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나의 뿌리

둔촌 이집 (遁村 李集)

w.j.lee 2015. 2. 22. 12:23

둔촌 이집 (遁村 李集)  .. 강동구 둔촌동은 그의 호(號)에서

 

 이집 (李集. 1327~1387) ..본관은 경기도 광주이며 호(號)는 둔촌(遁村)이다.

고려말의 문신으로 깊은 학문과 고상한 지절로 이름을 떨쳐 동 시대의 인물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 (牧隱 李穡),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그리고 정도전 등 여러 명현(名賢)과 교류하였다.

 

그는 광주 이씨 (廣州 李氏)의 중시조(中始祖)로 여겨지고 있다.

중시조(中始祖)란 쇠퇴한 가문을 일으킨 조상을 말한다.

  

 

  

이집이 주로 살았던 곳은 경기도 여주(驪州)이었다.

그는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과 폭 넓은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과 교유관계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대거 관계로 진출하던 공민왕 시절에도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 하였다.

그 사연을 알 수 없지만

그가 젊은 세력 중에서 좀 더 과격한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중용하게 되면서, 신진사류들도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당시 그가 살던 여주(驪州)에는

주변에 권세가와 명유(名儒)들의 토지가 많았던 만큼 정계의 동향에 민감한 곳이었다.

신돈(辛旽)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지방 토호(土豪)들의 권력구도와 행태에도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1368년 (공민왕 18 ), 李集은 어느 날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였고,

그 것이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당시의 실권자인 신돈(辛旽)을 비난하게 되었다.

 

이 야기기를 누군가 신돈에게 보고하였고,

신돈(辛旽)은 크게 화를 내어 당장 李集을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집은 체포되기 전에 도주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55세이었다.

  

정말 한마디 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여주 일대의 여론을 이끌어 가던 인물로 이를 고깝게 생각하던 신돈이 이를 기화로

李集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신돈은 오늘 날까지도 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지만, 적어도 당대에 이 사건은

신돈의 본성과 한계를 보여준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그가 끝내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李集은 체포 소식을 듣자 병든 부친 (이당.李堂)을 업고 아내와 자식을 이끌고 도주하는데,

큰 길로 갈 수가 없어 산속으로 숨어 들어 험한 길로만 도주한다.

  

그의 목적지는 경북 영천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최원도(崔元道)가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초조한 도피생활은 공민왕 20년 신돈(辛旽)이 살해되기 까지

4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원도(崔元道)는 의리있었던 인물로 두려워하지 않고 李集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의 우정은 역사적으로도 기록으로 남겨져 오늘 날에도

그들의 우정 사례는 많은 글에서 인용되고 있다.

  

병든 부친 이당(李堂)은 고향에 돌아 오지도 못하고

永川에서 죽게 되는데, 최원도는 그 장례를 극진하게 치루어 주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안장한 곳에 묘를 차려 주었다.

  

나중에 이집(李集)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지만,

최원도의 가세(家勢)는 쇠퇴하였는데 풍수(風水)를 믿는 사람들은

객(客)이 主人의 운세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한다.

  

 

신돈이 사망하자 겨우 살 길이 마련된 李集은 이 일을 계기로 이름을 집(集)으로 바꾸고,

호(號)를 둔촌(遁村)으로 바꾸었다.  둔촌(遁村)은 촌(村)에 은둔한다는 의미인데,

그는 자신이 살던 마을 이름까지 둔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의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이다.

  

이때에 비로소 이집은 벼슬을 받게 된다.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로 임명된 것이다. 고관직은 아니었지만, 이 때 李集의 나이 60이 넘었다.

李集은 벼슬을 곧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와 평생을 은거하다가 삶을 마쳤다.

 

 

 

李集이 죽은 후,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또한 그 후손들은 더욱 번성하였다.

이극배, 이극감,이극증,이극돈, 이극균 등 5형제는 모두 정승을 지내고, 그 외 사촌들 까지 관직에

진출하여 "극(克)"자 돌림 인물 8명이 한 조정에 있다고 해서 "8극 (8克)"이라고 부를 정도이었다.

 

이 처럼 한 집안 전체가 번성을 누린 것은 조선시대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한다.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문벌을 양성한  경우는 있었지만, 광주이씨의 유명 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한 인물이라는 점이 독특하다고 한다.

 

연산군시절에 이 가문은 큰 숙청을 당하여 일가 수백명이 살해되거나

유배되는 불행을 겪게 되지만, 그러나 연산군이 축출된후 다시 재기한다.

이덕형, 이준경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각형(四角形)의 망주석(望柱石)은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최원도(崔元道)의 우정(友情)

 

 

경상도 영천(永川)에 사는 영천최씨(永川崔氏),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제비라는 예쁜 계집종이 있었다.

그 때 제비의 나이 열아홉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최원도(崔元道)가 갑자기 밥을 세 그릇씩이나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등 반미치광이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시중도 제비가 하게 되는데, 이 갑작스러운 발광을 수상하게 여긴

최원도의 부인은 제비로 하여금 알아보라 지시하였는데,

 

알아보니 벽장 속에 낯선 두 남자를 숨겨 두고

밖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위장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숨어있던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정몽주, 이색 그리고 이숭인과 더불어

나라 안에 소문난 직신(直臣)인 광주사는 이집(李集)과

그의 노부(老父)인 이당(李堂)이었다.

 

 

신돈(辛旽)의 악정(惡政)을 비판하다가 신돈의 비위를 거슬려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지자,

병든 아버지를 업고 멀리 아버지의 친구인 영천(永川)의 최원도집까지 피난하여 왔던 것이다.

벽장 속에서 4년이나 숨어 살았으며, 집안 사람들에게 까지 그 비밀을 유지하고자

반광(半狂)을 연출한 것이다.

  

 

최원도의 부인도 대단한 여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비가 행여 부지불식간에 누설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충직하기 이를데 없던 제비는 부인의 걱정을 눈치채고 사약(賜藥)을 내려 달라고

 복걸(伏乞)하였다.

 

부인은 울면서 돌아 앉아 사약을 내렸고,

제비는 큰 절을 하고 그 것을 받아 마셨다.

제비 또한 역사상 기록될 의비(義婢)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친구의 우정과 의비(義婢)의 절의(節義)로 살아 난

이집은 광주로 올라 와 亡해가는 고려 말기에

義와 節의 정신적 우상으로 여겨지다 죽었다.

 

 

이 의(義)와 절(節)이 후세에 보답을 받아

그의 후손에서 5명의 정승, 6명의 판서, 7명의 공신이 나와

역사에 화려한 둔촌인맥(遁村人脈)을 형성하였다.

 

 ...................................

 

둔촌의 사당은

현재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 7-1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 2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집의 묘역도 같은 곳에 위치한다.

 

  둔촌 이집의 추모 문화사업으로 성남시 자료를 보면

둔촌의 효행과 고결한 인품을 숭모하고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추모사업이 1995년부터 시작된

<둔촌 청소년문학상 백일장>과, <둔촌 한시백일장>, 2006년부터는 성남시와 국제자매도시인

중국 심양시에서 둔촌 선생을 널리 알리기 위한 <둔촌 중국백일장>과

< 한 ․ 중 「冊 읽기와 詩 朗誦>행사는 중국 심양시에서 열리고 있다.

또 둔촌 이야기 자리 행사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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