성종 19)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17)~1503(연산군9).
조선의 문신.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7년(세조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전농시 주부(典農寺主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응교(應敎)․필선(弼善)․집의(執義) 등을 역임했다.
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승진,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1470년(성종1) 대사헌․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 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7년(성종18)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494년 이조 판서에 이어 병조 판서․호조 판서를 지내고 그동안 평안(平安)․강원(江原)․전라(全羅)․경상(慶尙)․영안(永安) 5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전례(典禮)와 사장(詞章)에 밝은 훈구파(勳舊派)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등장한 신진 사림파(士林派)와 항상 반목이 심하던 중,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 때 실록청 당상관(實錄廳堂上官)이 되어 기사를 정리하다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과거 사관(史官)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훈구파의 비위사실 등을 사초(史草)에 올린 것을 발견하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찬탈(簒奪)로 비난한 것이라 하여 학자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김일손 등 신진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김일손 등 신진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하여,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일컬어졌다.
사화가 있은 후 잠시 파직당했다가 다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죽은 후 시호 익평(翼平)이 내려졌으나 뒤에 관작과 함께 추탈(追奪)되었다.

이극균(李克均) 1437(세종19)~1504(연산군10)
조선의 문신. 자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 1456년(세조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으나 무술(武術)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460년(세조6) 회령 도사(會寧都事), 이듬해 지평(持平)․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고 1472년(성종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1년 이조 판서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야인(野人) 토벌에 공을 세우고, 좌참판(左參判)을 거쳐 1497년(연산군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을 때 경상우도의 지도(地圖)를 만들어 바쳤다.
1499년 좌찬성(左贊成)․평안도 경변사(警邊使)를 지내고 150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누차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인동(仁同)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이 손(李 蓀) 1439(세종21)~1520(중종15)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방(子芳), 시호는 호간(湖簡), 병마절도사 수철(守哲)의 아들. 1459년(세조5) 진사시(進士試) 합격,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1470년(성종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 정랑(禮曹正郞)․김해 부사(金海府使)․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냈다.
이어 충청도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 충청도․황해도․전라도의 관찰사, 이조․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 1501년(연산군7) 형조 판서에 이어 병조 판서가 되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져 우참찬(右參贊)에 승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13년(중종8)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자청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전임 되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 순(柳 洵), 판서 안 침(安 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조직, 친목을 두텁게 했다.

이세좌(李世佐) 1445(세종227)~1504(연산군10).
조선의 문신. 자는 맹언(孟彦), 판서 극감(克堪)의 아들. 1477년(성종8) 첨정(僉正)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튿날 대사간에 특진, 1485년(성종16)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봉해졌으며,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는 김종직(金宗直)을 극형에 처하도록 주장했다.
이 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1503년 예조 판서로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왕이 내리는 술을 어의(御衣)에 엎지른 실수로 무안(務安)에 부처(付處), 이어 평해(平海)에 이배(移配),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 연산군의 生母)를 폐할 때 이를 극간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昆陽郡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한 뒤 효수(梟首)당했다.

이관의(李寬義)

조선의 학자.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여러번 과거(科擧)에 실패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이 되었으나 사퇴, 1483년(성종14) 학문에 밝은 자로서 성종에게 불려 진강(進講), 왕을 감탄케 했고, 늙도록 학문을 열심히 한다 하여 포상되었다. 이천(利川)의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수언(李粹彦) 1457(세조3)~1496(연산군2).
조선의 문신. 자는 사미(士美), 좌찬성(左贊成) 손(蓀)의 아들. 1477년(성종8) 진사(進士)가 되고, 148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로 기용되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형조 좌랑(刑曹佐郞)․예조 좌랑(禮曹佐郞)․지평(持平)․충청도 도사(都事)․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했다.
1491년 북방에 야인(野人)인 침입하자 문무를 갖춘 자로서 발탁되어 장령(掌令)에서 사예(司藝)로 전직되고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494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 즉위한 연산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서계(西界)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게 되자 교리(校理)로 기용되어 둔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해주(海州)에서 죽었다.

이수공(李守恭) 1464(세조10)~1504(연산군10).
조선의 문신. 자는 중평(仲平),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 세충(世忠)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6년(성종17) 진사(進士)가 되고, 14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장령(掌令)․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1498년(연산군4)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이 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창성(昌城)에 유배된 뒤, 광양(光陽)에 이배(移配)되었다가 1501년에 풀려나왔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앞서 윤비(尹妃)의 묘(墓)를 옮길 당시 도감(都監)의 설치를 반대한 죄로 참형(斬刑)당했다.

