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고백의 언어들

1-4. 인간이 다양한 학문을 통해 배우는 것

w.j.lee 2024. 10. 8. 08:53

 

인간이 다양한 학문을 통해 배우는 것

 

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가 알고 있는 협량한 세계가 세상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큰소리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상황은 묻고, 성경은 대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세상 모든 문제의 해답이 성경에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가 끝 끝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은 성경의 세계관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지만, 복잡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낡아빠진 감각을 쇄신하거나 일상을 넘어선 세계와 접속하기 위해서는 예술가 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대중문화를 다루는 사람들로부터도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자기를 개방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미 구축한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일수록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리가 감각에 의지하여 진실이라고 믿는 인식을 가리켜 '독사'doxa 라고 말합니다.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말인데, 근거 없는 억지 견해라는 의미로 '억견'이라 하기도 합니다.

억견은 성찰의 과정을 통과하여 얻은 참된 지식인'에 피스테메'episteme와 구별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야말로 인문학적 태도가 아닐까요?

 

때때로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인문학적입니다. 그건 인본주의가 아닌가요?"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한 마음이 듭니다.

자기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대화를 거부하는 완고함과 정신적 태만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닌가요? 

제가 설교나 강연중 문학 작품이나 동양 철학, 인문학자들의 저서를 소개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이 안다고 과시하려는 의도는 물론 아닙니다.

저는 우리 삶을 순례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군대 훈련 가운데 야간축성훈련이란 것이 있습니다. 

지형지 을 이용하거나 변형시켜서 적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야전삽이나 다른 도구를 사용하여 감쪽같이 진지를 구축했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진지나 은폐, 엄폐물을 만들 민 반드시 반대쪽으로 가서 적의 입장에서 그곳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이 아닌 다른 학문 분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신학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식을 보다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한 차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용서하라는 말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에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

베드로가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놀랄 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마18:21-22).

 

우리는 속으로 '주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나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니 더욱 곤혹스러운게 사실입니다.

사실 살다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피해를 입히고도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당위와 용서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분노를 풀지 못했으면서도 가해자를 짐짓 외면함으로 용서의 몸짓을 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 없는데도 용서한 것처럼 처신하는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문학은 인간을 다양한 상황 속에 놓음으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가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합니다.

관념은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무기력할 때가 많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 아시지요?

이 작품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벌 레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 나가고 있 었다.” 다리 한쪽이 불편한 아들인 알암이를 '아내'(알암이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키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 갔던 알암이가 실종 되고 맙니다.

끈질긴 희망과 기원으로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알암이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절망에 빠진 아내를 일으켜 세운 것은 가까운 곳에서 이불집을 하던 김 집사였습니다.

김 집사는 그녀가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는데 혼자서는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며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아내는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날까 하는 소망으로 교회에 다닙니다.

하지만 그런 소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알암이는 끝내 시신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지지만 무서운 의지력으로 자신을 지탱해 나갑니다.

희망 때문이 아니라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범인이 잡혔지만 아내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범인이 경찰의 보호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져가고 있던 아내에게 김 집사는 범인을 용서하라고 권고합니다.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 한분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역하여 인간이 스스로 남을 원망하고 심판하려 할 때는 그 원망과 심판이 거꾸로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였다.


아내에게 그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나마 그녀가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은 아이의 내세의 구원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아내는 저주와 원망으로 부터 벗어나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원망과 복수의 표적이었던 범인을 찾아가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마침내 법인을 만나고 돌아온 아내는 오히려 절망덩어리로 바뀌고 맙니다.
범인 또한 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때문인지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아내와 마주 앉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외침은 우리에게 깊은 도전이 됩니다.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 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아무도 아내의 절망을 달래 줄 수 없었습니다. 

절망의 심연에 이끌리던 아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맙니다. 

절망의 뿌리를 자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두고 이런저런 논란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이청준 선생은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뒤 이 책을 구상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용서의 문제가 너무 쉽게 발화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마당에서 벌어진 갈등은 인간들끼리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을 때 신 앞에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알암이 엄마의 처지에 있다면 김 집사 처럼 쉽게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딜레마입니다.


출처 : 고백의 언어들(저자 '김기석', 출판 '복있는 사람')

'쉼터 > 고백의 언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 나는 누구인가  (7) 2024.10.08
1-5. 인간 실존, 방황이 상수인 삶  (0) 2024.10.08
1.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1) 2024.10.07
서문  (0) 2024.10.07
차례  (1) 202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