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성경 내용 요약

23.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w.j.lee 2014. 7. 7. 14:15

 

 

23.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성경은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의 일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일들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롬 11:33).

그러기에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었던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숨길 수 없게 된다고 한다(왕상 8:39, 시 139:1~4).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셨을 때

사람의 불완전함과 연약함도 아셨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선악과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는 실수를 범하지 말도록

조치를 하셨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이제 그 선악과는 무엇이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선악과는 실제로 존재 했는가

 

성경에는 선악과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창 2:17),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창 3:3),

“그 실과”(창 3:6), “그 나무 실과”(창 3:11, 12, 17)라는 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나무의 실과를 흔히 선악과라고 불러왔다.

 

선악과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장, 3장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하와를 유혹하는 뱀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의 자연 현상이나 구체적인 증거를 우선으로 한

과학적 판단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떻게 뱀이 간교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으며,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악과 이야기가 고대의 신화나 설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선악과는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온 인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부패가 만연해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 살고 있다(롬 3:10~18).

그런데 성경은 그 원인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결과로 설명한다(롬 5:16~18).

그러므로 우리의 부패한 현실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사실이어야 하고,

그 사실 속에 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선악과도

당연히 실제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성경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동

일한 원리로 설명한다(롬 5:18, 19).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믿는 자 안에서는

그리스도 의가 역사적인 현실로 전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의의 전가와 대비되는

죄의 전가 역시 실제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여겨야 한다.

사도 바울께서는 성도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타락을 경계할 때,

하와의 선악과 범죄를 들어 설명했다(고후 11:3).

이 설명은 선악과가 실제로 있었음을 전제해야만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던 사실

또한 선악과 범죄가 실제 사건이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례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하시려고 하시기만 하면

나귀가 말을 하게 하거나(민 22:28), 돼지 떼를 물에 빠지도록 하는(마 8:32)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얼마든지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하실 수 있다. 마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귀는 영원히 무저갱에 갇히기 전까지

그 활동과 능력의 활용을 허용받고 있기 때문에,

애굽의 술객들이나 거라사 땅의 귀신들렸던 사람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일상적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뱀이 사람을 유혹하고 말을 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2. 선악과는 어떤 과일이었는가

 

선악과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지금의 대추야자나 사과의 모양이었을까.

성경에는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웠다고 했다(창 3:6).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런 언급이 없어,

우리로서는 그 모양이 지금의 어떤 과일과 같았을런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뱀은 하와를 유혹하기를,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고(창 3:5),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정말 눈이 밝아져

자기의 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창 3:7).

그렇다면 선악과 속에는 사람의 눈을 밝혀주는

특별한 효과를 가진 신기한 물질이 들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다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과일이든 가릴 것 없이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과일이 존재론적으로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덕적, 영적인 의미에서 선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존재론적 의미의 선·악과 도덕적, 영적 의미의 선·악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알게 된 선과 악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 속에 도덕적, 영적 의미의 선과 악을 알게 만들어주는

신기한 약효의 존재가 들어 있었다고 하는 무리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같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의 경우와도 같다.

생명나무의 실과는 사람의 영적 생명을 살게 할 만한

신기한 약효가 들어있었기에 생명나무이었던 것이 아니다.

영적 생명은 어떤 실과를 먹는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어진다(엡 2:8,9).

생명나무의 실과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의 언약을 표하고 인쳐 주는 과실이었다.

그래서 그 나무가 생명나무라고 불렸다. 선악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과실 속에 어떤 신기한 약효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의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만한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의 인침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선악과는 그것을 먹었을 때,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을 때,

그 행위가 바로 악이고 언약을 지키는 것은 선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실과,

또는 장차 사람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게 해 줄

역할을 하게 될 언약적 증거가 되는 실과이었기에 선악과로 불렸다.

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생각할 때,

그 속에 어떤 특별한 약효가 들어 있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와 맺어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3.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선악과가 하나님의 언약을 표하는 증거이었다는 사실 속에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던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에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사 43:7, 60:21).

그리고 다른 어떤 피조물들보다도 우월한 위치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성을 더하여 주셨다(창 1:26,27).

이 인격은 지·정·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유의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에 따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찾아 오셔서

선악과를 증거의 표로 삼아 언약을 맺으셨다(히 옛 언약).

이 언약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 오셔서 맺으셨던

참으로 은혜로운 성격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하나님의 은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웅장하고 섬세하게 연주된 음반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처음 배운 노래를,

비록 서툴지만 잘 연습을 하여 부모에게 선물할 때에는

완벽에 가까운 연주 음반을 감상할 때보다도 더 큰 감동을 부모들이 받는다.

어떤 부모들은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다면

부모는 훨씬 더 큰 행복감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칭찬과 상을 아끼려 하지 않는다.

자발적인(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도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언약을 지킴으로 영생을 상급으로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 속에는

당연히 ‘먹지 않으면 살리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순종하면 ‘산다’는 의미에서의 ‘산다’는 것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의미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이 주어지던 당시에도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단지 육체적 생명으로만 사는 것은

약에 대한 상급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케 하려고 만든 부당한 도구이었거나,

사람의 실수를 예상치 못하고 만든 실패작이 아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창조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도구,

그리고 언약을 지킨 사람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시기 위한

선한 도구로 만드신 실과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그 실과를 먹음으로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문제는 선을 위한 도구로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행까지도 때론 묵인하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려 하시지만(창 45:8,9),

사람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의 뒤에 남겨졌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출 32장),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마저도 악용을 하여

범죄의 계기를 삼으려 드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가리켜서,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했다(고전 1:18).

동일한 하나의 십자가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게 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선악과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편에서 선악과를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오해를 하거나 믿음에 방해를 받게 된다면,

선악과는 단지 거추장스럽고 미련스럽게 보이는

방해물에 불과하게 여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