이연경(李延慶) 1488(성종19)~1552(명종7)
조선의 문신.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 시호는 정효(貞孝),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좌(世佐)의 손자. 봉사(奉事) 수원(守元)의 아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는 조부를 배소(配所)까지 따라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돌아왔다.
이듬해 생원(生員)이 되고,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음보(蔭補), 1518년 공조․형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교리(校理) 등을 지내다가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 파직되었다가 1545년(인종1) 폐과(廢科) 되었던 현량과가 복구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약빙(李若氷) 1489(성종20)~1547(명종).
조선의 문신.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자(滋)의 아들. 성균관 유생으로 1508년(중종3) 왕이 성균관을 찾아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禮記)⌋를 하사받았고, 1513년(중종8) 수석으로 생원(生員)이 되어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중종18)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조광조(趙光祖)와 형 약수(若水)의 사면을 주청하다 삭직(削職)되고,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 정랑을 거쳐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보직, 1539년 노산군(魯山君: 端宗)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또 파직되었다.
1543년(중종38) 경기도에 재상어사(災像御史)로 파견되고, 이듬해 수원 부사(水原府使)․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거쳐 1547(명종2) 좌통례(左通禮)로 재직 중,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을 일으켜 대윤(大尹)을 제거할 때 대윤 윤임(尹任)의 인척이라 하여 사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약해(李若海) 1498(연산군40~1546(명종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용(景容), 호는 수암(首巖), 자(滋)의 아들. 1516년(중종11)에 진사(進士)가 되고, 15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153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1538년 탁영시(擢英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종학 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4년(중종39) 좌보덕(左輔德)을 지내고,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 1545년(인종1)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고, 이 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잔당(殘黨)으로 몰려 경원(慶源)에 안치(安置),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신원(伸寃)되고, 익산(益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약수(李若水)

조선의 유생(儒生),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현감 자(滋)의 아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동료 유생 150여 명을 이끌고 궐내에 들어가 조광조의 설원(雪寃)을 호소하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
1521년(중종16)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창성(昌城)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이윤경(李潤慶) 1498(연산군4)~1562(명종17).
조선의 문신.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시호는 정헌(正獻), 수찬(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년 아버지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자 전 가족이 원지(遠地)에 유배,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 후 서울에 올라와 1531년(중종26) 진사(進士)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과(藝文館)에 등용된 후 저작(著作)․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거쳐, 1545년(명종 즉위)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복설(復設)을 청했고,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으나, 아들 중열(中悅)이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자 관작(官爵)이 삭탈(削奪)되었다가 1550년 용서되어 승지(承旨)를 지내고, 이 해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라는 무고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553년 등용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보직, 이듬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고,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관찰사의 명으로 영암(靈巖)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구(倭寇)의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도 관찰사에 승진했다.
그 후 도승지(都承旨)․병조 판서를 지내고,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중 병사했다.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5)~1572(선조5).
조선의 문신.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양와(養窩)․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는 충정(忠正), 부수찬(副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은 조부와 부친에 연좌하여 형 윤경(潤慶)과 같이 괴산(槐山)에 유배(流配)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온 뒤 신승연(申承演)․황효헌(黃孝獻)에게 수학, 1522년(중종17)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論)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의 미움을 사서 파직,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보덕(輔德)․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 1543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고부 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 참판이 되었고,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 판서․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다.
앞서 병조 판서 때 이기(李芑)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로 그 일당인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기가 파직되자 서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553년 함경도 지방에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咸鏡道巡邊使)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했다.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자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출정, 이를 격퇴하고 돌아와 우찬성(右贊成) 겸 병조 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명종20)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영립(迎立)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다스리며,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기성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려다가 신진사류의 정적(政敵)이 되어 기대승(奇大升) 등의 공격을 받았다.
1571년(선조4) 영의정을 사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이이(李珥)와 3사(司)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청안(淸安)의 귀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용휴(李用休)

조선의 문인. 호는 혜환재(惠寰齋), 기(沂)의 아들, 가환(家煥)의 아버지.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높았다.

이 영(李 瑛) 1501(연산군7)~1558(명종13).
조선의 문신. 자는 자윤(子潤), 부사과(副司果) 양필(良弼)의 아들. 1525년(중종2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8년(명종3) 전적(典籍)이 되고, 사인(舍人)․집의(執義)를 역임, 봉상시저(奉尙寺正)에 이르렀다.

