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한국의 說話

순천 송광면에 전해 내려오는공민왕 설화

w.j.lee 2017. 5. 29. 11:44


순천 송광면에 전해 내려오는공민왕 설화


순천시 송광면 왕대마을 뒷산에는 커다란 바위에 5개의 구멍이 정교하게 뚫려 있다. 직경이 다섯 치(치는 한 자의 10분의 1로서 약 3cm)이고 깊이는 여섯 치 가량 된다. 공민왕이 오장깃대를 꽂았던 곳이다. 관리가 되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박진화(70) 전 이장의 안내로 찾게 되었다.


고려 말 순천 송광면 어느 마을, 멀리서 뿌연 먼지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시골마을에 웬 병사들일까?

마을사람들은 어느 지체 높은 귀인이 잠시 쉬기 위해 행차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마을 높은 곳에 막사를 치더니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마을사람들이 투덜거릴 즈음 그 귀인이 사실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왕이 살았다 하여 왕대 마을이라 불렀다


공민왕이 살았다 하여 이름붙여진 왕대마을 전경.
왕대마을에 왕의 거처를 마련한 병사들은 마을 뒤 나복산(蘿蔔山)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고 오장깃대를 꽂았다. 멀리서 보아도 위엄이 서린 깃발이었다.

공민왕이 피난을 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어머니를 모신 마을을 모후실(母后實)이라 불렀고,
나복산 이름도 모후산(母后山)이라 새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모후실을 후곡마을로 개명하였다.
왕대마을과 모후실은 직선 거리로 약 1.2km쯤 떨어져 있는데,
왕대마을과 모후실을 잇는 골짜기를 빈골이라 부른다.
공민왕의 호위 장수들이 왕과 모후의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밤중에 말을 타고 이 골짜기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부싯돌로 쓰이는 돌들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말을 달릴 때마다 돌들이 부딪혀 불꽃이 튀는 바람에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기에 돌들을 한쪽으로 모두 치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을 차돌백이라 부른다.

 

왕대마을과 모후실 사이 빈골. 지금은 포장이 되어 차돌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날 왕이 모후에게 들러 문안을 여쭈는데
모후가 왕에게 특별히 차려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였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이 마을 앞 개울에서 피라미를 잡아와 바쳤다.
탕을 끓여 맛을 보았는데 왕은 물론 모후도 흡족해 하였다.
그래서 모후실에서는 피라미를 왕등어(王登魚)라 부른다.
낚시를 해도 잡히는 고기가 왕등어밖에 없는데,
왕의 밥상에 올랐다 하여 왕등어라 부른다는 것이다.
또한 공민왕이 왕대마을에 도착하기 전 잠시 머물렀던 마을은
'머무를 유, 서울 경' 해서 지금도 유경(留京)마을이라 한다.


@공민왕이 머물렀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경(留京)마을 전경.


모후실(후곡마을)에서 조계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타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이 살피봉인데,
접근해오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망을 서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공민왕이 안동에 피난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모후산 일대로 피난 왔다는 사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안동의 지명이 복주(福州)였고

화순군 동복의 옛 이름 역시 복주(福州)여서
지명의 혼동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출처 : 설화 그 원석을 깨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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