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통성경 길라잡이

35과 : 로마제국과 중간사 - 헤롯왕조

w.j.lee 2025. 2. 20. 01:10

 

35과 : 로마제국과 중간사 - 헤롯왕조

 

 

통(通)으로 외우세요
1. 신약성경 전체 27권은 모두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2. 로마는 헤롯왕조를 유대의 분봉왕으로 삼아 예루살렘을 효과적으로 다스렸습니다.

(通)으로 읽는 센스

역사적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성경 전체 사건은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모든 나라에 호적을 정확하게 정리하여 단 한 푼의 세금도 누락되지 않도록 철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때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로마에 의해 채석장이 있었던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당시 기록한 책입니다.

통(通)포인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신약성경의 삭개오와 마태의 직업 세리,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위해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여행한 것 모두 로마의 세금과 관련이 있습니다.

화폐와 세금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했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바리새인의 질문 :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 옳다고 대답할 경우 : 세금으로 힘들어하는 백성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림

 • 그르다고 대답할 경우 : 로마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지목될 위험
- 예수님의 대답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

 

 

1.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 로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B.C.8세기 북이 스라엘에서는 아모스, 호세아, 요나 선지자가 그리고 남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로마는 '신화'를 쓰면서 탄생했습니다.

그 시절 로마에서는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로마는 처음 300여 년 동안은 왕정을 했고, 그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을 수립하기 이전까지 500여 년간 공화정을 실시했습니다.

공화정은 '원로원과 시민의 협의체'로 왕 한 명의 독재를 견제하고 300명의 원로원 의원이 모여 회의를 하고 안건을 만들면 그 후 시민들의 의견을 물어 나라의 일을 결정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로마는 제국이 되기 이전까지 이러한 공화정 체제를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B.C.100년에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스트에 의해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황제의 통치인 제정이 확립됩니다.

로마의 제정 청사진은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들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을 로마의 정치 체제로 확고하게 수립했습니다.

 

통(通)포인트

 

폼페이우스
-
B.C.63년, 유대 내부 싸움을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예루살렘 침략, 오리엔트 세계 점령

 

대제국 로마

- 포에니 전쟁승리 후 아프리카, 서유럽(카이사르), 오리엔트(폼페이우스) 전체를 지배함

- 대제국 로마의 운영 방식에 대한 의견

  : 원로원중심(키케로를 대표로하는 원로원 의원들) vs. 제정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 B.C.100년 출생/40세에 로마의 핵으로 부상/갈리아(켈트) 점령

- 1차 삼두정치 :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카이사르와 적이 되게 함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장악

- 2년여 내전 카이사르승 : 종신독재관, 56세에 암살당함

- 카이사르가 남긴 것 : 후계자 옥타비아누스 / 로마 경영 청사진 / 로마시민들에게 유산

 

옥타비아누스(존칭 : 아우구스투스, 성경: 가이사 아구스도)

- 로마 시민들이 카이사르 암살범들을 '아버지를 죽인자'로 생각하게 함 : 옥타비아누스는 이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

- 2차 삼두정치 :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 악티움 해전 :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군대 격파

- 로마의 초대 황제

- 신약성경 '가이사 아구스도' : 호적 명령 (눅 2:1)

 

대헤롯
- 에돔출신

- 탁월한 정치적 술수와 아첨으로 로마로부터 '분봉왕' 칭호 받음

- 가이사랴(카이사레아)라는 신도시를 세움

* 카이사르를 위한 도시, 즉 로마황제에게 바친 도시라는 뜻

- 예루살렘 성전건축

- 마태복음 2장의 헤롯

- 세 아들에게 왕국 분할

 

헤롯 아켈라오

- 유대(사마리아와 이두매 포함)

- 마2:22~23

 

헤롯 안티파스

- 갈릴리와 베뢰아
- 예수님의 공생애 3년과 가장 깊은 관련
- 세례요한을 죽임

- '저 여우'(눅 13:31~32)

- 눅 23:12

 

헤롯 빌립(헤롯 빌립 2세)
-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
- 빌립보 가이사랴를 세움 .

 

3. 아리스토불루스 1세

B.C.64년경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헤롯의 아버지인 안티파터(하스몬 왕조의 2인자)의 요구로 유대의 내부 싸움(하스몬 왕조의 6년 간의 내전)을 중재한다는 명목하에 예루살렘에 옵니다.

폼페이우스가 보낸 바비누스 장군은 예루살렘 성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계속되는 포위 공격에 들어갑니다.

결국 로마 군대는 세 달 만에 성벽에 구멍을 뚫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로써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땅은 신흥 제국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이익을 위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두 아들과 두 딸을 로마로 압송하고, 힐카누스 2세를 다시 대제사장의 자리에 올 려놓습니다.

이로 인해 하스몬 왕조의 80년간의 유대 통치는 끝이 나고, 유대는 또다시 제국의 식민지 백성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 자체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60여 년 전, 로마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해 로마의 원로원 제도를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현행 원로원 제도로는 로마라는 대제국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없으므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과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를 묶어 1차 삼 두정치를 이루어내고 로마를 함께 다스렸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금의 서유럽인 갈리아를 정복하여 로마에서 큰 명성과 함께 막대한 부를 획득합니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원로원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실을 눈치챈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진격합니다.