이영현(李英賢) 1507(중종2)~1572(선조5).
조선의 문신. 자는 희성(希聖), 1537(중종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과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1540년 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543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시독관(侍讀官)․교리(校理)를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승진, 1545년(인종1)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수관(編修官)을 겸직했고, 장령(掌令)․응교(應敎)․사간(司諫)을 지냈다.
1547년(명종2) 큰 기근이 들자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황해도 지방의 구제사업을 독려했고, 전라도에 내려가 구휼사업에 태만한 관리들을 적발했다.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상호군(上護軍)․종부시정(宗簿寺正)․이조 참판(吏曹參判)․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 1562년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 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전직,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을 지휘했고, 1571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이홍남(李洪男) 1515(중종10)~?
조선의 문신. 자는 사중(士重), 호는 급고자(汲古子), 약빙(若氷)의 아들, 1538년(중종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1546년(명종1)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사사(賜死)된 아버지에 연좌,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가, 1549년 평소에 사이가 나쁘던 동생 홍윤(洪胤)이 조정을 비난하는 말을 하자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 동생을 처형케 했다.
이 해 모반을 고발한 공으로 풀려나와 장단 부사(長端府使)가 되었고, 1559년 앞서 장단 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학대한 죄로 파직되었다.
1561년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기용, 1569년(선조2) 앞서 동생을 무고했던 사실이 드러나 삭직(削職)되었다.

이중경(李重慶) 1517(중종12)~1568(선조1).
조선의 문신. 자는 숙선(叔善), 영부(英府)의 아들. 1546년(명종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8년 검열(檢閱), 이듬해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을 역임, 1550년 수찬(修撰)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52년 헌납(獻納)에 승진, 장령(掌令)․사인(舍人)․응교(應敎)를 지냈다. 1559년 직제학(直提學)에 승진, 이듬해 대사간, 1561년 예조 참의(禮曹參議)․부제학(副提學), 1563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했으나 당시의 권신 이양(李0)이 유배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파직, 1565년 풀려나와 부호군(副護君)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튿날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중열(李中悅) 1518(중종13)~1547(명종2).
.조선의 문신. 자는 습지(習之), 호는 과재(果齋), 병조 판서 윤경(潤慶)의 아들.
1539년(중종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갑산(甲山)에 유배되고, 1547년 사사(賜死)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이황(李滉)에게 크게 촉망을 받았고,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 등 학자와 교유가 깊었다.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이 괵(李 0) 1551(명종6)~1592(선조25).
조선의 문신. 자는 여진(汝辰), 준의(遵義)의 아들. 1576년(선조9) 생원시(生員試)에 수석으로 합격, 158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의주(義州)에 왕을 호종(扈從)하고 죽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한천군(漢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이정립(李廷立) 1556(명종11)~1595(선조28).
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시호는 문희(文僖), 판결사(判決事) 시무(時茂)의 아들. 이이(李珥)의 문인. 1576년(선조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2년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칭송을 받았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 좌랑(吏曹佐郞)․형조 참의(刑曹參議)․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왕을 호종(扈從), 평양(平壤)에 이르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승진했다.
1594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황해도 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고, 1595년(선조28)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追贈) 되었다.


이과악(李光岳) 1557(명종12)~1608(선조41).
조선의 무신. 자는 진지(鎭之), 시호는 충장(忠壯), 군수(郡守) 호약(好約)의 아들. 1584년(선조17)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2년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 지방에서 선봉에 나서서 왜군과 격전, 적이 진주(晋州)를 포위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으로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좌익장(左翼將)으로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4년 곽재우(郭再祐)의 부장(副將)으로 동래(東萊) 전투에 종군했고, 이 후 1백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돋구었다.
159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錦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백여 명과 우마 60여 필을 탈환했다.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을 거쳐 1604년(선조37) 경기 방어사(京畿防禦使)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지고, 1607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이이첨(李爾瞻) 1560(명종15)~1623(인조1).
조선의 권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좌찬성(左贊成) 극돈(克墩)의 후손, 우선(友善)의 아들. 1582년(선조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3년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내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99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壯元)했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써 광해군(光海君)의 옹립을 주장하고 정인홍(鄭仁弘)과 모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받드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에 유배당하게 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일약 예조 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臨海君) 진(珒)과 유영경을 사사(賜死)케 하는 등 조정에서 소북 일파를 숙청하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키고 이듬해 강도죄를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하여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안치(安置)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케 했다(癸丑獄事).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16)~1613(광해군5).
조선의 문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蔭)․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는 문익(文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성(民聖)의 아들. 1580년(선조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이어 정자(正字)를 거쳐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교리(敎理)․이조 좌랑(吏曹佐郞)․대사간․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592년 31세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야기가와(柳川調信) 등과 화전(和戰)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했다.
그 후 왕을 호종(扈從), 정주(定州)에 이르러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 지원군 파견에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고, 명나라 원병이 들어오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전쟁 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병조 판서에 승진, 이듬해 이조 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 당상(訓鍊都監堂上)을 겸임,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등 4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지냈으며, 1598년 38세로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都提調)를 겸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는 한편, 쓰시마도(對馬島)의 정벌을 건의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 1606년 한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閑職)에 밀려 났다가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陣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에 복직, 1613년(광해군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 양근(楊根)에 내려가 죽었다.
남인(南人) 출신으로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남․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인조 때 복관(復官)되었고, 포천(抱川)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윤우(李潤雨) 1569(선조2)~1634(인조12).
조선의 문신.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潗)의 후손, 희복(熙福)의 아들. 성주(星州) 출신. 정구(鄭逑)의 문인. 1591년(선조24) 진사(進士)가 되고, 1606년(선조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주서(注書)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2)에 검열(檢閱)로서 설서(設書)를 겸임, 이어 사관(史官)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필(直筆)했다가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待敎)․봉교(奉敎)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을 거쳐 1613년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역임, 대북(大北)의 전횡이 심해지자 사직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뒤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사간(司諫)․사성(司成)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해룡(李海龍)

