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능가사와 류구국 태자 보현

w.j.lee 2017. 6. 1. 11:43


능가사와 류구국 태자 보현


고흥 팔영산 밑에 있는 능가사(楞伽寺).

419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했다.

아도화상이 이 절을 지으면서 언젠가 보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인이 나타나

절을 유명하게 만들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제 말기 때의 일이다. 보

현사 근처에 승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어

려서부터 행실이 바른데다 외모까지 곱상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승아는 불심이 깊어 정기적으로 보현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시주를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보현사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행색은 초라하였지만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보현사에서 머물게 된 나그네는 점차 기력을 회복하면서 얼굴에 광채가 났다.

하지만 뭐라 설명을 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그네는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부처님 전에 뭐라 기도를 하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표정만 보아도 매우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아가 보현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나그네와 마주치게 되었다.

나그네가 승아를 보고는 뭐라 말을 걸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은밀하게 만났다.

청춘남녀가 사랑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다 점차 승아와 나그네는 손짓 발짓, 그리고 한자를 섞어가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그네는 류구국(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의 태자였다.

부왕의 생신 선물을 구하기 위해 태자가 직접 배를 타고 남만(지금의 베트남)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깨어보니 낯선 바닷가였다.

그래서 정신없이 걷다 보니 팔영산에 이르게 되었고,

쓰러지기 직전에야 보현사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가사에서 바라본 고흥 팔영산의 모습.


한자로 서로의 이름을 이야기하던 승아는 깜짝 놀랐다.

태자의 이름이 보현(普賢)이었기 때문이다.

보현태자 역시 절 이름이 보현인 것을 보고는 인연이라 생각하여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승아의 이야기를 들은 주지 스님은 깜짝 놀랐다.

전설 속 보현이라는 귀인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보현태자를 대하는 스님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마치 관세음보살이라도 대하듯 떠받들었다.

그런데 승아를 만난 뒤로 보현태자의 기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승아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고국에 계시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생각하다 보니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승아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을 꺼냈다. 그

러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둘 다 같았다.

서로가 부모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말없이 품속으로 파고드는 승아에게 태자도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보현태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더니 태자를 감싸 안고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 너의 기도가 지극하여 류구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마."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자 보현태자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비록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승아와 이별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세음보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태자를 끼고는 파도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졸지에 보현태자와 생이별을 하게 된 승아는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채 지냈다.

그런 승아를 보다 못한 부모님이 보현사 주지 스님을 찾아가 상의를 하였다.

그랬더니 주지 스님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승아가 전생에 이미 보현태자와의 인연이 닿았다며

이제 속세의 인연을 끊고 보현태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렇게 해서 승아는 머리를 깎고 보현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주지 스님은 보현태자와 승아의 그러한 슬픈 사연을 담아 벽화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사연이 널리 알려져 보현사에는 그 벽화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다.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까지 벽화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출처 : 설화 그 원석을 깨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