 

마침내 2년에 걸친 내전을 통해 로마를 평정한 카이사르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로써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 정책, 빈민구제 사업 등의 개혁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된 카이사르는 B.C.44년 3월 원로원 회의장에서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합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립이 본격화됩니다.

B.C.31년 옥타비아 누스의 로마군이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로마의 패권을 잡습니다.

이로써 로마는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어간에 이두매(에돔)인들은 그 틈에 끼어들어서 식민지 내에서 지분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에돔 출신인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은 로마로 가서 탁월한 정치적 술수와 아첨을 통해 '분봉왕'이라는 칭호를 받아서 유대로 옵니다.

로마는 식민지에 로마 총독을 파견하거나 제국에 충성도가 높은 분봉 왕을 세워 다스리는 것을 그들의 정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용한 헤롯이 분봉왕의 자리를 차지하여 유대인들의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유대 지역 통치에 헤롯을 이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식민지보다 많은 세금을 바치는 민족이었고, 동시에 어느 민족보다 종교적인 민족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종교 부문을 잘 관리해주면 유대 민족은 제국에 큰 힘이 되는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예루살렘을 포위하러 갔다가 18만 5천 명이 죽었고, 바벨론 제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고,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 성전이 모독당하자 마카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제국은 유대 민족의 이러한 역사를 공부해 헤롯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해주며 유대 민족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율법에 무관심했으며 많은 인명을 살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유대 분봉왕으로 34년간 통치한 후 죽고, 헤롯의 뜻에 따라 유대 지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됩니다.

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사마리아와 이두매 포함)의 왕,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 헤롯 빌립 2세는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습니다.

 

이처럼 계속 강대국들의 지배와 억압을 견디며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연히 '구원'에 대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마치 오래전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수백 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구원을 하소연했듯이,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기대하는 메시아 사상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다윗같이 강한 구원자가 나타나서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시대의 영화를 재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강한 열망을 품고 살아가던 유대인들, 바로 그들에게 우리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3. 예수님과 가이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그 당시의 유대는 로마라는 제국이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을 포함한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대를 포함 한 중동 지역까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 전에 있었던 제국과는 달리 나라의 자치를 많이 인정해주는 정책을 폈으며 특히 종교 면에서는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다신교 국가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에는 약 30만 개 이상의 신이 있었기 때문입 니다.

 

따라서 로마의 통치하에 있으면서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삶은 이전에 비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중한 세금 때문에 피폐한 생활을 해야 했던 유대 백성에게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만이 종교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희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사야 9장에 근거한, 강하고 힘있는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사야>에서 공부했듯 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이사야 9장의 강력한 메시아와 53장의 고난 받는 메시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신들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전 세계에 우뚝 선 선민으로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을 때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저 별을 따라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과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일은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황제에 의해 통치되는 제국의 정책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뜻: 존엄한 자,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친 존칭)가 되어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됩니다.

그가 바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가이사'란 '카이사르' 를 말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에 카이사르라는 그의 성이 '황제' 라는 칭호가 된 것입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제국 전체의 정확한 호적을 근거로 더 많은 세금을 걷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만삭인 마리아와 요셉은 해산을 곧 앞두고도 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 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합니다.

헤롯과 동방박사

 

오늘날 세계 각 나라의 지폐에는 대부분 사람의 얼굴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세종대왕, 율곡 이이 등이 있고 미국의 지폐에는 링컨 대통령이나 워싱턴 대통령의 얼굴이 있으며 영국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동전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도록 했습니다. 

그 옛날,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이 돈의 위력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는 모든 나라 사람은 직접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동전을 통해 누구나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우리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과중한 세금 때문에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로마인 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그른 일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로마에 세금을 내는 일이 옳다고 말씀하신다면, 많은 세금으로 힘 들어하는 백성은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고, 반대로 로마에 세금을 내는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할 경우에는 로마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지목되어 체포당할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눅 20:24)라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이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께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돈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금

 

4. 신약 시대 로마 총독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로마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로부터 유대를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은 왕은 헤롯이 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또한 그들이 다스리는 전 세계의 나라에 전직 집정 관들을 총독으로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로부터 파견된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의 지도자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다스릴 때, 민족 내의 종교 문제나 가벼운 민사사건은 산 헤드린 공회를 통해 해결하도록 일정 권한을 주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사안이나 형사 문제는 로마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면, 로마 총독이 사형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서 일차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가서 다시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지워진 죄목은 로마의 허락 없이 백성을 선동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로마 총독을 가장 예민하게 만드는 사안임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 해본 결과, 법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총독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을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의 회유를 받은 유대 백성은 민란을 일으킬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총독 빌라도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총독 빌라도는 우리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무책임하게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역시, 로마 제국이라는 시대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선 예수님

 

또한 우리는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혜는 대단했습니다.

재판을 통해 유죄가 증명되기 전까지 로마 시민권자는 함부로 누군가에게 맞거나 감옥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죽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로마의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말하고 목숨을 지킵니다.

당시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천부장은 자기 담당 지역에서 로마 시민권자가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게 된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많은 군인을 동원하여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재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황제 재판을 기다리던 바울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악명 높은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때 안타깝게도 네로 황제가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움으로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 보낸 것도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출처 : 통성경 길라잡이 (조병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