조선의 서예가(書藝家).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 1588년(선조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많은 필적(筆蹟)을 남겼으며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 교섭에 종사했다.
159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 김상(金相)으로부터 한호(韓濩)에 필적하는 명필이라고 격찬을 받았다.

이흥립(李興立) ?~1624(인조2).
조선의 무신. 무과(武科)에 급제, 1623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김유(金瑬)․이귀(李貴) 등의 인조반정(仁祖反正) 모의에 가담하여 반정군(反正軍)이 창덕궁(昌德宮)을 습격하자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사를 이끌고 이에 내응, 광해군을 몰아는데 성공했다.
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수원 부사 겸 경기 방어사(水原府使兼京畿防禦使)로 적에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자결했다.

이필영(李必榮) 1573(선조6)~?.
조선의 문신. 자는 이빈(而賓), 호는 만회(晩晦),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 시정(寺正) 사수(士修)의 아들. 1597년(선조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사서(司書)․병조 좌랑(兵曹佐郞)․수찬(修撰)․지평(持平)․문학(文學)․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1605년(선조38) 함경도 어사(咸鏡道御史), 이어 상의원정(尙衣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장령(掌令), 1610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대사간으로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612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1618년 한남군(漢南君)을 습봉(襲封), 우참찬(右贊)․특진관(特進官)을 지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다시 황해도 관찰사로서 적을 겁내어 도망친 일로 전직(轉職), 1641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644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이듬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상안(李尙安) 1575(선조8)~1627(인조5).
조선의 무신. 자는 정이(靜而), 시호는 충민(忠愍), 1603년(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광해군 때 곡산(谷山)․가산(嘉山) 등지의 군수(郡守)를 거쳐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의 별장(別將)으로 안주(安州)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우찬성(右贊成)에 추증(追贈),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도장(李道長) 1603(선조 36)~1644(인조22).
조선의 문신. 자는 태시(泰始), 호는 낙촌(洛村), 공조 참의(工曹參議) 윤우(潤雨)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30년(인조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등용되고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주로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등용되고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주서(注書) 등을 역임,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했다.
이듬해 검열(檢閱)에 이어 지평(持平)에 올랐으며, 그후 교리(校理)․이조 좌랑(吏曹佐郞)․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이르렀다.


이지하(李祉遐)

조선의 지사(志士). 자는 자수(子綏), 부사(府使) 효훈(孝訓)의 아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 15세 때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심복을 시켜 일부러 자기를 논척(論斥)하도록 꾸민 뒤에,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그들의 논척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조정에서의 자기 지위를 굳히려 하자 남학 장의(南學掌議)로 그 계교를 폭로, 이 때문에 이이첨에 의해 중형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그후 1633년(인조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대신들에 의해 지난날의 그 지조가 왕에게 알려져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에 특임(特任), 군수(郡守)에 이르러 81세로 죽었다.


