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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라 조정의 입장에선... 삼별초와 장보고는 ‘역적’이었다

w.j.lee 2025. 3. 18. 01:10

제주 항몽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마지막 전투 기록화.

 

제주올레길을 걷다 보면 해안에서 ‘탐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는 유적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환해장성(環海長城)입니다. 

외적으로부터 섬을 방어하기 위해 300리, 약 120㎞에 걸쳐 해안에 쌓은 성입니다. 

제주도답게 구멍이 뚫린 현무암으로 촘촘하게 건조된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애월, 삼양, 조천, 김녕에서 서귀포시의 온평 등 제주도 내 14곳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곳의 환해장성이 원래 모습 대신 무너지고 난 흔적만 잔존해 있는 상태라, 담장 수준의 저 유적이 뭐 그렇게 대단한가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훼손되기 전 원래 모습은 상당히 장엄했을 것입니다. 

이 장성은 조선시대엔 왜구나 이양선의 침입을 막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대체 이 성은 누가 왜 쌓은 것일까요?

인터넷을 보면 일부에선 환해장성의 기원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에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긴 뒤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것은 삼별초가 외적의 침입에 저항한 대몽항쟁의 주체라는 교과서적 지식에 위화감 없이 맞아떨어지는 설명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정답은 ‘고려 조정에서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라는 것입니다.

서기 1270년(원종 11년) 원나라와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며 진도의 용장산성에 거점을 마련한 삼별초가 제주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조정이 고여림 등을 보내 쌓은 성이 바로 환해장성이었습니다.

나중에 삼별초가 근거지를 제주로 옮긴 뒤 이 성을 자신들이 활용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삼별초가 쌓은 성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삼별초와 합심해서 몽골에 저항해도 모자랄 판에, 삼별초를 막으려고 성을 쌓아?


고려의 명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방경(1212~1300)은 훗날 여몽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할 때 고려의 피해를 최소화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1273년 몽골군과 함께 제주도의 삼별초를 공격해 전멸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계몽사에서 나온 한국전기전집에 수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이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선 ‘외국군과 함께 삼별초를 공격하다니 반민족적인 자가 아니냐’는 의견도 보입니다.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삼별초라는 존재는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역적’이었습니다. 

무신 정권을 종식시키고 전쟁 국면에서 벗어나려는 고려 왕 원종의 입장에선 삼별초는 과거 최씨 정권의 주구로 보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남쪽으로 내려간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고려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습니다. 

반역이라고 볼 선을 넘은 것이죠. 

1271년 삼별초 세력은 ‘고려 조정’의 명의로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에 국서를 보내 병력 수만 명을 요청했는데, 일본의 한 관료가 ‘이 국서는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을 적은 메모가 ‘고려첩장불심조조’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려의 (문관 출신) 장군인 김방경은 철저히 자신이 충성을 바쳐 온, 그리고 이제 무신 정권을 극복하려는 고려 조정을 위해 일한 것일 뿐입니다. 

‘왜 삼별초와 한편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은 21세기 현대인의 시각일 뿐입니다. 

고려 조정과 김방경의 입장에서 삼별초는 ‘반란의 주체’였던 것이니까요.


누군가는 묻겠죠. 

그럼 지금의 우리는 고려 조정과 삼별초 중 누구를 정통으로 삼고 편을 들어야 하느냐고요. 

글쎄요. 두 세력 모두 자신들의 입장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별초는 실패했고 멸망했기 때문에 그들이 세운 ‘정부’는 왕조로 인정 받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인이 ‘해상왕’으로 인식하는 신라의 장보고는 서기 846년 신라 문성왕의 부하인 염장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염장은 부정적이거나 음험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까요? 

신라 조정의 입장에선 왕위 계승에 개입한 지방 호족, 반란 세력, 해적 수괴가 다름아닌 장보고였을 것이고, 염장은 충신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란 무 자르듯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고비마다 대단히 미묘한 국면을 드러내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시각에서 역사를 보느냐에 따라 같은 시기에 대립했던 세력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과연 어느 쪽이 공의(公義)를 더 위했고 어느 쪽이 사리(私利)에 더 충실했는지를 가리는 일일 것입니다. 

 

삼별초나 장보고의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면서 잠시 명분을 얻은 것으로 착각해 경거망동한다면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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