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삼한시대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 이야기

w.j.lee 2017. 6. 5. 11:31


삼한시대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 이야기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부족 연합체인 삼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이 그것이다.삼한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마한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됐다.

그래서 마한의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진왕(辰王)이 되어 느슨한 연합체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나와 있다.


기원전 1세기 중엽, 마한의 왕에게 다로라는 왕자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목지국 왕이 마한의 왕이었고,

목지국 왕이 삼한의 형식적인 대표인 진왕이 되었기에 다로도 머지않아 진왕이 될 것이었다.

목지국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충남 천안의 직산이었다.

그래서 다로 왕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여행하는 일이 많았다.

다로가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경계지역인 지금의 산청 근처를 지나다

상아라는 아가씨와 우연히 만났다.



알고 보니 상아는 진한의 공주였다.

상아 공주 역시 삼한의 경계지역이자 장시(場市)가 활발하게 열려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청으로 나들이를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다로 왕자는 자신이 목지국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다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두 사람은 돌아가서도 내내 서로를 그리워하였다.

다로 왕자는 부왕에게 아뢰어 진한의 상아 공주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아 공주 역시 허락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목지국으로 다로 왕자를 찾아갈 각오까지 하였다.

그래서 단단히 결심을 하고는 부왕을 찾아갔는데 때가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마한에서 조공을 미루는 진한을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이다.



진한 조정에서는 맞서 싸우자는 강경파와 항복을 하자는 온건파가 대립을 하였다.

결국 원로 중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아 공주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부왕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지리산 깊은 곳으로 피신한 진한의 조정에서는 서둘러 임시 궁궐을 지었다.

비록 허름하게 지은
임시 궁궐이기는 하지만 달처럼 예쁘다 해서 달궁이라 불렀다


지리산 달궁계곡 전경. 지금은 여름철 피서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진한 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

쪽 10리 밖에 있는 고개[嶺]에 정 장군을,

동쪽 20리 밖에는 황 장군을,

또한 남쪽 20리 밖에는 성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고개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하였다.

그즈음 마한 목지국에서는

진한이 지리산으로 피해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에 진한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한에만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의 소국이 있었으니

연락을 취하는 데도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려면 군량미도 풍부해야 하기 때문에

각 씨족과 부족에 군량미를 할당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은 더욱 큰일 이었다.

그때 다로 왕자가 자신을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부왕에게 간청하였다.

부왕 역시 전쟁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여 수락하였다.

수소문을 한 끝에 다로 왕자는 진한 조정이 피신해 있다는 달궁으로 찾아갔다. 하

지만 다로 왕자는 달궁 근처도 못가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목지국의 왕자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산청에서 다로 왕자를 본 적이 있는 젊은 장수 덕분에

다로 왕자는 달궁으로 가서 진한 왕을 만나게 되었다.



조공에 관한 조정안을 낸 다로 왕자는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과 상아 공주가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전쟁 직전까지 갔던 마한과 진한 사이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다로 왕자는 훗날 진왕이 되었고 상아 공주는 진왕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짓자마자 쓸모가 없게 된 달궁은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 궁궐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정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서쪽 고개를 정령재,

황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동쪽 고개를 황령재,

세 명의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남쪽 고개를 성삼재,

여덟 명의 젊은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북쪽 고개를 팔랑재라 부른다고 한다.


@지리산 정령재(정령치)에서 바라본 남원.

이처럼 달궁 주변에는 사방을 경계하는 곳에 배치된 장군의 성을 딴 이름이 붙었다.





출처 : 설화 그 원석을 깨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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