이원정(李元禎) 1622(광해군 14)~1680(숙종6).
조선의 문신.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龜巖), 시호는 문익(文翼), 도장(道長)의 아들. 1648년(인조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2년(효종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검열(檢閱)․교리(校理)를 지내고, 1660년(헌종1)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167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1673년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1677년(숙종3) 대사간, 이 해 형조 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 판서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추산(楚山)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불려와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담명(李聃命) 1646(인조24)~1701(숙종27).
조선의 문신.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이조 판서 원정(元禎)의 아들. 1666년(현종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7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6년간 성균관(成均館) 벼슬을 지내다가 1675년(숙종1) 수찬(修撰)에 등용되었다.
교리(校理)․대사간․병조 참의(兵曹參議)․홍주 목사(洪州牧使)를 거쳐 1679년 승지(承旨)로서 홍우원(洪宇遠)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관직이 삭탈(削奪)되고 유배되었다가 1662년 석방, 복관(復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대사간․부제학(副提學)․공조 참판(工曹參判)․대사헌․경상도 관찰사․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또 원배(遠配), 1699년 풀려나왔다.


이우항(李宇恒) ?~1722(경종2).
조선의 무신. 자는 여구(汝久), 시호는 경무(景武),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도빈(道彬)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사과(司果)를 지내고 1698년(숙종24)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701년 총융사(摠戎使) 이어 포도 대장(捕盜大將)․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 1721년(경종1)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 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소론(少論)의 탄핵을 받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이듬해 백망(白望)․이희지(李喜之) 등과 함께 모역(謀逆)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을 투옥 장살(杖殺)당했다. 신임사화 3장신(三將臣)의 한사람으로 불렸으며 1724년(영조 즉위) 신원(伸寃)되었다.


이하원(李夏源) 1664(현종5)~1747(영조23).
조선의 문신. 자는 원례(元禮), 호는 예남(蘂南)․정졸재(貞拙齋), 도승지(都承旨) 시만(蓍晩)의 아들. 1691년(숙종17) 생원(生員)이 되고, 16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05년 장령(掌令)을 거쳐 1712년 교리(校理)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했다.
경종 때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1725년(영조1) 동지부사(冬至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이 되었다.
1734년 대사간을 지낸 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743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여러 번 대사헌을 지내다가 1746년 공조 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에 밝았고 영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세형(李世珩) 1685(숙종11)~1761(영조37).
조선의 학자. 자는 초백(楚白), 호는 서헌(恕軒), 병조 좌랑(兵曹佐郞) 기명(基命)의 아들. 충주(忠州) 출신. 1720년(숙종4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남인(南人)에 속했으므로 벼슬길에 전망이 보이지 않아 대과(大科) 응시를 포기했다. 학문은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이광현(李光鉉) 1732(영조8)~?.
조선의 문신. 자는 백겸(伯謙), 한원군(漢原君) 수철(守哲)의 후손. 1761년(영조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762년(영조38)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사사(賜死)될 때 가주서(假注書)로 있으면서 그의 구명에 힘쓰다 쫓겨났다. 1899년(광무3)에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만운(李萬運) 1736(영조12)~?.
조선의 학자.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묵헌(黙軒), 원정(元禎)의 5대손. 1777년(정조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벼슬은 지평(持平)에 그쳤다.
박학(博學)하기로 이름이 높였으며 천문(天文)․역산(曆算)․지리(地理)․명물(名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밝았다.
1782년(정조6) 앞서 1770년(영조 46) 홍봉한(洪鳳漢) 등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정(補正)하라는 왕명을 받고, 9년간에 걸쳐 그 잘못을 고치고 탈락된 사항을 첨가한 뒤 새로이 칠고(七考)를 첨가하여 편찬을 완료,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1903년(광무7) ⌈증보문헌비고⌋라 하여 간행을 보아 국학(國學) 연구에 큰 지침이 되고 있다.

이기양(李基讓) 1744(영조20)~1802(순조2).
조선의 천주교도.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덕형(德馨)의 7대손. 1774년(영조50)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 영릉 참봉(英陵參奉)이 되고, 1795년(정조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이어 검상(檢詳)․승지(承旨)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갔다.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은밀히 신봉했으며, 돌아와 실학자 이가환(李家煥) 등과 사귀며 서학(西學)을 강론, 나라의 혁신을 위해 서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우승지(右承旨)․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801년(순조1) 대사간에 전임, 예조 참판․좌승지를 지냈다. 이 해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가 죽은 후 신원(伸寃), 복관(復官)되었다.


이종태(李鍾泰) 1850(철종1)~?.
조선의 서예가. 자는 공래(公來), 호는 소농(筱農), 해룡(海龍)의 후손.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대대로 서예에 이름이 높았고, 대한문(大漢門)의 현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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